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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 ‘신라의 모태’ 사로국 건물 터, 월성서 처음 발견 (2024.10.05.)

 



 

 

 

 

신라의 모태사로국 건물 터, 경주 월성서 처음 발견

 

2024. 10. 2. 

 

 

4~10세기 신라의 왕성이 들어섰던

경북 경주 월성 유적(국가사적)에서

신라의 모태인 3세기 사로국의 건물 터가 처음 발견됐다.

월성에서 발견된 건물 터 중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월성 성곽을 본격적으로 쌓기 전 지은 것으로 확인된다.

모래땅 위에 터를 닦는 토목공사 자취도 드러났고, 제례의 희생물로 쓰였다고 추정되는

수캐 한마리의 온전한 골격까지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소장 황인호)

최근 경주 교동 42번지 일대(월정교 옆)의 월성 서남쪽 지점에서

발굴 조사를 벌여 3세기대 선조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던 취락의 흔적들과

건물 자리 조성 공사의 흔적들을 확인했다고 2일 발표했다.

연구소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중엽까지

경주 일대에서 존속한 초기국가 단계의 작은 나라로 진한 12국 중 하나였던

사로국 사람들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로국 시기 거주 형태가 월성 내부에서 조사된 것은

최초의 사례라는 설명이다.

 

조사가 진행된 구역은 월성 에이(A)지구로 불리는

월성 유적 서남쪽 가장자리다.

원래는 월성 유적을 끼고 흐르는 남천 기슭의 연약한 지반에

모래층이 쌓인 곳이었다.

조사단은 발굴 과정에서 3세기 초중반 이 지점에 취락을 만들기 위해

높이 1.5m가량 흙을 쌓고 다지는 성토 작업이 진행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벼의 겉껍질, 식물 종자, 조개껍질 등이 뒤섞인 유기 물질을

성토 공사 작업 공정별로 달리 투입해 썼다는 것도 드러났다.

 

장기명 연구사는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월성 성벽은 4세기 축조됐다는 게 확실하게 입증됐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그보다 100여년 앞선 시점에 이미 권력층이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지반 흙을 다지는

대규모 토목작업을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3세기 사로국 시대에도 월성 일대가 경주에서 중심 구역이었음을 일러주는

중요한 근거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취락 유적 들머리에서는 특별한 의례를 치른 뒤

불 질러 태운 것으로 보이는 건물 공간 흔적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온전한 골격을 갖춘 수컷 개 한마리의 뼈들이 출토돼 눈길을 끌었다.

의례용 건물 터는 직경 6m가량의 동그란 평면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들었고,

내부는 화재로 새카맣게 탄 모습을 띠고 있다.

출토된 개뼈는 놓임새로 보아 의례용 제물로 바친 정황이 분명하다고

조사단은 추정했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성곽이나 수로 등 도시 유적에 제사를 지낼 때

소와 말을 제물로 쓰는 사례가 종종 발견되지만,

개를 제물로 쓴 유례는 거의 없다.

 

연구소는 오는 7일 오후 2시 월정교 옆 유적 현장에서

발굴 조사 성과를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연다.

8일 오전 10시 경주 힐튼호텔에서 발굴 성과에 대한

학술 토론회도 진행한다.

 

글 출처 - 한겨레신문사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경주 월성

慶州 月城

반월성(半月城), 재성(在城)

 

 

요약

 

경주 월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신라의 왕성이다. 

월성은 동서의 길이가 890m, 남북의 길이가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는 2,340m이다. 

월성은 201(파사 이사금 22)부터 사료에 등장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교호 성토된 토성은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월성은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건립 경위

 

경주 월성은 신라의 왕궁을 보호하는 왕성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다. 

월성은 경주 분지의 중심부 남쪽에 위치하는데, 

남천 북안의 소규모 단독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다. 

월성의 전체 둘레는 2,340m이며, 내부 면적은 207,528이다. 

동서의 길이는 890m, 남북의 길이는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이다. 

이러한 성의 외형적 특징 때문에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월성과 해자에서 재성명 와당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 경주 역사 유적 지구의 일부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삼국사기 이후, 경주 월성에 대해 다양한 기록들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37(혁거세 거서간 21)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金城)이라고 불렀다는 기록과

기원전 32(동왕 26)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금성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중국 사서와 금석문에서도 확인되는데,

482(소지 마립간 4) 이후에는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여기서 금성은 왕경(王京) 자체를 의미하거나, 

별개의 왕성을 지칭한다.

 

경주 월성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삼국사기 101(파사 이사금 22)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내용을 전한다. 

이 기록들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금성과 월성은 구분되는 성이고, 

월성 축조 이전에 다른 궁성이 존재하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금성이 신라 왕도를 지칭한다는 견해와

월성의 이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금성과 월성을 구분하여

월성 이외의 초기 궁궐을 상정한 의견도 있다.

 월성과 다른 별개 궁성의 존재를 인정한 견해에서도

위치의 비정(比定)에는 차이가 있다. 

고려~조선시대의 경주 읍성(慶州邑城) 자리로 보는 견해와

읍성을 포함하여 동쪽으로 전랑지(殿廊址) 서편에 이르는

알천(閼川) 이남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읍성 부근으로 알천 및 형산강과 인접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와

알천 북쪽의 황성 공원 일대로 파악하거나

월성의 남쪽이자 남산 북쪽 기슭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는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태이다.

 

삼국사기에는 101(파사 이사금 22)에 월성을 쌓고, 

왕의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궁성인 월성 축조 후에

금성에서 왕성을 옮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월성 내외부의 건물로

조원전(朝元殿), 숭례전(崇禮殿), 내황전(內黃殿), 강무전(講武殿), 평의전(平議殿), 

서란전(瑞蘭殿) 등의 전각이 확인된다. 

그리고 고루(鼓樓), 망은루(望恩樓), 명학루(鳴鶴樓), 월상루(月上樓) 등의 누각 시설과

물장고(物藏庫), 천존고(天尊庫)와 같은 창고 건물 등의 명칭이 보인다. 

이러한 건물들이 모두 월성 내부에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왕궁 혹은 주변의 부속 시설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조에 월성은 

101(파사 이사금 22)에 쌓았는데, 

모양이 반달과 같기 때문에 월성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라고 하며, 

토축의 둘레가 3,023척이라고 기록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다른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월성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전한다.

290(유례 이사금 7)에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소지 마립간 9)에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월성 안에는 남쪽과 북쪽에 귀정문(歸正門) · 북문(北門) · 인화문(仁化門) · 현덕문(玄德門) · 

무평문(武平門) · 준례문(遵禮門) 등의 성문과

월상루(月上樓) · 망덕루(望德樓) · 명학루(鳴鶴樓) · 고루(鼓樓)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南堂), 

신하들의 조하를 하고,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朝元殿), 

삼궁(三宮: 大宮 · 梁宮 · 沙梁宮)을 관할하던 내성(內省)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현재 월성 내부에는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월성 내부로 옮겨서 축조한

석빙고가 남아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1914년부터 지금까지 월성과 내외부에서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1914년에 남벽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1979~1989년에 현재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

(,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전신인 경주 고적 발굴 조사단에 의해 진행되었다. 

경주 고적 발굴 조사단은

동문지와 동벽, 성 외부에의 석축 해자 등을 확인했다.

 

1990년부터는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해자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다. 

해자는 북벽 외곽 서쪽부터 석축 1~5호 해자와

가장 동쪽의 석축 해자로 구분된다. 

석축 해자의 하단부에서는 기반층을 굴토한 수혈 해자가 확인되었다. 

수혈 해자가 매몰된 이후에 상부에 6개소의 독립된 형태의

호안 석축이 있는 석축 해자가 조성되었다. 

각각의 해자는 입수구와 출수구로 서로 연결된 상태이고,

2~4차례에 걸쳐 보수된 흔적이 확인되었다. 

석축 해자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가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9~10세기경에 월성의 사용이 중단되면서 함께 폐기되었다.

 

기록과 발굴 조사를 통해 월성의 내외부에서는

궁궐 혹은 관청과 관련된 다수의 건물이 배치되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월성 외곽 건물지는 해자 주변에서 다수 확인되어

월성의 관리와 관련된 관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월성 내부는 A~D 지구로 나누어 조사가 진행 중인데, 

이 중 C 지구에서는 월성 폐기 직전까지 사용된 17동의 건물지가

계획적으로 배치된 것이 파악되었으며, 

하부에는 선대의 건물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3세기를 전후하여 10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동벽과 서벽 등에서 월성 성벽의 절개 조사가 진행되었다. 

성벽은 기반암을 정지한 뒤 기초를 성토하고, 

점토, 소토, 석회 등 물성이 다른 토제로 교호 성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점토를 얇게 깔아 마무리하고

상부에 석재를 무질서하게 올려 토성의 유실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 확인된다. 

기저부 조성 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통하여 

4세기 중엽에 기초부가 조성되었고 5세기 초반에

성이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의 축조 및 사용 시기 등에 대해서는 

3세기 말에서 5세기 후반까지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데, 

고고학적인 조사에 근거한다면 월성의 초축 시기는 5세기를 전후한 것이 되므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이에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마립간 시기의 내용을 부회하여

사로국(斯盧國) 단계의 초기 기사에 월성의 존재가 기록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4세기에 본격적인 월성 축조 이전에 월성 내 자연 구릉에

별개의 토루(土壘)가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

 

의의 및 평가

 

경주 월성은 신라 초기에 축조되어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왕성이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처럼 경주 월성은 핵심적인 도성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석빙고

[ Stone Ice Storage, Gyeongju , 慶州 石氷庫 ]

 

 

19631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이다.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崇禎紀元後再戊午1738(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석빙고  (두산백과)

 

 

 

 

 

 

 



 

 

 

 

 

 

 

 

 

 

 

월정교

 

20085월에 착공해

누교(20168)와 문루(20184) 순차적으로 준공하고

10여년 만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교량 부분은 66.15m이고,

교량 양끝을 받치는 문루는 정면 5, 측면 3(17.7m×9.6m) 최고 높이 15.67m

중층 건물로 주심포 양식에 팔작지붕 형태를 띤 한식목구조이다. 

 

신라왕궁인 월성과 남산을 잇는 대표적 다리로

신라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고대 교량 건축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시는 향후 복원된 월정교 문루 2층을 출토유물과

교량건축의 시대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디지털 전시관

월정교 역사와 복원과정을 담은 영상관으로 활용해 경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신라 천년수도이며

민족문화의 본향인 경주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신라왕경복원정비사업의 첫 가시적 성과물로,

찬란했던 신라 역사와 문화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