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가 마크 포스터 게이지
마크 포스터 게이지(Mark Foster Gage)는 미국의 건축가로, 독특하고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 하나는 뉴욕 맨해튼에 제안한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미국 건축 전문매체인 아케닉트에서
소개되었으며, 뉴욕 41 웨스트 57 스트리트에 위치합니다. 또한 그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네옴시티 프로젝트에서 리조트
트레이암(TREYAM)을 설계했습니다. 이 리조트는 세계에서 가장 긴 450m 길이의 루프탑 인피니티 풀을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끄는 리조트입니다. 마크 포스터 게이지는 단순한 럭셔리 호텔 건물을 넘어 관점과 시각의 변화를 통해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마크 포스터 게이지(Mark Foster Gage)는 건축과 신유물론을 탐구하는 건축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하고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특징을 지니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는 유기적으로 변이된 형상을 형태의 발생과 진화 과정으로 분석하며,
건축의 미래를 상상하고 제안합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환경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을 고려하여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의 건축 철학은 현대적인 도시와 환경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창의적인 해결책을 통해 미래를 긍정적으로 모색하는 것입니다.
홈페이지 - https://www.mfga.com/
출처 - Copilot
사우디아라비아의 신도시 프로젝트 '네옴'. 지난 10월부터 네옴시티를 구성할 공간들이 차례로 공개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진행 중인 세계 최대의 스마트 도시 ‘네옴(NEOM)’을 구성하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공개됐다. 바로 최고급 리조트 트레이암(TREYAM)이다. 트레이암은 사막과 바다가 맞닿은 아카바 만 남쪽 끝에 자리할 예정으로 푸른색의 석호를 마주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네옴 프로젝트를 이끄는 네옴 컴퍼니는 지난 2021년 네옴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프로젝트로 친환경 도시 ‘더 라인(The Line)’, 글로벌 산업 지구 ‘옥사곤(Oxagon)’, 최고(最高) 산맥에 지어질 휴양·관광 도시 ‘트로제나(Trojena)’, 그리고 올해 개장을 앞둔 럭셔리 아일랜드 ‘신달라(Sindalah)’를 발표한 바 있다. 국제적인 이슈가 된 메가 프로젝트인 만큼 사우디발 소식에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이후 한동안 별다른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0월부터 네옴 컴퍼니는 네옴 프로젝트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네옴 시티를 구성할 새로운 프로젝트를 연달아 소개 중이다. 흥미로운 건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아카바 만을 따라서 포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명확한 의도는 아직 공개된 바는 없지만, 기존 10개로 알려졌던 네옴 프로젝트의 수는 리조트 트레이암 발표로 총 14개로 늘었다.
네옴(NEOM) 산하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최고급 리조트 트레이암 소개에 앞서 네옴 프로젝트는 아카바 만 전역을 무대로 레이자(Leyja), 에피콘(Epicon), 시라나(Siranna), 우타모(Utamo), 놀라나(Norlana), 아쿠엘룸(Aquellum), 자르둔(Zardun), 자이노르(Xaynor), 엘라난(Elanan), 기도리(Gidori) 등 여러 관광 이니셔티브를 차례대로 공개했다. 트레이암은 이 중에서 가장 최근에 공개된 프로젝트이다. 앞으로 또 어떤 프로젝트가 소개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네옴시티라는 이름 아래 진행되는 (현재까지) 14개의 프로젝트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친환경’이다. 트레이암에서는 아름다운 라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것도 바로 사우디 비전 2030 아래 진행 중인 네옴 프로젝트가 ‘보존’과 ‘혁신’을 주요 가치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어드벤처, 오아시스, 웰니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세 개의 레이자 호텔
트레이암 공개에 앞서 소개된 ‘레이자(Leyja)’ 프로젝트는 자연에 대한 네옴 프로젝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아카바 만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400미터 높이의 협곡을 따라 세워질 세 개의 레이자 호텔은 95%의 자연을 보존하는 원칙 아래 진행됐다. 각각의 위치와 건축 특징에 따라 어드벤처(adventure), 오아시스(oasis), 웰니스(wellness) 라고 불리는데 세 개의 호텔은 자연 보존과 동시에 이를 위한 혁신적인 건축 디자인으로도 눈길을 끈다. 특히 협곡 지형의 곡선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한 해체주의 건축 디자인과 계곡 벽을 비춤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주는 반사 파사드가 대표적이다.
두 개의 타워로 구성된 에피콘의 예상 모습
한편 사막 해안에 자리할 ‘에피콘(Epicon)’은 각각 225m와 275m 높이를 지닌 두 개의 타워로 구성된 럭셔리 호텔 겸 레지던스이다. 높은 건물 높이를 통해 최소한의 사막 면적을 사용했고, 해변을 활용한 45채의 해변 빌라도 구성했다. 기존의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입지 조건을 공간 기획과 건축 설계에 적용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미래형 공연장으로 불리는 ‘우타모(Utamo)’도 기존의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공간을 구축했다. 덕분에 산 중턱에 공연장이 자리 잡게 되었는데 해안가에서 공연장이 있는 그랜드 홀 입구까지 이르는 길목에 50종 이상의 관목, 허브, 꽃을 심어 산책로를 구성했다. 아울러 공연장 내·외관 디자인은 해안가 절벽의 주상절리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해안가에 자리한 육각기둥 디자인의 호텔 시라나(Siranna)와도 비슷한 모습이다. 한편 우타모는 2천6백 석 규모의 공연장에서는 실황 공연뿐만 아니라 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공연 등 현실과 디지털이 결합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외에도 산속 웰니스 휴양지인 엘라난(Elanan), 레지덴셜 골프 커뮤니티 기도리(Gidori), 회원 전용 비치 클럽 자이노르(Xaynor), 해발 400m 산 속에 정육면체 건물이 자리한 아쿠엘룸(Aquellum) 등 네옴시티의 프로젝트들은 95% 자연을 보존하고, 100% 재생에너지를 활용해 탄소 배출 제로를 실천할 계획이다.
세계 최장 인피니티 풀을 지닌 친환경 리조트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 프로젝트에서 지난 2월 소개한 최신 프로젝트 ‘트레이암’ 리조트
사우디 드림 ‘네옴시티’ 프로젝트가 공개한 최신 프로젝트 트레이암도 흥미롭다. 럭셔리 리조트로 250개의 넉넉한 객실을 지녔고, 무엇보다 450m 길이의 루프탑 인피니티 풀을 갖춰 세계에서 가장 긴 인피니티 풀을 지닌 리조트로 불릴 전망이다. 더불어 바다 위로 36미터 높이에 떠 있는 구조로도 눈길을 끈다. 이는 자연으로의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한 결과물이다. U자를 그리는 만의 북쪽과 남쪽 양 끝 지점을 잇는 다리 모양의 건축물로 해안선이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다. 아울러 아래로는 산호초, 물고기 등 라군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위로는 하늘을 볼 수 있는 파노라마 뷰도 누릴 수 있다.
450m 길이의 인피니티 풀은 세계에서 최장 길이의 풀이 될 전망이다.
리조트 트레이암의 설계를 맡은 미국 건축가 마크 포스터 게이지(Mark Foster Gage)는 “단순한 럭셔리 호텔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변화, 시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특히 건축이 어떻게 자연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라며 시각적으로 보이는 건축 디자인 그 이면에 녹여낸 건축가의 생각을 트레이암 소개 영상 속에서 언급했다. 이어서 “오랜 시간 천혜의 자연을 유지해 온 아카바 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호텔을 땅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올리기로 했다. 모든 객실의 바닥과 천장은 유리를 활용해 부분적으로 투명하게 처리했고, 이를 통해 바다와 천체가 지닌 무한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의도했다.”라고 언급하며 트레이암의 독특한 건축 디자인 배경에 대해서 설명했다.
한편 새로운 밴티지 포인트를 제공하는 트레이암의 또 다른 키워드는 ‘모험’과 ‘도전’이다. 자연환경을 단순히 감상하는 걸 넘어서 그 안에서 직접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액티비티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라고. 세일링, 다이빙 등 수상 스포츠는 물론이고 육상 액티비티까지 즐길 수 있다. 더불어 헬스와 피트니스를 위한 시설, 고급 스파 트리트먼트, 기술로 만족감을 높여 줄 웰니스 서비스와 엄선된 파인 다이닝 등 ‘사우디 드림’이라고도 불리는 ‘네옴시티’의 한 조각이 과연 어떻게 구현될지 기대되는 바이다.
출처 - 사우디 '네옴시티'가 선보일 친환경 리조트, 트레이암 | Design+
3. [르포] 베일에 싸인 710조 네옴시티 건설은 이미 시작됐다
기사입력 2022-11-10 14:00:44
[e대한경제=이재현 기자]전세계 건설사들의 눈은 지금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해있다. 총사업비만 710조원, 지구 역사상 단일 규모 최대 프로젝트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프로젝트’ 때문이다.
그러나 네옴시티 현장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 사우디 정부가 인접국가와의 정치적 문제 등으로 현장 공개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사우디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네옴시티 정보 외에는 현장에 대한 모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네옴시티는 불가능하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나온다.
사우디아라비아 타북(Tabuk) 지역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지역까지 이어진 공식도로(사우디아라비아 공동취재단) |
7일(현지시간) e대한경제가 네옴시티 예정부지가 마련된 사우디 타북(Tabuk)주에 도착하자 프로젝트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졌다. 네옴시티 건설을 위한 작업이 이미 시작됐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네옴시티는 총 3개의 프로젝트를 합친 것을 말한다. 이 중 타북에서부터 이집트 홍해가 갈라지는 지역까지 일직선으로 건설되는 ‘더 라인(The Line)’ 프로젝트가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더 라인의 규모는 서울 면적의 44배에 달하는 2만6500㎢다. 이곳에는 길이 170km, 높이 500m, 폭 200m 규모로 높고 좁은 긴 형태의 건물이 건설된다. 건물은 골조가 세워지면 모듈러 방식으로 별도 제작한 시설을 장착한다.
이렇게 완성된 건물에는 주거시설과 상업시설은 물론 스마트팜 등이 포함된 다양한 형태의 시설이 들어선다. 자급자족의 도시가 컨셉인 더 라인에는 약 900만 인구가 거주하게 된다.
더 라인 중심에는 지하터널이 건설된다. 시속 300km 이상 달리는 고속철도로 더 라인의 시작과 끝 지역을 20분만에 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더 라인 공사가 진행될 예정 부지에서 다양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공동취재단) |
더 라인 이동의 핵심인 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첫 임무는 현대건설과 삼성물산 컨소시엄이 맡았다. 더 라인이 들어서게 될 부지 초입 해발 1800m의 암석으로 이뤄진 산을 뚫어 28km의 터널을 조성하는 이번 사업은 총사업비만 1조3000억원에 달한다.
지난 8일(현지시간) 현대건설ㆍ삼성물산 컨소시엄은 터널 공사를 위해 첫 발파를 진행하며 공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와 함께 네옴시티 현장은 관련 인프라를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작업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더 라인 고속철도 터널 공사를 위한 터파기 작업이 대표적이다. 막대한 중장비들이 현장을 오가며 쉴새없이 사막의 모래를 퍼 날랐다. 지면을 25m 깊이로 판 다음 콘크리트로 만든 박스모양의 터널을 매설하는 방식의 터널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또한 작업에 필요한 막대한 콘크리트 사용을 위한 배합시설도 들어섰고 왕복 2차선 도로도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보안을 위한 현장 통제로 기자가 방문한 지역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사우디 정부는 국내외 기업인과 일반인을 위한 ‘네옴시티 더 라인’ 전시장을 마련했다.
사우디아라비야 수도 리야드에 마련된 ‘네옴시티 더 라인’ 전시장(사우디아라비아 공동취재단) |
이번주부터 시작된 전시장에는 네옴시티 조감도 및 모형 등이 다양하게 마련됐다. 2030년 완공이 목표인 네옴시티를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장에서 기자와 만난 타렉 캇두미 네옴도시계획 수석 디렉터는 “오염과 인구과밀, 교통체증 등으로 기존의 도시는 더 진보하기 어렵다”며 “네옴시티는 지구를 지키기 위한 프로젝트이며 빈민층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이재현기자 ljh@
〈출처 - e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지난 포스팅 ‘메타버스와 건축’을 통해 가상세계의 지위가 격상된 먼 미래에 건축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해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금 더 가까운 미래의 건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지어지고 있는 대다수의 건물에는 아직까지도 모더니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도심, 주거지를 가리지 않고 빽빽하게 자리한 커튼월 빌딩과 아파트는 모두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건물들이지요.
각각 해체주의와 브루탈리즘 건축의 대표작, 월트디즈니 콘서트 홀(Walt Disney Concert Hall)과 해비타트 67(Habitat 67)
그간 모더니즘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극단적 모더니즘은 ‘몰인간성’, ‘몰개성’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행위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 하에 ‘해체주의’, ‘브루탈리즘’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가성비’를 도저히 이겨낼 재간이 없었고, 주로 랜드마크적 건물을 통해 제한적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그렇다면 가상세계가 만연하기 전, 실물 건축의 지배적인 사조는 모더니즘이라는 종착역을 가지는 것일까요?
Mark Foster Gage (1973 ~)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드리는 Mark Foster Gage (1973 ~)는 모더니즘 그 이후의 건축에 대해 탐구하는 건축가입니다. 그간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여러 대안을 제시해온 Mark Foster Gage는 지난 2015년 진행된 INK 강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모더니즘 이후의 건물을 다음과 같이 이미지화했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이미지는 하나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스타일의 제스쳐와 이미지가 서로 뒤섞여 존재할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Mark Foster Gage가 디자인한 건물은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요?
Nicola Formichetti Store NYC (2012)
Helsinki Guggenheim Museum (2014)
W 57th Street Residential Tower (2015)
National Center for Science & Innovation of Lithuania (2016)
Mark Foster Gage에 의해 실제로 구축되었거나 컴퓨터로 렌더링된 위 이미지들은 전부 기괴할 정도로 복잡한 외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괴한 외관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짜깁기한 무의미한 이미지의 집합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Mark Foster Gage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Mark Foster Gage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건축, 공학, 철학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건축은 그가 ‘무엇(What)’을 하는지에 해당하며, 공학은 그것을 ‘어떻게(How)’하는지에 해당하고, 철학은 그것을 ‘왜(Why)’ 하는지에 해당한다고 하지요.
이 중에서 ‘철학’은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의 이유에 해당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는 철학이라는 방대한 학문이 가지는 내용 중 특히나 표상(appearance)과 그 뒤에 숨겨진 실체(reality)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겉모습을 통해 무언가를 인식하며, 이 인식을 통해 형성된 개인의 해석에는 항상 차이가 발생합니다. 똑같은 달그림자가 누군가에게는 방아를 찧는 토끼로, 다른 이에게는 집게를 들고 있는 꽃게처럼 보이는 것도 이러한 예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개성’의 영역 안에 존재할 때에는 다양성과 즐거움을 가져오지만, 그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여러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각자의 의견을 편견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 이르면 서로 소통을 단절하게 되며, 더 나아가 자신의 관점을 억지로 관철하고자 하면 충돌이 발생하지요.
Mark Foster Gage는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무마시키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가 주로 활용하는 방법은 갈등이 발생한 지점에 더 거대한 개념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서로 논쟁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사안보다 훨씬 큰 담론을 도입하면, 이 둘의 의견 차이는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언급하며 Mark Foster Gage는 'Bill Bryson(빌 브라이슨)'의 저서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g(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일부 구절을 인용합니다.
“…we live in a universe whose age we can't quite compute, surrounded by stars whose distances we don't altogether know, filled with matter we can't identify, operating in conformance with physical laws whose properties we don’t truly understand.”
"…우리는 정확히 계산될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별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의 주변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정의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Bill Bryson,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건축이나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형태는 기능을 따라야 한다.’는 격언에 이미 익숙할 것입니다. Mark Foster Gage는 모더니스트들에게 마치 진리와 같이 여겨진 이 격언에 더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에 따르면 건축은 Bill Bryson의 인용문이 암시하는 거대함(vastness)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건축은 우리라는 존재보다 훨씬 큰 것들을 상기시키는 윤리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 개개인의 차이가 사실상 별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진정 형태는 기능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축가의 건물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실현되었을까요? Mark Foster Gage가 설계한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내용,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건축이 어떤 배경을 통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해서는(필자의 분량 조절 실패로 인해) 다음 포스팅을 통해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포스팅의 말미에 언급했던 몇몇 질문 중, ‘형태는 기능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에 대해 생각해 보며 글을 열고자 합니다. 사실 애초에 ‘형태’라는 것에 ‘정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대안, 혹은 피해야 할 오답들이 있을 따름이지요. 이는 어떤 색이 가장 아름다운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형태는 기능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왜 디자인계의 금언과 같이 여겨진 것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특수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디자인이라는 분야는 태생적으로 '타겟 집단의 공감'에서 자유롭기 힘든 분야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중 건축 다자인의 경우 타 분야에 비해 동원되는 자본의 규모가 상당히 크며,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만큼 이해관계자 혹은 건물과 함께할 대중의 지지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지요.
‘형태는 기능을 따라야 한다’, ‘장식은 죄악이다.’ 등의 격언 역시 이러한 건축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예 중의 하나입니다. 절대왕정과 귀족계급의 몰락 이후 세상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자리한 자본가와 시민 계급에게 공간과 재화를 낭비하는 종래의 건축은 썩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자본가들은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적당히 먹고 살 만하기’를 바랐으며, 그간 처참한 주거환경에 처해있던 시민에게도 일단 ‘적당히 먹고살 만한’ 환경이 절실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계의 새로운 주인공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능에 충실하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가성비’ 좋은 제품과 건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위에 언급되었던 격언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중의 동의를 얻은 ‘시대 정신’일지언정 ‘절대 진리’는 아닌 것이지요.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 1925~2018)와 그의 대표적인 저서 Learning From Las Vegas(1972)
이에 더해 ‘형태는 기능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 1925~2018)'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기능은 사실 다양한 형태에서 똑같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더니스트의 미니멀한 디자인은 기능을 따르다 보니 발생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 의해 선호된 미적 스타일이었지요. 1966년 논문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에서 로버트 벤투리는 암시와 상징, 미적 장식, 유머도 없으며, 호기심도 자아내지 못하는 건축은 따분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형태를 기능이라는 틀 안에 가두길 거부했으며, 단순함 대신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간 숭상되어왔던 재료 본연의 아름다움과 기능적 편리를 추구하는 디자인은 지루한 디자인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에게 적은 것은 그야말로 따분(Less is a bore) 했습니다. 이는 모더니즘 건축 미학에 대한 거부임과 동시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는 발상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선언은 추후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 '건축은 우리라는 존재보다 훨씬 거대한 것(vastness)들을 상기시키는 윤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라는 마크 포스터의 발언을 살펴보면, 이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줄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능과 무관한 파격적인 외관을 가진 그의 건물에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깔려있는 것이지요. 마크 포스터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그의 프로젝트를 살펴보기 전, 건물의 형태가 기능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오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건축을 통해 어떻게 거대한 담론을 제시했을까요? 본격적으로 그의 프로젝트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Mark Foster Gage, Nicola Formichetti Store, 2012
Nicola Formichetti Store 인테리어 프로젝트는 상점을 ‘비물질화(dematerialize)’하여 사람들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키고자 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는 잘게 분할된 불규칙한 형태의 거울을 이용해 무수한 면을 가진 방을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객의 시선을 옷에 집중시키고자 내부 공간을 미니멀하게 디자인하는 다른 상점들과는 달리, 옷을 무수한 거울 파편에 반사시켜 공간 전체를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채운 것이지요. 그는 이를 통해 일종의 오브제를 단순히 '전시'해온 기존의 의류 리테일 매장에서 벗어나 공간 자체에서 디자이너의 영감을 느낄 수 있는 체험형 리테일 공간을 창조했습니다.
Mark Foster Gage, H&M Pavilion, 2015
H&M Pavilion에서는 보다 과감한 주제를 담아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도 그는 옷을 단순히 전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관람객들이 일상적 사물이 가진 신비로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Mark Foster Gage, H&M Pavilion, 2015
그는 먼저 옷들을 코트 걸이 대신 나무에 매달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걸린 옷을 스캔 및 확대하여 사람들이 확대된 옷감 위를 걸어볼 수 있도록 했지요. 마지막으로 그는 VR 기술을 동원해 사람들이 마치 작은 미생물이 된 것 마냥 스캔 된 직물 속을 걸어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Mark Foster Gage는 첨단 기술을 통해 패션을 세 가지의 다른 스케일 (나무 위, 패턴, 박테리아)로 재해석했으며, 이는 관찰의 방법, 관찰 주체 등에 따라 같은 사물이나 현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Mark Foster Gage, Helsinki Guggenheim Museum, 2014
일상적 오브제는 헬싱키 구겐하임 뮤지엄 프로젝트에서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Mark Foster Gage는 이 프로젝트에서 일상적인 사물의 3D 모델링 자료들을 조합하여 기이한 입면을 만들었으며, 이것을 ‘Kitbashing’(커스텀 피규어 모델 등을 만들 때 부품을 새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용 모형 키트의 부품을 재조합하여 만드는 방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건물의 입면을 구성하며 인터넷,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된 채 잊혀져 버린 정크 3D 데이터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고철, 플라스틱 따위를 재활용하듯, 데이터도 재활용해보자는 생각이었지요. 그 결과 이 복잡한 입면을 디자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별 장식이 없는 평면으로 벽을 세우는 것만큼이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대략 이틀 정도)고 합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이미 만들어진 3D 매스를 쌓거나 겹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며, 정보처리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 덕에, 이 정도의 데이터를 핸들링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또한 이렇게나 복잡한 입면을 시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두 명의 학생을 이탈리아로 파견, 석재를 조각하는 장인과 협업을 진행토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석공예 장비에 로봇과 프로그래밍 기술을 결합하여 컴퓨터를 통해 Kitbashing된 오브제가 실제 세상에 탄생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헬싱키 구겐하임 뮤지엄 프로젝트의 입면은 높은 해상도를 가진 엄청난 양의 오브제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하나의 건물을 읽는 데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각각의 관찰자들은 서로 다른 방식과 순서로 오브제를 관찰할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각 관찰자는 같은 건물에 대한 서로 다른 내러티브를 만들게 됩니다. 그는 이 건물을 통해 단일한 무언가를 상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의 관찰을 통해 발생하는 무수히 많은 해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신비로움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Mark Foster Gage, W 57th Street Residential Tower(Khaleesi), 2015
‘Khaleesi’라는 별명이 붙여진 이 프로젝트 역시 동일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뉴욕 센트럴 파크 남쪽에 위치한 본 프로젝트의 지리적 특성을 살려 단순히 높은 고층건물이 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했지요. 그 결과 이 건물 역시 온라인에서 무작위로 찾은 오브제들로 구성되었고, 사람들이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이 건물을 이해하고 바라보도록 의도했습니다.
Mark Foster Gage, W 57th Street Residential Tower(Khaleesi), 2015
Mark Foster Gage, National Center for Science & Innovation, 2016
프렉탈 구조를 활용한 위 건물은 건축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들 중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해보자는 활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입니다. 프렉탈 구조는 반복적이며 밀도 높은 형태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실제로 엄청난 컴퓨터 용량을 필요로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먼저 컴퓨터로 프랙탈 모형을 생성하였고, MRI를 활용해 이를 무수히 많은 레이어로 스캔한 뒤 건축 프로그램으로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Mark Foster Gage, National Center for Science & Innovation, 2016
그 결과 만들어진 건물의 입면은 차원이 다른 디테일을 보여줍니다. 의도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입구는 신비스러움을 감추고 있으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건물 깊은 곳으로 유도합니다. 건물에 접근함에 따라 사람들은 그간 보이지 않던 더욱 세밀한 디테일을 마주하게 되며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과 우주의 스케일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점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혼란을 발생시키게 되지요. 결국 이 건물은 그간 사람들이 가져온 세상에 대한 인식을 뒤흔드는 촉매가 됩니다.
당연하게도(?) 마크 포스터의 실험적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계획안으로 남아있습니다. 정보처리 기술이 많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현장을 관리하고, 형상을 구축하는 주체가 '사람'인 이상 위와 같은 수준의 복잡함을 구현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하지만 이탈리아 석공에게 파견된 학생의 로봇 기술이 더욱 발전한다면 어떨까요? 공사의 전 과정이 기계화된 시대가 도래하는 경우에는 또 어떠할까요?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건설 프로젝트도 꾸준히 시도되고 있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또 마냥 불가능한 프로젝트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건축을 통해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자 하는 건축가, 마크 포스터에 대한 소개는 여기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포스팅에 참고한 강연 영상을 하단에 첨부해 두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6. 마크 포스터 게이지 Architecture that Challenges your Concept of Reality // TED Talks
본문 번역 / 요약
세상에는 개인과 그 개인을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그 세상에 대한 개인의 인식이 존재한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 주신 C-3PO의 할로윈 의상을 마치 진짜 그 로봇이 된 것 마냥 즐거워했던 나와 그런 내 모습을 옥수수 의상이라고 생각했던 이웃집 아주머니는 동일한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개인의 예라고 할 수 있다. TV에 나오는 시트콤이나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이용한 개그 소재가 만연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즐거움을 유발하는 범위를 너머 훨씬 커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한 그룹이 현실을 자각하는 방식이 다른 그룹의 다른 방식과 그다지 연관되어지고 싶어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이 편견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가 더욱 커지고, 마침내 그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다른이들이게 억지로 주입시키고자 할 때 전쟁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나의 작업과 글에서 내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거리를 무마시키는 더 큰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서로 논쟁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각자의 논지보다 훨씬 큰 현실의 근접함 속에 그 둘을 갖다 놓는다면, 이 둘의 의견 차이는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미학으로부터 성취될 수 있는 사회적 관념이다. 여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용문이 있다.
우리는 정확하게 계산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별들에 둘러싸여 있고, 우리의 주변은 정의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 있으며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물리학에 적응하여 작동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Bill Bryson, A Short History of Nearby
건축은 역사적으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개념을 따라왔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건물은 기능에 맞게 보여야 한다는 말들은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형태는 기능이 아닌 이 인용구에서 말하는 ‘거대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축은 우리보다 훨씬 큰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윤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차이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 규범의 첫 단계일 뿐이고 다른 모든 규범들의 단계들과 통합될거라 믿는다. 이것은 결국 차이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작업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한 상점의 실내 인테리어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상점을 비물성화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건축이 ‘관점을 변화시키는 기계’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의 상점이나 소매행위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작업이기도 했다. 첫번째 단계로 거울을 이용해 자잘한 복합면으로 둘러싸인 구조를 만들었다. 내부 인테리어 다음으로 제품까지 우리의 작업을 확장시켰는데, 코트걸이 자체를 디자인하기 보다는 옷들을 나무 안에 놓아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뒤에 보이는 오렌지색 셔츠가 보일텐데, 우리는 이 셔츠의 패턴을 스캔해서 확대한 다음 작은 아코브를 만들어 사람들이 그 위를 걷게 했다. 이 패턴은 큰 스케일로 체험되어 진다. 마지막으로 오큘러스 리스트를 사용해서 사람들이 가상세계 속에서 마치 작은 미생물이 된 것 마냥 직물 속을 걷기도 한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는 패션을 세 가지의 다른 스케일로 - 나무 위, 패턴, 박테리아 - 재해석 했다. 이것은 셔츠 만큼이나 일상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Nicola Formichetti Store NYC
두 번째 프로젝트는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오브제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재조합시킴으로써 또 한번 다시 기이한 것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Kitbashing’이라고 이름 붙였고, 이는 단순히 몇 개의 건축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브제들의 덩어리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싱키 구겐하임 미술관 공모전에 제출한 안에서, 우리는 높은 해상도를 가진 엄청난 양의 오브제들을 재구성 시켰는데, 이는 이 건물을 읽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가 본 것과 다른 오브제들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전혀 다른 네러티브를 찾아낼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이 건물은 새를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당신이 더 깊게 관찰하며 건축을 탐험할 수 있는 신비스러움을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
Helsinki Guggenheim Museum Helsinki Guggenheim Museum
예일 대학에서 가르치는 두 명의 내 학생을 이탈리아에 있는 로봇으로 석재를 조각하는 장인에게 보냈는데, 그들은 단단한 석재를 깍아 냄으로써 Kitbashing된 오브제가 실제 세상에 탄생할 수 있도록 로봇을 프로그래밍 하고 있다. 우리는 건축을 사람들이 해석해야 하는 무언가로 코드화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Kalici’라는 별명이 붙여진 이 건물은 뉴욕 센트럴 파크 남쪽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단순히 높은 고층건물이 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역시나 우리는 신비스러움을 통해 건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그들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사람들이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이 건물을 이해하고 바라보도록 의도했다. 그 결과 우리는 모든 건물의 부분들을 온라인에서 무작위로 찾은 오브제들로 구성함으로써 색다른 건축을 만들어냈다.
W 57th Street Residential Tower
마지막 프로젝트는 프렉탈을 이용한 작업이었다. 우리 사무실에서 실험해온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프렉탈은 반복적이고 밀도 높은 형태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엄청난 컴퓨터 용량이 필요로했다. 실제로 우리는 이 프렉탈 스펀지를 만든 뒤 MRI를 촬영하는 기술을 사용해서 이를 여러 층으로 스캔한 뒤 건축 프로그램으로 불러들였다. 리투아니아 과학 혁신 센터 공모전은 이 스캔된 여러 층의 모형을 가지고 디자인한 작업이었다. 144개의 참가작 중 유일한 미국팀이었던 우리는 당선 혹은 가작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가작을 받았다. 건물의 입면 표현은 다른 차원의 디테일을 보여주고 있고, 주 출입구는 숨겨져 있다. 의도적으로 한 발짝 물러난 입구는 신비스러움을 감추고 있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들 스스로 문을 통해 건물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건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여지는 엄청난 세밀한 디테일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더 깊게 건물 안으로 이끌고,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점유하고 있는지 관한 의문과 혼란을 발생시켜 다시 한번 호기심을 일으키고 건축은 결국 사람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인식을 뒤흔드는 촉매제로 작동한다.
National Center for Science & Innovation of Lithuania National Center for Science & Innovation of Lithuania
출처 - 마크 포스터 게이지 Architecture that Challenges your Concept of Reality // TED Talks (tistory.com)
7.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영감받은 뉴욕 빌딩 사진
2015-12-1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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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건축가 마크 포스터 게이지(Mark Foster Gage)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제안한 건물이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 건축 전문매체 아케닉트 15일(이하 현지시각) 보도에 따르면 이 건물 대상지는 뉴욕 41 웨스트 57 스트리트다.
Mark Foster Gage wants to propose this Game of Thrones-like skyscraper for NYC.건물은 총 102층이며 대부분 유리로 만들어졌다. 입주자는 건물에서 센트럴 파크와 맨해튼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64층에는 스카이 로비가 마련됐다. 상점이 들어서 있으며 2층짜리 연회장과 4 스타급 최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온다.
이 건물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받은 건 곳곳에 붙은 돌, 청동 조각이다. 최근에는 잘 쓰이지 않았던 고전적인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건축가 게이지는 이에 대해 "요즘 부자들은 집을 부동산의 하나로 여기는 걸 넘어 색다르고 예쁜 걸 찾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미국 기술 전문매체 테크 인사이더는 그가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에서 영감을 받아, 건물 이름을 '더 칼리시(The Khaleesi)'라고 지었다"고 전했다. 칼리시는 드라마에서 용의 어머니이자 여왕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출처 -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영감받은 뉴욕 빌딩 사진 | 위키트리 (wikitree.co.kr)
8. 「건축과 객체」 그레이엄 하먼 (下)
by imkykimm 2024. 4. 2.
1,2 장에서 그레이엄 하먼은 객체지향존재론과 함께 자율적인 객체로서의 건축을 논해야 한다고 밝힌다. 동시에 철학가와 건축가들의 역사적 맥락에 근거하여 ‘제로-형태’, 그리고 ‘제로-기능’적인 건축을 추구해야 하는 철학적 사유를 밝힌다. 3,4,5장에서 하먼은 객체지향성, 건축의 미학적 중심성 그리고 건축적 세포의 개념을 파고들어 가며 객체지향 존재론적 건축을 향한 담론을 이끌어 간다.
3장 | 객체지향성
근현대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 하이데거,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의 공통점은 누구도 심층의 실재를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연의 철학자 데리다에게는 심층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심층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자기-현전적’이고, 기호들의 편재하는 연출 아래 불가능할 정도로 잠복해 있는 자기동일적인 단위체라고(데리다가 보기에는 그릇되게도) 자처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주의적으로 잠재영역은 불균질하면서 연속적이지만, 그런 불균질성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명확한 표현도 그 영역의 근원적 연속성을 참작하면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모든 것이 돌연한 단절 없이 여타의 모든 것으로 변화하는 연속주의 철학을 깊이 신봉하는 사람이, 개구부, 문턱, 입구, 벽 그리고 복도에서 구현되는 명확한 단절점들을 설명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더 일반적으로 이산적인 기능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모든 존재자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결코 완전히 이산적이지 못하게 하는 단 하나의 같은 땅에 뿌리박고 있다. 개별성이 나타날 수 있는 곳은 ‘하늘’이다. 하이데거가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원초적 전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사 아낙사고라스처럼 개별적 존재자들이 오직 인간의 사유 때문에 그 전체가 분리된다는 것은 유사하다. 암묵적으로, 레비나스의 경우에는 명시적으로 실재 자체가 인간 사유의 파생적 노동에 의해서만 부분들로 분할된 하나의 웅성거리는 총체이다.
건축 현상학(하이데거)은 거의 유아론적인 개인적 경험에 매우 몰입하여서 윤리적인 것 혹은 정치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하위감각적인 것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해체주의(데리다)는 그 자체로 명시적으로 식별 가능하고 파괴적인 것에, 개념적 역설을 마음에 현시하는 행위에 매우 집중하여서 우리에게 자기 밀폐적인 사물을 정말로 제공할 수 없다. 연속주의(들뢰즈)는 준-분절된 형태들을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런데 연속주의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곳에서도 임시방편적인 국소적 차이를 생성하고 이들 차이가 한낱 어떤 ‘분균질하고 연속적인’ 구배에 따른 국소적 강도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핑계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들의 건축적 실수로는 춤토르가 얼얼한 피부와 경이감에 사로잡힌 눈에 호소하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암묵적으로 검열하는 온천을 건설한 사례, 아이젠만이 이론적 진술의 명목으로 편의성을 적극적으로 전복시킨 사례, 슈마허가 개구부들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인정한 사례가 있다.
황야의 실재론
후설과 하이데거 같은 대륙철학의 선도적인 영웅들은 일반적으로 인간 인식 너머 세계의 현존을 ‘사이비 문제’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 속 객체에 주의를 기울일 때 언제나 이미 자신의 외부에 있다거나(후설), 혹은 부러지거나 고장이 나는 경우에만 명시적인 것이 되는 도구의 전이론적 사용에 언제나 관여하기(하이데거)때문이다.
실재론은 무언가가 우리와 독립적으로 현존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며, 그것이 ‘물질’이어야 한다고 반드시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사변적 실재론은 메이야수와 브리시에의 수학이나 자연과학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합리론적 판본들과 OOO의 사유가 앎과 관련된 존재론적으로 독특한 지위를 갖추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실재의 또 다른 생산물일 따름이라고 간주하는 비합리론적 판본들로 분할되었다.
칸트는 바로 실재와 우리의 실재에의 접근을 뒤섞은 인공적 혼합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실패한다. 즉, 오로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 오성의 열두 가지 범주에 의거하여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메이야수가 혐오하는 유한성에 갇힌 채로 있게 되며, 게다가 주지하다시피 세계에의 인간 접근의 권역 너머 세계에 관한 어떤 언명도 표명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메이야수의 목표는, 독일 관념론은 결코 시도조차 하지 않은 방식으로, 실재를 사유의 권역으로 내파하지 않은 채로 실재 자체를 논의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물자체는 완전히 사유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종의 생존 기간에 앞서 현존할 뿐만 아니라 그 기간 이후에도 현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즉자적’인 것이라도 한다. 그는 상관주의가 잘못 삭제한 사유와 세계 사이의 분리를 다시 도입하게 된다.
라투르는 칸트가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실상 불가분한 실재의 두 갈래 사이의 불가능한 분리를 창출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간주한다. 메이야수와 정반대의 의견으로, 사유와 세계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메이야수와 라투르의 칸트에 대한 비판은 둘 다 사유/세계, 문화/자연 혹은 인간/비인간으로 일컬어질 수 있듯, 실재를 분할하는 두 개의 극이 존재한다는 근대주의의 존재분류학적 견해를 수용한 것으로 향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실재를 직접 알 수 없음을 밝히고, 데리다는 모든 자기동일적(동일성) 실재의 현존을 부정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모두 사유와 세계가 두 가지 기본적인 항으로서 상정된 칸트주의적 지평 내에서 계속해서 작동한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객체들의 현전 이외에 객체-객체 상호작용은 두 사상가의 작업에서 거의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OOO의 요점은 사유/세계 쌍이 독자적으로 새로운 존재자로서의 물을 산출하는 수소/산소 결합과 그 종류가 전혀 다르지 않은 하나의 복합체라는 것이다. 물이 한낱 두 가지 순수한 화학 원소의 오염된 혼합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나름의 자율적인 실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포함하는 복합체도 자체 요소들의 독립적인 본성을 은폐하는 더러운 혼합물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새로운 특성들을 갖춘 새로운 실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객체 사이의 관계 역시 나 자신을 비록하여 모든 사람이 파악할 수 없는 하나의 객체이다. 물은 두 가지 원소 성분 사이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수소와 산소를 넘어서는 하나의 창발적 존재자 이기도 하고, 따라서 자신의 부분들의 총합 이상의 것이다.
객체와 그 성질들 사이의 긴장 ─ 가변적인 윤곽을 갖춘 불가사의한 것들
OOO는 객체와 그 성질들 사이의 긴장을 중시하며, 이는 네 가지 다른 형태를 띤다. 실재적 객체-감각적 성질(수직적 긴장), 실재적 객체-실재적 성질(인과적 긴장), 감각적 객체-감각적 성질(수평적 긴장) 그리고 감각적 객체-감각적 성질(형상적 긴장)이다.
가변적인 윤곽을 갖춘 불가사의한 것들이란 수직적 긴장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 객체의 성질들을 감각하지만, 그 객체 자체는 아무튼 여전히 불가해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은 미학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상당히 기본적인 인간 경험이다. 이것은 숭고한 것과 픽처레스크란 것에 관한 건축적 관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계발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플린스(조각상, 기념비 등의 받침대) 위에 자신의 건축물을 세우고 있었다. 그 기법은 객체-성질 긴장 관계들의 사중체 다이어그램의 일부로서 이해될 때 의미를 획득한다.
수평적 긴장은 감각적 객체와 그것의 감각적 성질들 사이에서 전개된다. 감각적 객체는 그것이 외부 세계에 실재적 상관물을 지니고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내가 경험하고 있을 무언가이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감각적 객체이며, 가장 비참한 환각 역시 감각적 객체이다. 그런 객체들은 우리의 감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성과 실제적 처리도 접근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성질들의 얇은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체주의 회화는 바로 이런 긴장 내에서 작동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표면 평면의 배후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서 그 평면을 애초에 통합하기 어려운 수많은 외형으로 가득 채울 따름이다. 후설주의적 형상학 역시 여기에 자리하게 된다. 인간의 접근으로부터 물러서 있는 사물들-자체의 현존을 부정하고 경험 속에 주어지는 객체들과 그것들의 수많은 변화무쌍한 성질들 사이의 긴장 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권장하는 햇빛 아래 볼륨들의 연출이 여기에 부합하듯이 비대칭 적으로 배열된 반수 셀들로 구성된 웃손의 드라마 역시 여기에 부합한다. mark foster gage의 desert resort도 마찬가지이다. 이중적으로 감각적인 수평적 긴장관계에서 비롯되는 OOO미학은 어떤 물러섬도 필요 없는 어떤 주어진 건축적 상황에 적실하게 된다.
내가 해석하기로는 서열hierarchy없는 구성을 뜻하는 듯한다. 미학적 사유들로 물러섬의 차원이 생략되는 케이스 들도 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셀들이 더 불길하게 표현되었다면 그 여운은 대단히 약화되었을 것이다. 픽처레스크 한 르 코르뷔지에는 더는 르 코르뷔지에가 아닐 것이며(?),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에는 “금방이면 무너져 내릴 듯한 바위들, 어두운 동굴들, 그리고 사방의 산들에서 쏟아져 내리는 맹렬한 폭포들”을 추가함으로써 그 정원을 망칠 수 있을 것이다.
형상적 긴장은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적 객체와 그것의 감춰진 실재적 성질들 사이의 긴장을 가리킨다. 후설은 어느 사과의 바뀌는 다양한 감각적 특성들을 순차적으로 제거한 후에 그것들을 제거하면 그 사과가 더는 그런 것이 아니게 되는 어떤 궁극적인 면모들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이 긴장을 발견했다. 건축적 객체가 어떤 고유한 불가사의도 없이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한편으로 그것의 특성들(구조적이든 기능적이든)은 부분적으로 어둠 속에 감춰져 있는 경우이다. 수직적 긴장에서는 미학적 감상자가 사라진 객체를 대신하여 그것의 버려진 성질들을 수행한다면, 형상적 긴장에서는 객체가 우리와 함께 바로 그곳에 있지만 우리의 구상력이 부득불 다양한 실재적 성질을 그것에 귀속시켜야 한다. OMA의 Villa dall’ava는 어떤 것들이 진정한 구조적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지 명료하지 않은 채로 기둥 같은 존재자들의 장이 방을 떠받치고 있다.
인과적 긴장은 미학이 직접 진입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접근할 수 없는 실재적 객체와 실재적 성질 사이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지적 노력으로 그 객체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접근 가능한 것들을 가리킨다. 어느 객체의 성질들 혹은 관계들이 불가해하게 만들어져 우리의 인지적 노력으로 그 객체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사이먼 웨어는 코린트식 주두에 관한 객체지향적 성찰에서 그런 방식을 찾아내고자 했다. 불가사의한 성질들을 갖춘 불가사의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직적 긴장이 가변적인 윤곽을 갖춘 불가사의한 것들이라면, 불가사의한 성질들을 갖춘 불가사의하지 않은 것들(형상적 긴장), 불가사의하지 않은 성질들을 갖추고서 불사사의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불가사의하지 않은 것들(수평적 긴장), 그리고 "불가사의한 성질들을 갖춘 불가사의한 것들"(인과적 긴장)도 OOO가 반직서주의적으로 지향하는 것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내용을 밀어내는 형태
직서주의랑 객체를 오로지 성질들의 다발로 오인하는 과정이다. 직서주의는 객체의 '물러서 있는' 실재뿐만 아니라 객체 자체와 그것의 고유한 면모들 사이의 느슨한 관계도 여전히 빠뜨리고 있다. 인간 사유가 주목하는 대상이 배경으로부터 고립된 내용뿐일 때 직서주의가 나타난다. 모든 직서적인 것은 저급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현존의 본성에 대한 존재론의 평가에서 설계를 위한 규범적 지침으로 이행하는 데에는 더 많은 단계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Norwood, “Metaphors for Nothing,” 115
킵니스가 건축적 맥락에서 서술하는 대로 그것은 “프로젝트가 (그것에 미치는) 영향들에 대한 반응들을 구체화하는 데 성공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여타의 우연적 효과에” 달려 있다. 데란다는, 정말로 새로운 무언가는 종종 자신의 부분들에 소급적 영향을 미친다는 추가적 기준을 제시한다. 크 코르뷔지에의 빌라 스타인은 팔라디오의 빌라 로톤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소급해서 바꾼다.
1990년에 이루어진 데리다와 아이젠만의 서신 교환에서 데리다는 아이젠만이 자신을 너무 직서적으로 해석한다는 비난을 제기한다. “부재에 대한 이런 언급은… 당신의 건축 담론에서 저를 가장 괴롭힌… 것 중 하나입니다. … 부재 혹은 ‘부재의 현전’에 관한 이런 담론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많은 책략, 복잡한 장치 그리고 덫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이 코라chora의 개념을 제가 기대한 만큼 급진적으로 탈-신학화하고 탈-존재론화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 코라는, 당신이 가끔 시사하는 대로, 텅 빈 공간(void)도 아니고 부재도 아님 비가시성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젠만은 "당신이 언어에서 수행하는 것을 건축에서 달성할 가망은 없습니다"라고 반박한다. 건축도 기호, 기표 그리고 현전의 상호작용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지만 "동시에 방이 어두워지지 않게 하고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고 밝힌다.
그럼에도 차용의 직서적 상황은 상쇄하면서 영향을 차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53) 영향을 탈직서화할 수 있는 전략은 다양한데, 그것들은 모두 원래 내용과의 상이한 간접 방식을 포함한다. 이처럼 방법이 풍부함을 참작하면, 철학자들의 영향이 너무나 직서적인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철학자들을 건축 담론에서 배제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4장 | 건축의 미학적 중심성
예술과 감상자
메이야수는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인간 사유를 빼냄으로써 실재 자체에 접근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라투르는 우리가 인간이 모든 실재의 한 구성요소임을 보여줌으로써 실재에 접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라투르는 모든 “사실의 문제”를 그가 “관심의 문제”라고 일컫는 것으로 전환한다.
건축물은 그 창작자들과 사용자들로부터 단절된 하나의 독립적인 객체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과거에서 생겨났고 미래의 다양한 뜻밖의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와 연관되기 마련인 하나의 ‘프로젝트’이다.
칸트는 그것이 제공하는 쾌적한 감각이나 혹은 그것에서 추출된 개념적 의미로 인해 아름답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아름답게 여겨져야 한다는 점에서 미학적 형식주의의 대부이다. 단테의 경우에는 각 생명체의 사랑은 그것을 관찰하거나 판단하는 사람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복합 객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은 주관적임이 분명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사랑은 연인들 자신과 외부 관찰자들이 대처해야 하는 세계의 새로운 사실이다.
물이 수소와 산소 두 원소 사이의 관계를 포함한다는 사실은 물이 여타의 모든 것과도 관계 맺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에 관한 어떤 이해도, 물을 사용하는 어떤 행위도, 심지어 물과 이루어지는 맹목적인 인과적 상호작용도 물의 실재를 결코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물은 수소와 산소 사이의 내부 관계에 의해서도 해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 성분을 넘어서기 때문인데, 그중 가장 명백한 것은 물의 성분들은 모두 불을 부채질할 수 있지만 물은 불을 끈다는 사실이다.
모든 존재자는 복합 객체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모든 것은 한낱 다른 것들과 맺은 일단의 관계에 불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모든 복합 객체는 완전히 위로 혹은 아래로 환원될 수 없다. 객체는 이들 두 가지 형식에 저항하는 제3의 항이다. 이런 까닭에 객체에 더 능숙하게 접근하려면 지식 이외의 인지적 방법들이 필요하며, 소크라테스식 필로소피아는 물론이고 그중 많은 것을 이미 예술에서 익히 찾아볼 수 있다.
예술의 세포적 구조
근대적 지형도에는 실재의 꼭대기에 주체가 있고, 실재의 바닥에 객체가 있다. 어떤 종류의 철학에서는 객체가 우리의 명시적인 지각 혹은 관계보다 더 깊은 심층에 자리하는 무언가로 여겨진다. 그 무언가가 칸트의 불가해한 물자체든, 메이야수의 수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물자체든, 하이데거의 물러서 있는 도구-체계든, 혹은 심지어 소크라테스 이전의 무정형의 아페이론이든 간에 말이다.
한편으로, 버클리의 기저 질료 없는 관념, 헤겔의 본체계의 부정성의 운동으로의 붕괴, 후설의 내재적 현상 그리고 라투르의 감춰진 잔류물 없는 행위자에서 볼 수 있듯이, 감춰진 무언가의 현존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또 다른 종류의 철학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실재론도, 유물론도 여전히 일종의 존재분류학이다.
우리는 비극에서 타인의 사랑을 향해 두려움을 느끼거나, 혹은 희극에서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비웃는다. 심지어 우리는 본인 특유의 ‘아이러니한’ 관심의 대상을 조롱하거나 꾸짖는 사람의 냉소주의에 마음이 빼앗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아이러니는 직설적인 연민, 비웃음 혹은 증오와 종류가 다르지 않은 개인적 판본의 성실성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 관심 대상을 ‘초월’하듯이 보일 것이지만, 우리는 사실 그 객체를 전혀 초월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느 객체에 대한 우리의 지향적 관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객체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일은 타인이 우리가 객체와 맺은 관계에 관해 숙고할 때 발생하고, 게다가 우리가 스스로 이런 관계에 관해 숙고할 때 이미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주체가 우주의 꼭대기에 있기는커녕 영원한 중간층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일련의 후속 객체가 무한정 위로 그리고 아래로 공히 펼쳐진다. 이것은 주체가 자신이 속하는 어떤 더 광범위한 객체의 내부에서 언제나 발견될 수 있음을 뜻하고, 따라서 주체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성 혹은 부정성의 어떤 독특한 지점이 아님을 뜻한다.
근대 철학의 꼭대기에 사유를, 바닥에 세계를 두는 사상 대신에 우리는 이제 세포 모델을 도입한다. 세포 아래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음이 대단히 명확하지만, 실재의 어떤 궁극적인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향적 경험을 넘어서는 존재자들 역시 그 자체로 각각 자신의 고유한 내부를 갖춘 복합체이며, 그리하여 어떤 최종적인 근저의 층을 예상할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도 없다. 사유 역시 하나의 객체이다. 층들은 아래로는 무한정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총괄적인 어떤 객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재는 아래로는 무한정 뻗지만 위로는 이동하는 들쑥날쑥한 지붕선의 어딘가에서 멈춘다.
라이프니츠의 창 없는 모나드를 원형으로 삼는 이와 같은 실재의 세포적 모형에는 우리가 각각 매체와 매개자로 명명할 수 있는 두 가지 종류의 매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모든 상황에 의해 제공되는 배경 매체가 있으며, 여기서 우리는 대체로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조작한다. 둘째, 모든 상황에서 또한 우리는 우리가 현행 상황 너머의 상황들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이상의 매개자를 찾아낸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유사한 사진 이론을 제시한다. 어떤 주어진 사진의 매체는 일반적인 색조와 분위기를 정립하는 한편으로 어느 단일한 요소는 감상자의 주의를 포획하여 경험을 견인한다. 건축에도 이런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이원론이 존재한다. 건축물의 파사드 혹은 외부 표면과 내부 공간 사이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직서주의의 근본 문제
라이프니츠의 실재가 폐쇄되고 단절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들 세포가 서로 연계를 형성하게 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여기서 미학의 근본적인 역할이 대두한다.
근대 철학의 수많은 결점에는 직서주의에의 과도한 헌신이 있다. 직서주의적 입장은, 세계가 인간의 접근 너머에 현존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객체들에 성질을 적절히 귀속시킴으로써 세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실상 객체에 관해 다소 정확한 직서적 명제들을 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며, 우리는 모두 정기적으로 이런 작업을 수행한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일컫는 것이 이것이며, 근대성은 지식에 대한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 일세를 풍미하는 한편으로 예술과 인문학은 연성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처럼 정밀해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분석적 갈래의 철학은 자체 정당성의 주장 전체의 근거를 과학문화의 모방에 둔다.
칸트에게서 우리는 추정컨대 우리 행위가 생명 없는 물질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인과 법칙들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가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와 관련하여 칸트가 시도한 최선의 노력은 개념적 언어로 환언될 수 없는 미적 인지를 언급하는 세 번째 비판서에서 제시된 ‘취미’에 관한 그의 구상이었음이 확실하다.
합리론은 무엇보다도 직서주의적 기획이고, 따라서 이것은 정확한 명제적 내용에 헌신하는 과업을 뜻한다. 그러나 모든 명시적 내용의 배후에 자리하는 것에 주의를 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산소라고 일컬어지는 객체는 원리상 완전히 식별될 수 있는 “성질들의 다발”(흄)로 여겨지는데, 비록 아직은 어떤 시점에서도 그 다발이 완전히 결정된 적이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다발들은 앞으로도 완전히 파악되지 못할 것이다.
철학에의 비직서적 접근법은 우리가 세계를 사실 확인적 방식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수행적 방식으로 ‘세계를 산출한다’는 것을 수반한다. 우리는 지구를 그 땅덩어리들의 크기와 모양을 왜곡하지 않은 채로 이차원 지도로 평면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론을 위해 미학을 우주에서 제거할 수 없다.
칸트의 경우에 예술의 비개념적 특질이 언급될 때마다 논의는 재빨리 ‘숭고한 것’으로 전환되는데, 칸트가 숭고한 것으로 뜻하는 바는 인간 규모에 대비하여 절대적으로 크거나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주의적 아름다움은 애당초 어떤 식으로도 환언될 수 없다. 무엇이 한 특정한 장미를 아름답게 만드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오직 취미를 통해서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객체는 여타의 모든 것과 단절되어 있는데, 예컨대 모든 관심과 쾌적함으로부터,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의 사회정치적 및 전기적 맥락 전체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형식주의자가 된다. 칸트는 '숭고한 것'으로 예술이 비직서적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한 예술 작품은 몇몇 사물과 관계를 맺지만 그 밖의 다른 사물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으며, 그리고 이들 특정한 사물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은 그것들을 자신의 세포 속으로 가져오는 한편으로 나머지 것들은 외부에 남겨 둔다. 관계는 작업이 필요하고, 대다수 가능한 관계는 절대 맺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까닭에 문학 작품에 대한 많은 혹은 대다수 해석이 크게 실패하며, 그리고 모든 작품이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혹은 그 밖의 모든 해석학파에 의해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환경과 단절된 아름다운 객체는 칸트가 순수한 아름다움이라고 일컫는 것을 획득한다.
그러나 어떤 시각 예술이나 언제나 감상자가 객체에 극적으로 몰입되는 어떤 연극적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한 예술 작품이 자신의 객체 극을 저 너머 접근할 수 없는 실재적인 것으로 내쫓음으로써 감상자를 그 작품의 남겨진 감각적 성질들을 연기하는 실재적 객체로 전환한다면, 우리는 건축이 단지 더 복잡한 수단으로 이런 작업을 수행할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칸트가 아름다움을 “목적 없는 합목저성”이라고 언급했을 때 그의 의도는 다른 것들(인체, 말)과 함께 건축을 배제하려는 것이지만, 칸트는 건축이 이미 목적과 관련되어 있기보다는 오히려 합목적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논점들
● 자율성과 형식주의는 불가피한 개념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소통한다”라는 난잡한 전체론으로 빠져들어서 어떤 실재하지 않는 시대정신의 소통 능력에 관한 부적절한 결론으로 도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자율성과 형식주의는 모든 것이 완전히 자족적임을 뜻하지는 않으며, 단지 모든 연계가 작업을 필요로 하고 대가를 요구함을 뜻할 뿐이다.
● 모든 판본의 형식주의는 어떤 관계들은 배제하는 한편으로 어떤 관계들은 허용한다. 칸트의 고유한 판본은 너무나 협소하게 감상자와 예술 작품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방지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다.
● 칸트의 가정과는 반대로, 후기 저작에서 프리드가 스스로 깨닫게 된 대로, 감상자와 예술 작품 사이의 관계는 모든 예술의 근간이다. 그렇지만 예술 작품은 여전히 자율적이다. 왜냐하면 연계를 구축하기 위한 추가 작업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감상자와 작품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여타의 모든 것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 시각 예술 작품은 자체의 핵심에 자리하는 관계적 구조로 인해 이미 ‘불순’하기에 칸트주의적 틀에서 건축의 불순한 지위와 관련하여 그 자격을 박탈할 것이 전혀 없다. 건축의 부가적인 관계적 요소들은 그것을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약간 더 이국적으로 보이게 만들지만, 이것은 결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변적 기회이다.
● 시각 예술 작품은 이미 그 밖의 모든 관계와 단절된 한 가지 중추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건축은 시각 예술과 달리 이런 관계와 비관계의 결투를 정면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다.
● 직서주의는 객체와 그것이 인식되게 하는 성질들의 다발 사이의 어떤 차이도 보지 못한다. 모든 지식은 직서적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객체를 아래로 그 조각들의 성질들로 환원하거나 혹은 위로 그 효과들의 성질들로 환원함으로써 객체를 그 자체로 마주칠 어떤 방법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뒤샹은 어떤 직서적 객체를 예술의 맥락에 처하게 할 수 있음이 확실하지만, 그렇게 할 때 그는 이미 그 객체를 탈직서화했다. 직서적인 것과 미적인 것은 대립적이다. 한 사물은 성질들의 다발로서 나타나거나 아니면 객체와 성질들 사이의 균열로서 나타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런 차이는 해체될 수 없고, 따라서 데리다가 직서적 언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뭔 뜻인지 잘 모르겠다).
● 모든 경험과 마찬가지로 미적 경험도 세포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아래에는 직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접적으로 언급되어야 하는 불가해한 실재가 있다. 구 위에는 그것이 진입하는 더 광범위하고 더 복잡한 실재가 있다. 실재는 양쪽에서 그 세포에 침범한다. 미적 경험과 세포 안에서 감각적 객체는 자신의 통일된 객체성과 복수의 면모들 사이에서 찢어진다. 어떤 경험을 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감상자가 미적 객체에 물러서 있는 단일성을 대체하면서 그것의 성질들을 함께 모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건축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은 연극적이다.
5장 | 건축적 세포
1800년대는 ‘역사주의의 세기’였다. 헤겔과 더불어 철학은 역사를 순차적으로 폐기된 일련의 논리적 실수라기보다는 오히려 진리에의 변증법적 접근법들의 계열로 간주함으로써 내부화했다. 역사 연구 자체는 무엇보다도 빌헬름딜타이의 통찰력 있는 작업으로 거대한 도약을 이루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과 더불어 인간과 여타의 모든 종은 불변의 원형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단히 역사적인 것들이 되었다. 그전에 찰스 라이엘의 선구적인 연구에서는 현재 지구의 외관상 안전한 면모들이 힘들의 진행 중인 작용의 일시적 결과인 것으로 밝혀졌고, 그리하여 지질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탄생했다. 하인리히 슐리만의 고대 트로이 유적지 발굴 작업이라는 가장 유명한 사례와 더불어 고고학 역시 19세기말 무렵에 현대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건축에서는 역사적 양식들의 부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역사주의 합리론에 의해 견인되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다. 모더니즘은 화려한 장식의 아르누보와 유겐트슈틸 경행에 대한 부정적인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재기될 수 있다.
기능주의는 오히려 기능을 형태의 근거로 간주한다. 형태와 기능은 건축물의 목적 이외의 모든 고려를 배제함으로써 새로운 연합 순수성을 획득한다.
역사주의 양식과 루이스 설리반, 그리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지나 우리는 모더니즘 건축을 이끈 거장 르 코르뷔지에에게 도달할 수 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라는 기능주의적 표어로 대중에게 알려진 르 코르뷔지에는 예상보다 더한 칸트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외관상 도면을 주요 생성자로 사용함에도 생각보다 기능주의적 정신이 약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르코르뷔지에의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를 살펴본 뒤 아이젠만에 의해 시도된 기능주의에서 형식주의로의 전환을 살펴보며 건축과 시각 예술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물음을 마무리하는 진술을 개진할 수 있다.
기능주의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라며 근대의 기술과 엔지니어들을 찬양한다. 그렇지만 그는 기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건설의 목적은 사물을 결합시키는 것이고, 건축의 목적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한 사물이 어떤 필요에 대응할 때 그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한 부분, 그것이 없다면 더 풍요로운 만족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기본적인 부분을 충족시킬 따름이다. 사건들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자. ... 건축은 어떤 시적 정서가 존재할 때에만 현존할 뿐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판단력 비판>에서 직접 비롯되었을 한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고도로 세련된 나라에서 예술은 순수예술, 즉 모든 공리주의적 동기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결연한 것 - 회화, 문학, 음악 - 에서 자신의 표현 수단을 찾아낸다.”
즉, 한낱 공학의 편의성에 불과한 것을 넘어서는 간결한 조치가 있을 때 건축이 아름다운 것으로서 예술이 된다고 한다. “예술은 간결한 것이”고 “인간이 목적의 고귀함 속에서 예술에 우유적인 모든 것을 완전히 희생한 채로 정신의 더 높은 층위들에 이르렀을 때” 예술이 성립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은 “숭고한 것이 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로우는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스타인에 대해 “팔라디오의 볼륨들이 나타내는 반박 불가능한 명료함”을 제공하기 않고 “계획된 일종의 모호성”이라고 한다. 그는 반직관적 해석의 문턱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픽처레스크한 것의 건축가로 간주한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별개로 고려되는 셸은 특별히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반면에 그것들이 명백하지 않은 방식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배치는 모양의 단순성과 쉽게 규칙으로 형식화될 수 없게 하는 매혹적인 구조를 조합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아름다움에 호소함으로써 기능적 공학에 대항하지만, 그의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은 전혀 아니다. 우리의 눈은 웃손의 시드니 셀들의 모양들에는 재빨리 숙달하지만 그것들의 배열에는 결코 그렇게 숙달할 수 없다. 우리를 미지의 것으로 유혹하는 수직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알려진 요소들의 당혹스러운 배열들로 우리를 매혹하는 수평적 아름다룸도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후자의 종류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사람이며, 게다가 그는 영국식 정원사와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형식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능주의적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이질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중도적 아이젠만은 기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단지 기능이 형식적으로 강조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부정할 뿐이다.”오늘날에도 집은 여전히 쉴 곳을 제공하지만 자신의 쉼터 제공 기능을 낭만화하거나 상징화할 필요는 없다.
하이데거의 경우에 현전의 결함을 파악하는 최선의 방법은 어느 주어진 상황에서 명시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물러서 있거나 부재하는 것을 고찰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한낱 ‘눈-앞에-있는 것’에 불과하고, 따라서 이것은 결코 완전히 밝혀질 수는 없는 방대한 배경을 은폐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산문 진술은 어느 특정한 순간의 역사적 상황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의식적인 배경 가정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경우에 무엇이든 현전하는 것의 배후에는 감춰진 실재가 있으며, 그리고 이 실재는 영원히 부분적으로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확정적인 특정한 특질이 있다.
데리다적 판본의 존재신학은 하이데거적 판본보다 더 급진적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설득력이 더 약하다. 즉, 데리다는 현전이 감춰진 무언가에 의해, 혹은 자기동일적인 무언가에 의해 하여간 약화된다는 점을 부정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실재는 표면을 따라 전개되는 기호들의 종잡을 수 없는 연출이다. 아무것도 자신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어느 특정한 맥락에서 결코 포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애초에 자신과 동일하지도 않다. 모든 것은 다수의 것이다. 모든 장소는 다수의 장소다. 사실상 동일성을 가리키는 데리다의 비꼬는 용어는 ‘자기-현전’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동일서의 가정, A=A라는 가정, 이 개는 오직 이 개일뿐이라는 주장의 가정은 우리를 현전의 형시상학으로 곧장 도로 이끈다. 동일성을 자기-현전과 동일시할 근거가 전혀 없다.
“존재는 오직 로고스(말/이성)를 통해서만 역사로서 산출되며, 그리고 역사의 외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하이데거의 집요함,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 -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기표의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결국 기의와 기표 사이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한다."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하이데거의 경우에 존재는 존재의 역사에서 나타난 그것의 다양한 배치 이상의 것임이 대단히 명백하며, 그리고 하이데거는 기의와 기표 사이의 차이를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건축을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는 아이젠만의 구상(동일성에 대한 데리다주의적 공격에 근거를 둔 구상)이 나쁜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객체는 다름 아니라 어떤 텍스트에도, 어떤 관계 집합에도 절대 통합되지 않는 잉여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더니즘은 객체가 자신의 고유한 객체성에 관해 ‘스스로 변호할’ 수 있도록 ‘인간을 대변하는’ 역할에서 풀려날 수 있게 만들었다.” 자기-준거성은 모더니티의 열쇠로, 고전적 미메시스 혹은 모방의 종말을 나타낸다.
건축적 기호들을 건축물 내부에 기입하기의 중요성은 “객체성과 달리 기호화와 기능은 조작될 수 있다… 반면에 객체성, 즉 존재자의 물리적 현전의 특성들은 환원 불가능하다.”
한 예술 작품을 어떤 개념의 결과 혹은 주제로 간주하는 것은 예술을 하나의 미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언 가능한 직서적 경험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성을 인간의 여타 형태의 처신과 종류가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한편으로 객체 자신은 모든 그런 처신과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후설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예술과 건축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건축의 관념은 객체 현전의 관념을 요구하는 반면에 예술의 관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건축이 어떤 개념에 부합하는 건축물을 설계할 수 있는 잠재력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개념인 건축물을 설계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갖추고 있다. 뒤샹의 변기가 아이젠만의 개념적 리트머스 시험을 틀림없이 통과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변기는 자신의 ‘개념적’ 측면을 변기 자체에 개념적으로 기입된 무언가로부터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이 충격적이게도 놓여 있는 미술관 맥락으로부터 획득할 뿐이기 때문이다. 세어진 건축물에는 어떤 뒤샹효과도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건축물이 자신의 고유한 맥락을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건축이 언제나 “벽, 욕실, 문, 변장, 천장 같은 기능적으로 또 의미론적으로 가중된 객체들에 관한 관념들”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둥들이 이루는 선들, 벽들이 이루는 평면들이 언제나 중력의 사실로 인해 무언가를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수반하며, “바닥면은 지붕면과 언제나 의미론적으로 다를 것이고, 진입면은 외부와 내부의 차이를 인식한다.
르 코르비지에가 유명한 객체들(기계, 선박 그리고 항공기)의 형태들을 기본적으로 취하여 어떤 새로운 맥락에서 나타나는 외양을 통해서 의미 변화가 억지로 생겨나도록 했던 수법으로 보았을 때 르 코르뷔지에에게는 통상적인 피카소의 양태와 나란히 뒤샹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이젠만은 현상학을 경시함에도 불구하고 건축이 감각적인 것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개념적인 것에 도달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고 있다.
아이젠만은 우리에게 진정한 수법이란 “개념적 (심층) 구조의 보편자들이 어떤 장치에 의해 표면 구조로 전환됨으로써 의미를 수용할 수 있게”하는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건축물에 대한 경험은 일련의 기억으로부터 직조되며, 그리고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이 확실하게 예증한”대로 기억은 비교적 단순한 형태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면 덜 부답스럽다. 그런데 이런 전면적인 경험은 “개념적이고, 개념의 명료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의 주장은 시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
건축은 미학적 명령도 받으면서 작업하는 실천 활동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명령을 가리키기에 아주 좋은 유서 깊은 낱말, 즉 아름다움 - 오늘날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건축에서도 거의 듣지 못하는 용어 - 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움의 통상적인 반대말은 추함이라고 여겨지지만, 둘 다 각각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낸다는 점에서만 상이한 미적 현상이다. 아름다운 것(게다가 추한 것)의 진정한 대립물은 직서적인 것이며, 그리고 어느 객체가 ‘성질들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직서적인 것이 생겨난다. 대다수 건축물은 적극적으로 추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게 직서적이다. 순수한 기능주의를 좇는다면, 그것은 시각적 성질들과 실용적 성질들의 총합과 구별 불가능한 직서적인 건물만을 생성할 뿐일 것이다.
‘기능주의’라는 용어는 실체적 형상들 사이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 건축물의 순전한 직서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임의적 장식에, 혹은 역사에의 외부적 준거 외에는 아무 근거도 없는 형태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직서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언제나 객체 자체와 그 성질들 사이에 어떤 분열을 창출하여 그것들 사이의 결합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적 경험이다. 미적 경험의 성질들이 언제나 어느 감상자와 맺은 관계 속에 현존하는 한에서 이것은 미적 경험 역시 사물 자체와 그것이 감상자 및 그 밖의 것들과 맺은 관계들 사이의 분열로 해석될 수 있음을 뜻한다.
칸트는 기능을 그것에서 모든 자율성을 박탈하는 외향적 준거를 이유로 삼아서 순수한 아름다움의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것을 떠올리자. 그리하여 칸트는 건축에 예술 가운데 비교적 낮은 지위를 할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설리번의 표어는 최근 시대의 가장 강력한 미학적 의견 표명자인 칸트와의 타협의 일종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았다. 르 코르뷔지에의 경우에 마치 기능주의적인 것처럼 들리는 교량과 엔지니어에 대한 그의 찬양은 주로 퇴폐적 역사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용도를 지니고 있다. 꽤 공공연히 표현된 르 코르뷔지에의 진정한 관심사는 아름다움 및 예술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권고안은 단순한 부분들의 흥미로운 조합들을 통해서 성취하라는 것이고, 그리하여 형태는 또다시 표면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런 표면의 문제는 기능과 아무 관계도 없다. 기능을 부각될 필요가 없는 건축의 인과적 전제조건에 부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중도적 아이젠만’의 의미에서든 혹은 의도적으로 기능을 전복시키는 ‘강경한 아이젠만’의 의미에서든 간에 아이젠만의 입장은 공공연히 형식주의적이다. 또한 우리는 아이젠만이 형태/기능 변증법을 형태의 주 가지 가능한 것(단순한 것의 변형과 복잡한 것의 축약) 사이의 변증법으로 대체하고 싶어 함을 알았다(p284-286). 아이젠만은 사실상 건축이 기능적이지 않고, 따라서 건축이 미학적으로 수용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진술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칸트에게 대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율적인 기능
칸트의 선험적인 종합적 판단은 그것이 세계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간 경험의 조건에 관한 것인 한에서 가능하다. 이것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우리의 순수 직관들과 열두 가지의 오성 범주를 포함하며, 실재의 그런 시본 양태들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부각한다.
건축에서의 유사한 교착상태는 형태 대 기능 그리고 관계적 대 비관계적이라는 것이다.
형태는 시각적 모습 보다 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형태는 본질적으로 비관계적이다. 그러나 기능은 필연적으로 관계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비관계적 기능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점을 파해쳐 볼 필요가 있다.
- 건축의 기능적 측면이 유지되기보다는 오히려 박탈당한다면 건축과 조각을 구분하기 위한 근거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 기능이 자율화되지 않거나 혹은 제로화되지 않는다면 건축은 미학적 영역에 진입할 수 없고, 따라서 임의적인 미학적 형태들로 장식된 프로그램적 옷걸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물음을 “비직서적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가?”로 다시 진술할 수 있다. 칸트의 경우에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비직서적이면서 비관계적인 경험의 교과서적 실례이다. 아름다운 것은 모든 특정한 특징과의 필요 관계에서 벗어나고,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성질들과 느슨한 관계에 있는 객체이다. 칸트주의 전통에 따르면 가장 회피해야 하는 관계는 예술 객체와 인간 감상자 사이의 관계이다. 왜냐면 이 관계가 직서주의의 바로 그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어느 객체 혹은 감상자가 고립되어 홀로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미적 경험도 생겨날 수 없다.
우리는 ‘비유’라는 하나의 새로운 객체의 형태로 감상자가 부재하는 객체를 대신하여 그것의 성질들과 하나의 연합체를 형성하게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포도주 빛 짙은 바다”가 그런 경우이다.
하나의 아치로 쌓은 천 개의 벽돌은 창고에 쌓여 있는 그 벽돌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객체 사이의 관계는 탈-관계화되거나 비직서화될 수 있다. 감상자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실체화하여 이 관계를 하나의 새로운 객체의 내부로 가져옴으로써 미학적 형태가 제로화될 수 있다.
시계 시간은 시각 예술과 건축 사이의 실제적 차이가 드러나는 곳이다. 왜냐하면 모든 회화는 건축물의 경우에는 그럴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적인 ‘현재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경우에는 그것의 외부와 내부를 공히 돌아다닌 최초의 산책에서 느낀 모든 경험을 한데 묶는 기억의 작업이 필요하다.
달력 시간에서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하나의 기념물이다. 그러나 시계 시간의 견지에서 그 건축물 내부의 복잡성은 외부의 복잡성에 미치지 못한다. 그 건축물의 내부 공간은 복잡성이 부족하기에 재빨리 탐사되고, 따라서 방문객들이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모든 주어진 경험 순간은 오직 회상 속에서 내가 그것을 나의 성찰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약한 의미에서의 객체일 뿐이다. 건축은 일련의 풍성한 가변적 경험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고, 시간적 복잡성은 건축을 위한 소중한 자원이다.
기능을 억제하거나 철저히 전복하는 아이젠만의 방식으로는 건축 기능의 미학화에 한계가 있다. 기능을 제로화하는 방법은 기능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능을 제로화하는 방법은 객체를 기념물화 하는 방법이다.(311)
헤체주의 이후
킵니스는 해체주의 이후의 두 가지 경향을 아이젠만과 게리가 이끄는 “새로운 공간들을 생성하는 데 있어서 미학적 형태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따라서 시각적인 것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디-포메이션”경향과 콜하스와 추미가 이끄는 “새로운 제도적 형태를 지지라고, 따라서 프로그램과 사건을 지지함으로써 미학적 형태의 역할을 경시”하는 “인포메이션”경향으로 나눈다.
킵니스는 콜하스가 건축이라는 분과학문을 소멸시킬만한 작품들들 제시한다고 한다. ”미학적 성질이 아니라 최대 가동 상태에서 시간에 따른 선능을 근본적인 척도로 삼는 … 도시 하부구조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콜하스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마크 앨런 휴이트는 콜하스의 CCTV타워를 언급하며 “유사-기능주의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엔지니어들이 믿기 어렵다고 깨달을 표현으로 자신의 공허한 형식적 실험들을 정당화한다”라고 비난하며 킵니스의 반형식주의적 해석과는 거리가 먼 비평을 제시한다. 그러나 킵니스는 콜하스의 작품이 “소비문화의 중독에 … 거의 저항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콜하스의 웨일즈 카디프의 세워지지 않은 오페라하우스의 형태잡기의 어색함을 포함한 모든 콜하스 작품의 ‘추함’은 즉시 기억에 새겨진다. 기억으로부터 묘사하기 쉬운 모든 건축 작품은 이미 최고의 형태시험을 통과했음이 확실하다.
하먼이 생각하기에 콜하스는 프로그램주의자나 형식주의자라기 보다는 제로-기능주의의 전조에 가깝다.
킵니스의 정원 원리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건축을 판단할 때 건축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최선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정원원리는 형식주의의 본보기이고, 하부구조적 신조는 프로그램주의와 짝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프로그램이라는 건축적 개념은 전적으로 정원 원리와 관련이 있다. 활동을 효율성과 기능적 특정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용도를 한정하고 사람들이 재빨리 자신의 목적지를 오가게 함으로써 일탈을 줄이게 된다.”
“콜하스는 외과 의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잔학한 일을 즐기는 사람처럼 기획설계를 칼로 찔러서 그것의 지방을, 심지어 그것의 살도 신경이 드러날 때까지 마구 잘라낸다.”
콜하스는 ‘자유’, 즉 ‘금진적 감산’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에 헌신하는 건축가이다.
프로그램의 급진적 감산이 작동하는 이유는 급진적 감산 자체가 본질적으로 좋기 때문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본래적으로 관계들의 과잉을 겪기 때문이다. 달리 진술하면 기능은 추상화하기에 놀랍도록 알맞은 영역이다.
반대로, 형태의 초기 조건은 오히려 제로화된 비관계주의 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급진적 생산’의 임무, 즉 처음에 개별적이었던 사물들을 융합하는 임무를 띠는 것이다.
제로-기능이 탈맥락화한다면 제로-형태는 새로운 맥락을 생산하는 임무를 우선적으로 부여받는다. 이런 까닭에 형태와 기능은 어떤 중립적인 기존의 매체로 용해될 수 없다. 애초에 정반대의 부담에 직면하게 되는 형태와 기능은 정반대의 엇갈린 목적으로 작동한다.
결론
● 형식주의는 참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관계들의 정교하게 변화되는 구배 혹은 그물망이 아니라 소통이 전제되기보다는 오히려 구축되거나 이루어져야 하는 자족적 체계들의 집합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 칸트주의적 형식주의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유형들의 사물들 - 감상자든 관찰자든 점유자든 거주자든 기능이든 사회든 정치든 간에 - 을 미학적 체계 혹은 그 밖의 다른 체계들에서 배제할 선험적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칸트주의적 형식주의가 거짓이기에 건축에 대한 칸트의 미학적 의구심은 부당하다. 기능이 탈-관계화되는 한에서, 즉 기능이 비직서화되는 한에서 기능을 미학에서 배제할 좋은 이유는 전혀 없다.
● 우리는 직서적인 것과 미적인 것 사이의 절대적 간극을 고집한다. 우리가 그 둘 중 어느 것을 다루고 있는지 결정하는 데는 맥락이 필요할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결코 직접 현전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데리다주의적 이유로 인해 직서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현전에 대한 데리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그것은 직서주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서주의는 객체가 한낱 성질들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흄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 OOO의 요점은 객체-성질 관계가 필연적으로 느슨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느슨함이 다양한 미학적 기법에 의해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건축물은 기능적 필요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고, 주어진 현행의 최신식 기술로 건설될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종종 예견된 정치적 효과와 뜻밖의 정치적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한낱 건축의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건축이 미학을 극구 부정할 때 그것은 공학이 되거나 어떤 다른 분과학문이 된다.
● 건축의 미학적 측면은 형태적 혁신을 기능적 직서주의와 조합하기로 선택할 수 있거나 혹은 형태적 직서주의를 기능적 혁신과 조합하기로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형태와 기능 둘다를 비직서 화할 수 있는 독특한 역량(시각 예술과 무관한 역향)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이런 장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제로화’라는 용어는 그런 비직서화를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다.
● 다양한 제로화 기법은 건축가들 자신에 의해 발굴되어야 하고 추구되어야 한다. 어떤 철학자도 감히 그 기법들을 제정할 수 없고, 또한 사실상 어떤 철학자도 이것을 시도하지 않는다.
● 기능은 사전에 구성된 요소들의 단일체로 이루어져 있기에 기능의 제로화는 애초에 그런 단일체응 분해하는 경로를 따를 것인데,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을 그 철학적 모형으로 삼을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현존하는 해체주의적 기법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필시 기능의 급진적인 박탈 혹은 유연화를 수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식은 기능이, 모든 현행의 용도와 가능한 용도로부터 분리된다는 로시적 의미에서 ‘기념물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형태는 형태적 요소들의 사전 독립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형태의 제로화는 애초에 두 단계를 거칠 것이다. 첫째, 눈에 띄는 형태는 외향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 ‘심층 형태’로 제로화 되어야 한다. 둘째, 이 심층 형태는 다른 형태들과 함께 엮이게 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들이 어떤 기억할 만한 단순성을 유지하면 일반적으로 가장 잘 작동하는 의외의 조합들이 산출된다. 건축의 시간적 양태는 상이한 형태들을 차례로 결합함으로써 이것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
● 억제되지 않은 프로그램적 건축물 역시 이것들과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전혀 없을 것인데, 그런 작품이 이미 기능을 그것의 신경계만 남기고 벗겨 내는 경향이 있거나(테이트 모던에서 콜하스) 혹은 프로그램의 요소들을 독특한 형태적 집적물들에 접목하는 경향이 있는(프레스노이에서의 추미)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 훌륭한 건축 작품은 한편으로 자신의 구성 요소들과 역사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사회적 및 환경적 맥락에서도 벗어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건축물은 그것이 많은 관계자를 드러내도록 개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블랙박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들 관계자 이상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블랙박스이기도 하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아무리 축약되든 혹은 확장되든 간에 어떤 뚜렷이 불변적인 핵심을 갖추고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여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속물적’이지는 않다.
● 건축에서 형식주의에 대한 사회정치적 비판들은 건축의 전제조건(건축이 행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나 하부구조적 책무)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시가 세상을 구원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형식주의는 정치적으로 의심스럽지 않다.
● 건축을 포함하지만 건축에 한정되지 않은 온갖 분과학문에서 모든 작품은 어떤 기념물적 명령 아래서 작동한다. 이것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은 규범적 명령일 것이다. 즉, 작품은 그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당 시간과 장소의 산물 이상의 것이고자 시도해야 한다. 어느 정전에 적절히 접근하게 되면, 그 정전은 학교 만신전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작품이 기성의 최고 작품 수준에 도달하기를 열망한다고 역설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미래의 획기적인 작품들에 의거하여 자체를 끊임없이 평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정전이 특정 인구에 고유한 것인 경우에 우리는 그 정전을 배제하지 않도록 우리의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정전이라는 바로 그 개념 자체가 정치적으로 유독하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된 대안은 새로운 사회적 조건이라 인구학적 조건에서 생겨나는 모든 작품이 본질적으로 성공적이고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 것이다.
● 건축에의 객체지향적 접근법들은 그다지 직서적이지도 않고 직업적으로 무용하지도 않으며 오히려이미 펼쳐지고 있다. 그것들은 수세기 전에 이미 픽처레스크한 것과 숭고한 것이라는 표제어들 아래 편입된 ‘불가사의’로 환원될 수 없다. OOO는 픽처레스크적이기에는 일반적으로 그 정신이 너무 도시적이며, 그리고 숭고하기에는 개별적 요소들에 너무 집중한다. OOO는 객체와 그 성질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사중의 긴장 관계에 관한 성찰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오로지 내부 형태의 은폐에만 전념하지는 않는다. 그 기법 중 다수는 이미 사전에 현존하는데, 자동차, 컴퓨터 혹은 여타 혁신의 경우에도 그 원형들은 사전에 현존했다. 독창성은 친숙한 요소들과 낯선 요소들을 다 같이 새롭게 배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적으로 전례가 없는 사실무근의 참신한 것들을 창작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 시각 예술과 마찬가지로(그런데 내부 공간들을 명시적으로 사용한다는 이유로 훨씬 더) 건축은 매체와 매개자 둘 다를, 스투디움과 푼크툼 둘 다를 포함한다. 건축은 순수한 분위기도 될 수 없고 순전한 텍스트도 될 수 없다.
● 건축가들이 철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거들먹거리는 교훈들로 훈계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중첩 영역들에 관해 논쟁하기 위함이다. 건축은 철학에 철저히 이질적인 다수의 기술적 노하우와 설계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또한 건축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암묵적 언명이며, 이런 까닭에 건축-철학 대화는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운이 좋다면 철학의 상황은 이런 대화에 힘입어 곧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정도로 바뀔 것이다. 이를 위해 철학의 더 두드러진 미학적 전회뿐만 아니라 사유의 세계의 존재분류학에 대한 근대적 강박으로부터의 탈피도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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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건축과 객체」 그레이엄 하먼 (下)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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