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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근대건축사 산책(4) - 1900년 전후의 핀란드 민족낭만주의 건축

서양근대건축사 산책(4) - 순정인가, 일탈인가: 1900년 전후의 핀란드 민족낭만주의 건축

  • 기자명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  입력 2012.09.16 17:10

 

▲ 사아리넨+린트그렌+게젤리우스, 뽀흐욜라 보험회사, 헬싱키, 1901년.(ⓒ김현섭)
 
 

“우리는 스웨덴 사람이 아니고, 러시아인이 될 수도 없다. 우리, 핀란드 사람이 되도록 하자.” 이 모토는 19세기 핀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말이다. 1809년까지 약 7세기 동안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더니만, 그 후에는 또 러시아의 대공국(大公國)이 되어 1917년에야 비로소 독립한 북유럽의 변방 국가 핀란드. 지금은 세계적인 복지국가로 손꼽히나 100년 전만해도 국가의 주체적 존립 자체가 불투명했고, 따라서 민족의식의 고취는 그들에게 절실한 과제였다. 그런 그들의 정체성을 위한 유력한 근거는 바로 ‘말’이다. 우랄어족에 속하는 핀란드어는 (알타이어로 분류되는 우리말과 먼 친척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여타 유럽 국가들과는 물론이고 스칸디나비아나 슬라브계 주변국들과도 달라 그들에게 구별된 민족정서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핀족(The Finns)이 역사의 여명기에 유라시아대륙을 거쳐 현재의 땅에 정착했다는 이론이 19세기 학자들 사이에 크게 대두되기도 했다. 민족 서사시 『깔레발라(Kalevala)』(1835/1845)의 출판은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중요한 배경이 됐는데, 이는 ‘까렐리아(Karelia)’라 불리는 핀란드와 러시아의 국경 지역에서 핀족의 기원과 관계된 구전 민담과 시가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1900년 전후 핀란드에 더욱 강화된 러시아화 정책은 오히려 그들의 민족주의 움직임을 확산시킨다.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까렐리아 순례를 통해 영감을 얻어 낭만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예술창작에 노력함으로써 이른바 ‘까렐리아니즘(Karelianism)’이라는 흐름을 낳았다.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 시인 에니노 레이노, 화가 아끄셀리 갈렌-깔렐라 등이 그러했고, 건축에서는 라르스 쏭크(1870-1956) 및 3인조로 활동한 엘리엘 사아리넨(1873-1950), 아르마스 린트그렌(1874-1929), 헤르만 게젤리우스(1874-1916)가 주도적이었다.


핀란드 민족낭만주의 건축은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신고전주의양식을 거부하고, 대신 주변 열강의 건축양식에 때 묻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선사시대나 아련한 중세의 이미지로 눈을 돌렸다. 이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토착농가의 목조건축 형식으로서 대개 민족주의 예술가들의 작업실 겸 주거건축에 차용됐다. 갈렌-깔렐라의 ‘깔렐라’(1891-95), 쏭크가 설계한 자택(1895) 및 시벨리우스를 위한 ‘아이놀라’(1904-11)가 그 예로서, 까렐리아 지방의 농가를 모델로 삼았고 숲이나 호숫가에 자리함으로써 모토(母土)에의 애정과 밀착을 상징한다. 둘째는 중세의 석조건축 형식으로서 규모가 큰 공공건축물에 주로 반영됐다. 사아리넨, 린트그렌, 게젤리우스 트리오에 의한 뽀흐욜라 보험회사(1901)와 핀란드 국립박물관(1902-12), 쏭크의 땀뻬레 성당(1902-07)이 여기 속한다. 그들은 교회당의 첨탑이나 성곽의 파사드로 픽처레스크한 실루엣을 창조하고 디테일에는 야생의 동식물이나 『깔레발라』이미지를 조각하여 민족의 전설적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자아냈다. 특히, 핀란드에 흔한 화강암을 민족적인 재료로 여기면서 거칠게 깎아 사용한 점은 핀족의 고된 역사적 역경과 당시 처했던 수난에의 극복의지를 보여줬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는 전술한 두 유형을 혼합하거나 주관적으로 차용한 형식으로서, 사아리넨 트리오가 설계한 1900년 파리 엑스포 핀란드관 및 그들의 스튜디오주택 ‘비뜨래스끄’(1901-03)가 대표 사례다. 이 가운데 파리 핀란드관은 민족낭만의 모티브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됐다는 사실과 더불어 ‘핀란드적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국제무대에 선보였다는 측면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긴 건물 몸체와 높은 탑의 구성이 교회당을 연상시킴에도 불구하고 둘째 형식으로 서술했던 핀란드 중세 석조건축의 강인함과는 거리가 있다. 일부에 석재를 사용하긴 했으나 목재와 석고 패널이 재료로서 주조를 이뤘고, 탑이나 지붕의 형상 및 여러 디테일이 역사에 대한 참조라기보다 디자이너 개인의 상상력에 더 의지했기 때문이다.


세기의 전환점에서 민족을 향한 핀란드 건축의 진한 연모는 낭만을 낳았다. 그러나 이 로맨스는 순정으로 뿐만 아니라 일탈로 읽히기도 한다. 이성주의 계열의 비평가들은 이들의 ‘장식’과 ‘절충주의’, ‘자기탐닉’을 혹독히 비판했고, 대신 기계시대에 발맞춰 ‘서양문화 공통의 국제주의’로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민족낭만주의(National Romanticism)’라는 용어는 (아르누보의 한 분파로도 간주되는) 이 흐름의 환상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1920년대 처음 사용된 말로서 그 적확성(的確性)에도 이견을 야기한다.

‘민족’과 ‘낭만’이라는 단어가 수반하는 모호성과 부정적 뉘앙스를 생각해보라. 이리 볼 때, 1900년 전후의 핀란드 민족낭만주의 건축은 한 주변 국가의 사소한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양 근대건축사의 흐름을 기능주의나 국제주의로의 수렴이라는 단선적 관점으로만 바라보길 거부한다면, 그래서 근대건축의 다양한 면모들이 긍정적으로 재고되고 있음과 이러한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이후의 건축적 결실을 인정한다면, 핀란드 건축의 민족적 로맨스는 무의미하지 않아 보인다. 특히 그들의 낭만이 약소민족이 처했던 독립에의 간절한 열망이라는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말이다. 일탈이라 하기엔 그들의 순정이 너무도 서럽지 아니한가!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출처 - 서양근대건축사 산책(4) - 순정인가, 일탈인가: 1900년 전후의 핀란드 민족낭만주의 건축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anc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