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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근대건축사 산책(5) -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

서양근대건축사 산책(5) -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 소위 지속가능한 건축이라는 것

  • 기자명 강태웅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조교수 
  •  입력 2012.10.16 17:03

 

근대시기에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건축이론가를 꼽으라 하면 영국의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과 퓨진(A.W.N.Pugin, 1812∼1852), 프랑스의 비올레 르 딕(Viollet le Duc, 1814∼1879)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 1803∼187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워낙 유명했던 이론가들이라서 당시 유럽에서 건축을 한다는 사람치고 이들의 책을 한두 권 읽지 않은 이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론가의 생각에 동의하는가에 따라 건축적 결과들은 다르게 나타났다. 러스킨과 퓨진으로 부터는 예술수공예운동이 비올레 르 딕으로 부터는 이성주의의 계보와 철이라는 재료에 반응한 불어권 아르누보가 젬퍼로 부터는 ㅍ피에 반응했던 분리파운동(Secession)이 촉발되었다. 이들이 소리 높여 주장했던 이야기들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는 것은 많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겠지만 러스킨은 건축에 있어서 도덕성과 사회성, 퓨진은 진실성과 종교적 신념, 비올레 르 딕은 구축의 합리성 그리고 젬퍼는 미학적/문화적 요소를 건축담론의 중심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이들의 주장을 다 합하면 결국 온전한 건축의 미덕이 그려진다.

 

서론이 왜 이렇게 길었냐 하면 유럽 근대시기에 이 건축의 미덕을 자신의 건축에 오롯이 드러낸 안토니 가우디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바르셀로나의 영웅이라고 할 만큼 그 위상이 대단하지만 활동 가우디 건축의 당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카탈루냐(catalonia)지역의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의 모국에서 조차 그가 세상을 등진 뒤 7년이 지나고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가우디에 대한 평가는 이상하게 박했다.(그러나 가우디의 최대 후원자인 구엘은 무역을 통해 영국의 건축에 익숙했고 가우디 스스로도 퓨진과 러스킨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반면 독일과 미국에서는 극찬을 받았다. 발터 그루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는 성 가족성당(Sagrada Familia, 1888∼ )을 구조적으로 완벽하다고 했으며 미국의 루이스 설리반(Louis Sulivan, 1856∼1924)은 예술혼의 결정체라고 했다. 국제적으로 가우디의 건물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시대에 따라 관점이 바뀌니 평가가 변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굳이 그 이유를 찾는 다면 그건 아마도 가우디의 건축에는 앞서 언급한 네 이론가의 주장들이 골고루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 가족성당은 가우디하면 떠오르는 건물이나 필자는 미완의 성당 콜로니아 구엘(Colonia Guell, 1899∼ )성당을 들고 싶다. 이 성당은 바르셀로나 근교에 구엘이 계획한 자립형 도시 시설의 일부로 계획되었다. 완성되었으면 성 가족성당 보다 더 대단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가우디가 이 건물을 통해 구조실험을 포함하여 갖가지 건축적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위해 아예 역 중력 구조모델을 만들어버렸다. 가우디는 고딕건축에서 수직하중을 분산시키는 부벽(Buttress)의 필요에 대해 항상 의문을 품었고 자연을 닮은 완벽한 구조라면 부벽은 사라져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폴리퍼니큘라(polyfunicular) 라는 장치로 하중을 역으로 해석하여 가장 적합한 구축 현수곡선(catenary)을 찾아냈다. 아마도 이러한 실험결과의 일부가 성 가족성당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의 건물은 재료부터 강한 지방색을 띈다. 이 성당에 사용된 재료들은 근대적 재료인 콘크리트부터 그 지역의 흙으로 만든 벽돌, 현무암과 화산암등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카탈루냐의 자연은 그에게 있어 영감의 보고였다. 실무 초기에 ‘카탈루냐 유람협회 ‘라는 조직에서 프랑스 남부 툴루즈(Toulouse)답사의 실망 이후 단 한 번도 국외를 나간 적이 없는 그는 지독한 카탈루냐 지역주의자였다. 젬퍼의 건축의 기원에 반응하듯이 가우디 건물의 외피는 카탈루냐의 강한 지역주의와 신무데하르(Neo-Mudejar)양식이 결합되어 묘한 시각적 충격을 주고 있다. 당시의 아르누보 흐름이 철이라고 하는 신 재료의 물성과 형태에 반응했다면 가우디는 철, 석재 그리고 타일 등 재료의 사용에 한계가 없었다. 가우디에 있어 건물의 표피는 그야말로 카탈루냐의 민족성을 드러내는 캔버스였다.

 

 

 

가우디의 건축은 불어권의 아르누보와 같이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대착오적이다. 영국의 예술수공예운동보다 더 수공예적인 태도는 근대적 패러다임의 생산성과도 맞지 않고 특히 강한 지방색을 드러내는 오나멘트와 재료는 그 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 못하는 자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 있다. 더욱이 구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은 기차역사 화장실에서 급사한 루이 칸(Louis Kahn,1901∼1974)와 같이 비극적이다. 가우디는 작업을 마치고 귀가 중 전차에 치었고 부랑인으로 여겨 3일 동안 방치되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뜬지 85년이 되었지만 가우디의 구조적 실험들은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 1951∼ )의 작품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지역적 가치들은 미랄레스(Enric Miralles Moya, 1955∼ )의 건축에서 오롯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지속가능한 건축이 아닐까?

 강태웅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조교수 .
 

출처 - 서양근대건축사 산책(5) -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 소위 지속가능한 건축이라는 것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anc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