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건축사 산책(2) - 사회주의 이념이 건축으로…빅토르 오르타의 ‘민중의 집’(1895-1900)
- 기자명 강태웅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 입력 2012.08.01 17:38
영국의 예술수공예운동은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건축 뿐 아니라 예술의 흐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92년 즈음에 시작해서 약 15여년의 생명을 유지한 아르누보 (Art Nouveau: New Art) 역시 예술수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은 하나다. 규범을 따르기보다 일상성의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내부의 기능과 재료의 솔직성을 드러내는 예술수공예운동의 태도와 함께 근대적 재료인 철에 주목한다. 거기다가 온건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부르주아 엘리트 집단의 전격적인 지지로 아르누보건축은 탄생했다.(아르누보라는 이름은 독일 출신의 아트 딜러 사무엘 빙(Samuel Bing,1838-1905)이 1895년 파리에 개장한 갤러리(Maison de l'Art Nouveau) 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당시에는 고유 명사라기보다는 새로운 흐름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였다. 유럽 나라별로 이 흐름을 지칭하는 명칭은 다양했다.)
건축역사 개설서에서 아르누보건축을 찾아 펼쳐보면 많은 책의 첫 장을 장식하는 사진이다. 브뤼셀(Brussels)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가 브뤼셀 자유 대학(Free University)의 교수인 에밀 타셀(Email Tassel)을 위해 설계한 타셀가옥(Tassel House, 1893-1894)의 계단실이다. ‘붉은 집’(Red House, 1859-60)이 영국수공예운동의 대표적 건물이라면 타셀가옥은 아르누보건축하면 항상 먼저 언급되는 건물이다. 이 계단실 사진은 소위 아르누보건축의 유기적 선형 미학을 잘 드러내 보이는 가장 아름다운 화각의 사진이기도하다. 그러나 테라스 하우스라 (terraced house)는 유럽도시주거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인해 파사드(facade)만 보이는 집의 외관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구불거리며 느끼한 패턴의 벽지와 계단의 난간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입면,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오르타 건축의 가치는 시각적 유희에만 있지 않다.
강한 프랑스학계의 영향아래서 에꼴 드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건축교육을 받고 근 10년간 신고전주의 양식을 추구해 온 오르타가 사회주의 부르주아 엘리트 집단에 가입하고 그 후원 아래 처음 수주한 설계에서 갑작스런 시각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물론 타셀은 새로운 주거를 요구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소 평범한 듯 보이는 정면에 비해 내부에 구겨넣어진 공간의 켜는 평범하지 않다. 앞뒤로 두 개의 덩어리가 중요한 기능들을 수용하고 이 두 개의 덩어리는 위로부터 채광되는 밝은 볼륨(Volume, 채워져 있는 덩어리라는 의미가 더 강한 mass와 구별하기 바란다.)으로 연결되어 있다. 구불대는 선형의 패턴들이 표면으로 부터 튀어 나와 이 밝은 볼륨 속에서 빛과 어울리며 공간의 경계를 명확히 정의하고 있음과 동시에 공간을 인지하게 하는 중요한 매개요소로도 작동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브링크만(A. E. Brinckmann, 1881-?)의 공간 발생과 인지에 대한 이론이 구체화 되어 건축계에 등장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타셀가옥이 아르누보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건물이라면 ‘민중의 집’(Masion du Peuple, 1895-1900)은 그야말로 아르누보 건축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타셀가옥’에서는 내재된 열정과 생각들을 내부에서 수줍게 드러냈다면 ‘민중의 집’에서는 확신을 갖고 대담하게 드러냈다고나 할까? 오르타가 1888년에 가입한 사회주의 노동당으로 부터 수주한 이 건물은 당시 귀족과 왕정에 대척점에 서 있었던 사회주의가 표방했던 투명성과 명징성 그리고 역동성을 건물의 외부와 내부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건물은 불규칙한 대지에 그대로 반응했고 그로인해 고전적 정면은 의미가 없어졌다. 벨기에의 전통적인 재료인 벽돌과 석재가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저렴해진 철과 유리를 통해 유기적으로 얽히고 있으며 입면은 철재 멀리온(mullion)시스템과 유리를 도입하여 극도의 투명성을 추구한 듯하다. 이러한 투명성으로 인해 건물의 프로그램(집회장, 사무실, 세미나실, 카페테리아)은 건물의 외피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어쩌면 예술수공예운동의 건축에서 보이는 내부 이야기의 솔직한 표출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건물에서 오르타는 보편적 생산 방식인 모듈의 개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이 건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집회장으로 들어가 보자. 집회장의 특성상 건물은 넓은 경간을 지탱해야 했다. 오르타는 중세 이 후 대규모 공간을 위해 많이 사용되어온 목재 외팔들보(Wooden Hammered Beam)를 철 구조물로 번안하였다. 철이라는 재료가 가진 물성을 십분 활용하여 아르누보건축의 선형 미학이 구축적 합리성을 통해 표출된 근대시기 구조설계의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정치적/사회적 패러다임은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부르주아 엘리트들에게 오르타의 이 모든 건축적 제스처는 그야말로 자신들의 이념을 구상화한 그야말로 민중의 전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5년, ‘민중의 집’은 수많은 건축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후 되었다는 이유로 안타깝게 철거 됐고 20세기의 가장 의미심장한 건축적 범죄로 기록되고 있다. 와트킨(D. Watkin, 1941 - )에 의하면 집회장은 음향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며 그것의 위치상 활용도가 많이 떨어 졌다고 한다. 근대 시기에 철이라는 재료를 주요한 내외장재로 사용한 건물에서 항상 언급되는 내구/내화성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쉽게도 오르타는 짧은 진보적 행보를 마감하고 다시 보자르풍의 고전주의 건축(Beaux-Arts classicism)으로 회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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