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가 프라이 오토
프라이 파울 오토(Frei Paul Otto, 1925년 5월 31일 ~ 2015년 3월 9일)는 독일의 건축가이다. 박람회의 파빌리온 건축과 경기장 건축 등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건축물 작품들이 잘 알려져 있다.
생애
독일의 건축가로 작센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 기술대학교와 버지니아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52년 베를린에 스튜디오를 개설하였으며, 1957년 베를린의 경량 건물 개발원(EL)의 후신으로 경량판 개발협회(IL)를 만들었다. 또한 1964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기술전문대학을 설립하여 경량구조 연구소장이 되었다.
그를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한마디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그의 작품은 합리적인 성향과 동시에 독일식 낭만주의를 함께 갖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경비행기 항공기술로부터 받은 인상과 브르노 타우드의 결정체사원, 알프스 건축스케치 등은 각각 낭만적 성향과 표현주의적 환상을 주어 그의 건축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최초로 독특한 현대적인 텐트를 만들어 냈고 텐트를 경량건물에 적용 가능한 원형으로 판단하고 재응용하는 데 힘썼다. 그의 작품 중 1950년대에 지은 연방 식물원의 여러 작은 직물구조로 된 파빌리온은 서정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그의 작품은 미적인 요소와 구조적인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1960년대 그가 지은 건축은 내부의 저부(低部)와 고부(高部)를 통해 일정치 않게 분할시켜 비대칭적인 지붕 형상을 만들어 자유로운 형태의 정겨운 모양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생태학적 현상을 분석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고 자연을 형성하고 있는 구조체들을 연구·분석했다. 건축학에서 그는 20세기의 첨단 기술원을 연구하여 현대적인 텐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몬트리올 만국박물관> <뮌헨 올림픽 경기장 지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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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따뜻한 심장으로 혁신을 만든 건축가 프라이 오토
따뜻한 심장으로 혁신을 만든 건축가 프라이 오토 |
조종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혀 들어간 수용소에서 건축에 대한 영감을 얻은 천재, 부드러운 천막이나 물방울처럼 보이는 디자인으로 현대 경량 건축의 기반을 다진 건축가, 프라이 오토.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그만의 아이디어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또한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형태를 탐색하는 그의 접근법은 현대건축의 기초를 이룬다. 통찰력은 물론, 사명감까지 남다른 독일 건축가, 프라이 오토의 모든 것을 알아보자. |
프라이 오토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2015년 수상을 앞두고 하루 전날 세상을 떠났다. 심사위원회로부터 수상 여부를 전해들은 그는 원래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릴 시상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상 최초로 수상자 소식이 곧 부고 뉴스가 되고 말았다. 이미 수상자가 결정되고 시상식만 남은 상황이라 프리츠커상은 그의 영전에 바쳐져야만 했다. 1979년 상이 제정된 이후 작고한 건축가에게 영예가 돌아간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
일찍이 1월에 수상 사실을 접한 오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발언은 본의 아니게 수상 소감이 되었다. "내 건축적인 경향은 자연재해로 빈곤해진 사람을 돕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든 지금까지 해온 것을 계속할 것이다." |
1925년 독일 지크마르(Siegmar)에서 태어난 프라이 오토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1945년 4월 뉘른베르크 근처에서 연합군에 붙잡혀 전쟁포로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 샤르트르 근처의 전쟁포로수용소에서 2년간 지내며 캠프 건축가로 일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제한된 자원으로 텐트처럼 가변적인 형태의 쉼터를 마련하는 건축 방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내 수용소에서 접한 텐트 형태의 구조물이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오토는 이런 형태의 집이야말로 가장 가볍고 유동적이며 환경친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가 이후 그의 건축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48년 독일로 돌아온 프라이 오토는 베를린 기술대학교에서 건축을, 1950년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서 사회학 및 도시개발을 공부했다. 그리고 1952년 베를린에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또한 그는 1954년 베를린 기술대학에서 토목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취미로 글라이더 비행기를 설계하며 공기의 역학 및 구조, 가벼운 프레임과 막의 구조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
그는 항상 최적화된 형태를 결정하고, 해당 구조를 테스트하기 위한 물리적 모델을 직접 제작했다. 1955년 카셀의 연방정원 전시회에서 그는 대형 텐트 형태의 임시 경량 구조체를 그의 첫 작품으로 선보였다. 1964년에는 슈투트가르트대학에 경량구조연구소를 설립하여, 은퇴할 때까지 연구소를 이끌었다. |
건축가로서 프라이 오토는 제한된 재료로 다채로운 경량구조물을 만드는 선구적인 작업에 한평생 매진했다. 마치 텐트처럼 기둥을 가운데 세우고 사방으로 케이블을 뻗어 천막 같은 지붕을 붙들게 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혁신 그 자체로 평가받았다. 이는 벽체와 지붕으로 이뤄진 기존 벽돌 건축의 고정관념을 깬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오늘날까지 대형 경기장이나 각종 구조물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비눗물에 둥근 철사를 담갔다 꺼낼 때 생기는 '비누막' 구조 역시 프라이 오토가 처음 시도해 건축 분야에서 지금까지 활용되고 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비누막은 경계가 있는 곡면 중에서 가장 작은 표면적을 가진다. 평균곡률이 0인 비누막은 가장 적은 재료로 가장 안정된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모형이다. |
프라이 오토는 좋은 건축가는 사회사업가이자 가족 주치의이며, 어떤 건물을 소유해야 하는지 처방을 내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 적합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밝혀왔다. 즉, 그는 일찌감치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 건축가였던 것이다. 그의 건축물은 연구원이자 발명가, 엔지니어, 건축업자, 교사, 환경 운동가, 인문주의자 등을 모두 건축가에 대한 정의로 포용했다는 평을 듣는다. |
오토는 가변적인 구조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역시 소외 계층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자연재해로 빈곤해진 사람을 돕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혔을 때 프랑스 내 수용소에서 접한 텐트 형태의 구조물이 그에게 영감을 준 덕분이다. |
1972년, 군터 베니시, 레온 하르트와 공동 설계한 텐트형 지붕으로 유명한 독일 뮌헨 올림픽경기장은 메인스타디움에 기둥을 세워 케이블로 천막 같은 지붕을 고정하는 방식으로 텐트형 건축물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스타디움과 공원이 한데 어우러진 생태공원 형태로 조성되어 심미적이면서도 활용성이 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
또 다른 대표적인 작품인 몬트리올 만국박람회 서부 독일관 파빌리온 역시 유목민 텐트를 닮은 천막 같은 형태로 고정된 지붕을 선보이고 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프라이 오토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이 건축공법은 이후 2000년 하노버 엑스포의 일본관 설계에도 도움을 주었다. |
다용도의 매달린 지붕 구조, 경량 텐트 모형의 막면 구조 공법을 개척하며 건축 역사에 새로운 자산을 남겨준 프라이 오토. 그는 전 생애에 걸쳐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건축의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가치를 반영한 남다른 건축을 짓는 데 몰두했다. 1972년 이후 40년이 흐른 지금, 수많은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건축가가 가져야할 신념과 역할에 대한 인식만큼은 프라이 오토의 시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
출처 - :: KOCEDCMI NEWSTEER ::::
별세 다음날 수상자 발표로 ‘조의’
4. [길 위의 갤러리: 생태모방건축②] 비누 거품이 건축물로 탄생하게 된다면?!
- 기자명 임나래
생물의 모습을 닮은 생태모방 건축
비누 거품을 닮은 베이징 국립 수상 센터와 에덴 프로젝트
거미줄에서 시작된 그물망 구조의 서독 파빌리온과 도쿄 올림픽 경기장
[문화뉴스 임나래 기자] 생태모방 건축은 동물의 뼈와 같이 생물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하지만 자연 현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디자인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한 나라의 위상을 바꾸는 건축물을 탄생시키는 만큼 일상 속 당연한 현상들에 대해 낯설게 보기의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다.
이번 편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누 거품, 거미줄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네 건축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비누 거품을 닮은 베이징 국립 수상 센터와 에덴 프로젝트
지난 2008년 하계올림픽과 2022 동계올림픽이 열린 베이징 국립 수상 센터(일명 워터큐브와 아이스큐브)의 독특한 외관은 세계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딘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물의 외관은 비누 거품을 닮은 생태모방 건축물로, 비누 거품이 표면적과 표면장력을 최소화하는 규칙을 연구·발견해 디자인에 적용되었다.
베이징 국립 수상 센터는 생태모방 디자인을 통해 수영장에 걸맞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에너지 효율, 자연 채광, 단열효과에 이르는 에너지 측면에서도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다.
EFTE라고 불리는 매우 가볍고 유연하고, 일광 투사율이 높은 소재를 사용해 지붕 전체를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것과 같은 에너지 절약을 했다. 에너지 비용 약 30% 감소, 인공조명 사용을 55% 감소시켰고, 온실효과와 더불어 태양에너지를 저장해 난방에 사용했다.
비누 거품을 닮은 또 다른 생태모방 건축으로는 영국 콘월의 에덴 프로젝트(The Eden Project)이 유명하다.
영국 유명 건축가 니컬러스 그림쇼(Nicholas Grimshaw)의 설계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온실로, 23헥타르의 넓은 대지에 다양한 기후 조건으로 조성된 ‘바이옴’이라 불리는 돔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큰 바이옴은 열대우림 돔으로 높이 55m, 너비 100m, 길이 200m로 바나나, 커피, 자이언트 대나무 등 열대 식물들이 있다. 바이옴은 베이징 국립수상 센터와 유사하게 여러 겹의 EFTE 포일로 덮여있는데, 자외선 투과, 자동 세척 작용, 재활용이 가능해 관리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또, 유리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거대한 내부공간을 만들 수 있고, 반투명하기 때문에 조명을 통한 건축물의 미적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거미줄에서 시작된 그물망·인장구조의 서독 파빌리온과 도쿄 올림픽 경기장
거미줄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된 그물망/인장 구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에서 선보인 프라이 오토(Frei Otto)의 서독 파빌리온이 있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도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프라이 오토는 특히 인장구조의 건축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서독 파빌리온 외 뮌헨 올림픽 경기장 지붕도 유사한 대형 구조물로 이뤄졌다.
프라이 오토는 인장구조를 통해 가벼운 건축만이 아니라 값이 저렴하면서 내구성이 있고, 다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건축적 해법을 제시했다.
또 다른 인장구조의 건축물로는 이웃 나라 일본의 국립요요기 경기장이 있다. 일본인 최초의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단게 겐조의 작품으로, 전통과 모더니즘의 결합을 보여주는 건축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87년 단게 겐조가 프리츠커상을 수상할 당시 요요기 경기장을 언급하며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기술의 결합을 높이 평가받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요요기 경기장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일본식 기와로 세계인들의 이목을 이끌었다. 단게 겐조의 올림픽 경기장은 프라이 오토의 파빌리온과는 다르게 강인하고 견고해 보인다.
단 두 개의 큰 기둥만으로 지붕의 힘을 케이블로 전달받아 지탱하도록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는 인장구조를 기본으로 한 구조적 아름다움이 강조된 디자인이다.
[문화뉴스 임나래 기자]
5. 독일의 막구조 건축가 프라이 오토 인터뷰
< 인터뷰 >
-젊은 건축가 중엔 당신의 텐트 구조 건축, 특히 뮌헨 올림픽 주경기장의 떠 있는 듯한 지붕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물론 기분 좋다. 대다수가 컴퓨터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다. 컴퓨터에 대해선 아무런 반감도 없지만 직접 만질 수 있는 재료와 형태를 사용한 경험이 나를 훨씬 더 발전시켰다. 오늘날 젊은 건축가 중 몇몇이 이런 경험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많은 우리 독일 건축가들은 모험심이 없지만.
-모험심이 생기려면 아마 사회가 색다른 건축물을 원해야 할 것이다. 건축가들이 사회적인 프로젝트를 하지도 않는데 실험이 왜 필요하겠는가?
-건축계에서는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고 구조적으로 특이한 형태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신은 사회적 실험을 말하는 것인가?
-건축가들이 설계자로서의 특권을 잃는 걸 두려워하는가?
-그 반대 아닌가? 이동성이 증가하는 점 때문에 단단한 벽과 변경 불가능한 구조에 대한 필요가 커지고 있지 않나?
-당신의 건축 기술에는 사회적 염원도 들어 있었나?
-그런 확신이 평생 당신을 지탱한 것이군?
출처 - 오토 프라이 | 아키수다 Wiki | Fandom
6. 디지털 시대의 미래지향적 건축은?
- 2017-03-05
자연의 법칙을 바탕으로 미래 지향적 디자인을 시도하는 오늘, 건축계의 주요 디자이너들은 어떤 역사적 비평 의식을 바탕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을까?
1 한창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인 아부다비 루브르
2 엘프필하모니 함부르크의 그랜드 홀 전경
3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 비통 재단의 다중 파사드
요즘 새롭게 등장하는 건축 디자인을 보면 그 방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며 발전해왔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엔 기존 디자인을 기술력으로 덧씌워 내놓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세계적 건축 사무소는 자연의 모티브를 차용한 디자인을 마치 새로운 트렌드인 양 내놓고 있다. 이러한 디자인은 과연 미래지향적인 것일까?
20세기 이전의 디자인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명의 발전을 구현하는 디자인’은 거의 언제나 과거에 흥성한 특정 문명의 가치를 되살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예컨대 18세기 말 신고전주의 건축은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을 탐구하고 그 이상을 재구현한다는 망상에 기초한 것이다. 반면 20세기에 들어서며 잠시 대두했다가 사라진 아르누보는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을 구현하고자 애쓴 괴상한 유행이지만 자연을 따르는 디자인이 미래지향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아르누보가 몰락하고 본격적으로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보다 현대적 자의식이 나타났고, 미국 현대건축의 아버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 1856~1924년)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묘한 말을 남겨 진보적 조형을 향한 후대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다.
루이스 설리번은 건축 디자인 역사에서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꼽히지만, 사실 그가 유럽의 모더니스트에 상응하는 현대적 의식을 지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강의실에선 문제적 인물이 여럿 나왔다. 그중 건축가로서 가장 크게 성공한 인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년)로 그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유기적 건축은 인류의 문화가 진보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것을 뜻했다. 반면 루이스 설리번의 제자 중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인물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년)다. 그는 장식을 거부하는 기능주의 디자인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장식과 죄악’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장식을 구사하는 디자이너들을 비문명적 충동을 실천하는 현대사회의 죄인으로 낙인찍었다. 알려진 대로, 장식타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적 디자인 운동의 거점인 바우하우스로 이어졌고, 20세기 최고의 거장인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년)가 등장했다.
전후 모더니즘 건축이 자연에서 추출한 수리적 질서를 그리드로 구현하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달리, 아웃사이더형 건축가였지만 벅민스터 퓰러(Buckminster Fuller, 1895~1983년) 같은 인물은 수리적 구조체의 실험을 통해 유기적 건축을 진일보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런 이상주의적 접근은 프라이 파울 오토(Frei Paul Otto, 1925~2015년) 같은 건축가에 의해 계승돼 잠시 주류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체로 오래도록 마이너리그에 남아 있었다. 벅민스터 퓰러의 망상을 이어받은 그레그 린(Greg Lynn, 1964년~) 같은 건축가는 알고리즘에 의해 자가 생성되는 블롭젝트(blobject)의 건축 구조를 탐구했지만, 기술 환경의 미발달로 기술과 자연의 유기적 형태를 자동 성장시키는 그의 디자인 방법론은 오래도록 가설적 망상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접근 방식이 업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한 예로 렌초 피아노(Renzo Piano)의 기존 건축 문법에서 벗어난 제롬 세두-파테 재단(The FondationJ erome Seydoux-Pathe)의 건축설계는 그레그 린의 자가 생성 블롭젝트 실험을 참고하지 않고는 도달하기 어려운 결과물이었다.
벅민스터 퓰러가 주창한 과학주의에 기반을 둔 유기적 디자인의 이상은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지난 뒤, 1990년대에 포스트모던 조형 감각이 하이테크 건축의 진일보한 엔지니어링 기술과 결합하면서 비로소 구현되기 시작했다. 1988년 뉴욕 현대미술관 건축부가 <해체주의자 건축(Deconstructivist Architecture)>이라는 기획전에서 피터 아이젠먼(Peter Eisenman, 1932년~),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5년~),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년),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년~) 등을 한자리에 소환했을 때 이는 컴퓨팅 설계와 시뮬레이션 작업 환경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4 헤어초크와 드 뫼롱이 설계한 엘프필하모니 함부르크의 남다른 위용
5 연구용으로 제작한 그레그 린의 블롭월 파빌리온(Blobwall Pavilion), 2008
핼 포스터(Hal Foster, 1955년~) 같은 비평가는 프랭크 게리의 괴물 같은 건축이 ‘21세기의 아르누보’라며 맹공을 펼치기도 했지만 사실 정말로 21세기의 아르누보를 추구한 건축가는 자하 하디드였다. 프랭크 게리는 건물의 파사드에서나 해체주의적 조형 실험을 시도했을 뿐, 대부분 건물의 내부 구조는 박스 형태의 조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장 누벨도 ‘아부다비 루브르’에서만큼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성한 이중 구조의 돔으로 ‘또 다른 하늘이 되는 외피’를 구축하고 그 아래 박스 형태의 건축물을 배치하는 수법을 구사했다. 하지만 여타 경쟁자와 달리 자하 하디드는 건물의 내·외부를 하나로 연결, 통합하며 유기적 시뮬레이션의 동세를 구현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종종 큰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21세기의 건축 디자인은 이렇게 알고리즘을 통해, 기술과 자연의 유기적 형태를 도출하는 새로운 아르누보의 세계에 도달했다. 이것은 여러 시도가 하나로 결합된 결과물이다.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고 모방하는 르네상스적 행위의 재현이고, 특정한 과거를 고전으로 삼아 그 정수를 부활시킴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려는 것이며, 아르누보의 미래주의적 성격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자연과 기술 환경을 결합된 형태로 연구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영향에 의해 기술과 자연의 공진화를 고찰하고 유기적 형태를 도출해내는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과정 자체를 알고리즘화함으로써 탈인간적 비전을 구현하고 있다.
때마침 기존의 역사적 건물을 보존한 채 첨단 건축물을 증축의 형태로 구현하는 헤어초크와 드 뫼롱의 초호화 건축물 엘프필하모니 함부르크(Elbphilharmonie Hamburg)가 문을 열었다. 예산 초과와 공사 지연으로 구설에 오른 사업이지만 개관 연주회 이후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과거의 공간을 재생한다는 설정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래 구식 알리바이에 불과하지만, 이를 구현한 방식은 지금까지의 성취를 집대성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베르너 칼모르겐(Werner Kallmorgen, 1902~1979년)이 설계한 옛 창고 위로(실제로는 옛 건물의 외피만 보존한 것이지만) 범선을 연상시키는 매스를 가볍게 올려놓은 형태의 이 설계안은 사실 내·외부 모두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 1893~1972년)이 설계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을 모방한 것이다. 특히 콘서트홀 내부 디자인의 경우 “알고리즘을 활용해 최적의 음향 구조를 찾아내는 선택으로서 디자인 메소드를 구사했다”고 홍보해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실제론 베를린 필하모닉 홀의 구조를 21세기 스타일의 유기적 디자인으로 표현하려 한 장 누벨의 실패 사례(필하모니 드 파리)를 참고해 더 나은 결과를 뽑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음향 설계 과정에서 알고리즘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다소 과장이며, 최고의 음향을 뽑아낸 진짜 주인공은 산토리 홀의 음향 설계를 맡은 도요타 야스히사다.
왜 2010년대의 인류는 미래지향적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이토록 복잡한 언어를 사용해가며 알리바이를 설정하게 됐을까? 그 이유는 하나다. 21세기는 문명의 진보를 부정하는 가운데 20세기를 데이터베이스로 삼는 상위 레이어로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런 21세기의 현실은 내일을 추구하는 디자이너에겐 꽤나 다루기 힘든 오늘이다.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
글 임근준(미술·디자인 평론가)
출처 - 디지털 시대의 미래지향적 건축은? - 노블레스닷컴 (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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