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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72. 빅토르 오르타 Victor Horta

 

1.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

 


빅토르 피에르 오르타(프랑스어: Victor Pierre Horta, 1861년 1월 6일 헨트 ~ 1947년 9월 8일 브뤼셀)는 벨기에의 건축가이다. 아르 누보 양식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여겨진다.

생애

헨트 출신이며 12세에 삼촌이 일하던 건설 현장을 도우면서 건축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헨트 예술학교에서 회화, 직물, 건축을 전공했고 1878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건축가 겸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1880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벨기에로 귀환했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레오폴 2세 국왕의 왕실 건축가로 근무하고 있던 알퐁스 발라(Alphonse Balat)의 제자가 되었다. 발라는 오르타와 함께 라컨궁(Laeken)의 왕립 온실을 설계했는데 이 건축물은 오르타가 처음으로 강철, 유리를 소재로 설계한 건축물이다.

1885년부터는 독립과 함께 3채의 집을 직접 설계했다. 오르타는 공공 전축물 설계전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출품했으며 건축 뿐만 아니라 조각상묘비 등 다양한 조각들을 설계했다. 오르타는 설계에서는 곡선을 주목했지만 건축에서는 실용성을 중시했다.

1892년부터 1893년까지 브뤼셀에 지어진 타셀 저택(Hôtel Tassel)을 설계했다. 식물을 소재로 한 유기적인 곡선 형상을 주철로 만들어 내부 장식에 사용한 것이 특징인 이 건축물은 유럽에서 최초로 아르 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1893년부터 1911년까지 브뤼셀 자유 대학교(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 건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 외에 브뤼셀에 건설된 솔베 저택(Hôtel Solvay, 1895년 ~ 1900년), 브뤼셀 시민 회관(Maison du Peuple, 1896년 ~ 1898년), 오르타 사저(1898년 ~ 1900년, 현재는 오르타 박물관(Musée Horta)으로 사용되고 있음), 브뤼셀 미술궁전(Palais des Beaux-Arts, 1920년 ~ 1928년), 브뤼셀 센트랄 역 등을 설계했다. 특히 솔베 저택, 오르타 사저는 약간의 철과 돌로 만든 퍼사드에 정교한 철 인테리어를 결합한 건축물이다.

1932년에는 벨기에의 알베르 1세 국왕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오르타가 설계한 브뤼셀의 4채의 개인 저택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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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

 

  • 제목 :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

  • 설명 : © OUR PLACE The World Heritage Collection

상세정보

  • 국가 : 벨기에(Belgium)

  • 위치 : 브뤼셀(Brussels)

  • 좌표 : N50 49 41.016, E4 21 44.028

  • 등재연도 : 2000년

 

요약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Architect Victor Horta)가 디자인한 4채의 주요 타운하우스(Town Houses) – 타셀(Tassel) 저택, 솔베이(Solvay) 저택, 반 에트벨데(van Eetvelde) 저택, 그리고 오르타의 저택과 아틀리에(Maison & Atelier Horta)-는 19세기 말에 건축된 초기 아르누보 작품으로 가장 괄목할 만한 선구적 작품이다. 이 건축물은 개방 구조, 빛의 확산, 그리고 장식적인 곡선이 건물 구조와 아주 멋지게 통합되어 당시에는 혁명적인 건축 스타일로 일컬어진다.

 

영문명

Major Town Houses of the Architect Victor Horta(Brussels)

 

등재기준

기준 (ⅰ) : 브뤼셀에 있는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은 인간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예술과 건축에서 영향력 있던 아르누보 스타일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했다.

기준 (ⅱ) : 브뤼셀에 있는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은 선구적이고 새로운 건축 방식에 대해 이례적인 증거를 보여 준다. 19세기 말 아르누보의 출현은 건축의 발전상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이로 인해 향후 발전이 가능했다.

기준 (ⅳ) :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은 아르누보 건축의 뛰어난 일례이며, 예술 및 사상, 사회적인 면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멋지게 전환되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타셀 저택은 1893년에 브뤼셀 자유대학 교수이던 에밀 타셀의 의뢰를 받고 건조된 것으로, 아르누보와 건축의 융합을 성공시킨 최초의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타셀 저택은 빅토르 오르타가 건축에 대한 독창적 사고를 깨닫게 된 최초의 작품이다. 저택은 1894년에 완공되었으며, 오르타는 이후 몇 년 동안 저택 안의 가구를 디자인했다.

타셀 저택이 완공되었을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반응이 일었으나, 곧 현대 건축 발전에 중요한 건물로 인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저택은 2개의 작은 아파트로 나뉘었는데, 너무 작게 나뉘어져 집의 장식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1976년 이 집을 구입한 건축가 장 델헤이가 도로 쪽 건물 앞면과 출입문을 재건했으며, 건물은 고급 사무실로 변경되었다.

솔베이 저택은 아르망 솔베이의 의뢰를 받아 1895년부터 1898년까지 건설되었으며, 가구는 1903년에 완성되었다. 건축가인 보스망(C. Bosmans)과 방드벨트(H. Vandeveld)에 의해 디자인된 차고는 1899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1957년까지 솔베이 가문은 이 저택을 1957년까지 소유했고, 이 해에 위타머드캠프(Wittamer-De Camps)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이 저택은 몇몇 변경을 거쳐 고급 의상실이 되었다. 1942년 유리가 깨졌던 남쪽 채광창은 아틀리에 바닥으로 가려져 있었다. 1층에는 2개의 큰 디스플레이용 유리를 만들었다. 1980년에 소유주는 의상실 활동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 다음 중앙 계단의 유리 천장을 교체(1980~1982)하고 내부의 냉방과 건물 앞부분을 복원(1988~1989)하는 등 이 건물의 복원을 시작했다.

반 에트벨데 저택은 외교관이자 콩고의 사무총장이던 반 에트벨데로부터 1895년에 의뢰를 받고 1897년부터 건축을 시작했다. 1920년 반 에트벨데 부인의 죽음으로 이 저택은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다. 팔메르스톤대로 4번지(enue Palmerston 4)에 있는 원래 건물과 동쪽 부분은 포페즈 드 케테니스(Pouppez de Kettenis) 가문에 팔렸으며 이들은 여기서 30년 정도 살았다. 1950년, 지금의 소유자인 가스산업연합(Fédération de l’Industrie du Gaz, FIGAZ)에게 넘어갔으며 1층은 전시실로 사용되었다

차고가 동쪽 부분에 추가되었고, 1966년에는 채광창 부분에 사무실이 만들어졌다. 1988년 가스산업연합이 오르타의 전 제자이자 건축가인 장 델헤이와 건축가 바바라 반 데르 비(Barbara Van der Wee)에게 의뢰하여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서쪽 부분은 1920년 본 건물의 코너에 연결되었으며, 1926년 니콜레이데스호프만(Nicolaides-Hoffman) 가문이 이 건물을 획득한 후 이곳을 철거하고자 했으나, 이에 대한 허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이 건물은 장 델헤이가 자신의 개인 거주지로 구입하게 되었다.

오르타의 저택과 아틀리에는 이 건축가의 전문가적 식견과 가족의 요구에 따랐으며, 부유층이 거주하는 도시의 두 구역에 1898년에서 1901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완공 후 얼마 되지 않아 오르타는 몇몇 부분을 수정하였으며, 1906년에는 정원 쪽으로 집을 확장했다. 오르타는 부인과 이혼한 이후 잠시 동안 이 건물을 임대하였으나, 이후 테라스와 겨울 정원을 추가했으며 아틀리에를 확장하는 내부 개조를 한 이후 거기서 계속 거주했다. 1911년에 오르타가 차고를 만들면서 도로 쪽 앞면이 수정되었다.

1919년 이 건물은 메이저 헨리 핀트(Major Henri Pinte)에게 팔렸으며, 1926년에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967년 장 델헤이가 이를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수했으며,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작업이 계속되었다. 1989년에 새로운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참고번호

1005

 

본문

19세기 말 아르누보의 출현은 건축의 발전상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브뤼셀에 있는 4채의 저택(타셀 저택, 솔베이 저택, 반 에트벨데 저택, 오르타저택)은 이 새롭고 선진적인 양식에 대한 독특한 증거이다. 이 저택들은 아르누보 건축의 뛰어난 일례이며 예술, 사상과 사회적 성격 등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멋지게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작품들이 대표하는 혁명적인 스타일, 즉 개방 구조와 빛의 확산, 그리고 장식적인 곡선은 건물 구조와 아주 멋지게 통합되었다.

타셀 저택은 1893년에 브뤼셀 자유대학 교수이던 에밀 타셀(Emile Tassel)의 의뢰를 받고 건조된 것으로, 아르누보 운동과 건축의 융합을 성공시킨 최초의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타셀 저택은 빅토르 오르타가 건축에 대한 독창적 사고를 갖게 된 최초의 작품이다. 저택은 1894년에 완공되었으며, 오르타는 이후 몇 년 동안 저택 안의 가구를 디자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저택은 2개의 작은 아파트로 나뉘었는데, 너무 작게 나뉘어져 집의 장식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1976년 건축가 장 델헤이(Jean Delhaye)가 도로 쪽 건물 앞면과 출입문을 재건했으며, 건물은 고급 사무실로 변경되었다. 석재로 된 도로 쪽 앞문은 주변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다. 출입구 위에는 획기적인 철물 구조로 되어 있는 2층 내닫이창이 있다. 도로 쪽에서 보면 건물의 현관층, 메차닌(mezzanine, 다른 층들보다 작게 두 층 사이에 지은 층), 2층과 3층, 그리고 다락이 있다. 이 층들은 중앙 계단에 의해 정원 쪽으로 돌려져 있다.

솔베이 저택은 아르망 솔베이(Armand Solvay)의 의뢰를 받아 1895년~1898년까지 건설되었으며, 가구는 1903년에 완성되었다. 1956년에 이 저택은 고급 의상실이 되었다. 1980년에 소유주는 중앙 계단의 유리 천장을 교체(1980~1982)하고 내부의 냉방과 건물 앞부분을 복원(1988~1989)하는 등 이 건물의 복원을 시작했다. 오르타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복원이 잘되어 있으며, 원래의 예술품과 기능적 순서에 따른 실용품 등 그 내부가 여전히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반 에트벨데 저택은 외교관이자 콩고의 사무총장이던 반 에트벨데로부터 1895년에 의뢰를 받고 1897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 건물은 가족과 해외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위엄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서쪽 부분은 1900년에, 동쪽 부분은 1901년에 완공되었다. 1920년 반 에트벨데 부인의 죽음으로 이 저택은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다.

오르타의 저택과 아틀리에는 오르타 자신의 전문가적 식견과 가족의 요구에 따라 건축했다. 이 건물은 부유층이 거주하는 도시의 두 구역에 1898년에서 1901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오르타는 부인과 이혼한 이후 잠시 동안 이 건물을 임대하였으나, 이후 테라스와 겨울 정원을 추가했으며 아틀리에를 확장하는 내부 개조를 한 이후 계속 거주했다. 건물의 앞면은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섬세하게 디자인된 금속 난간이 있다. 이 건물에서 가장 멋진 부분은 중앙 계단 위에 있는 거대한 유리로 되어 있는 천장이다. 1919년 이 건물은 메이저 헨리 핀트(Major Henri Pinte)에게 팔렸으며, 1926년에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961년에 생질 코뮌(Commune of Saint Gilles)이 오르타의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거주용 저택 부분을 구입하였다.

빅토르 오르타의 이 저택들은 건축 역사상 고전적인 전통과 모더니즘 운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는 개방 공간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장식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 본질적인 성질에 따라 재료를 사용하는 새로움을 창조하면서 당시 시대의 건축 개념에 있어서 혁명을 주도했다. 오르타 건물들은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을 위한 거주용 건축의 전통을 부활시켰으며, 거주적인 기능과 구상주의적인 기능을 아울러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오르타는 천재적인 능력으로 건축과 장식의 일관성 있는 일체감이 표현하였으며, 각 저택을 소유한 소유주의 성격을 반영하여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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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양근대건축사 산책(2) - 사회주의 이념이 건축으로…빅토르 오르타의 ‘민중의 집’(1895-1900)

 

강태웅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영국의 예술수공예운동은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건축 뿐 아니라 예술의 흐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92년 즈음에 시작해서 약 15여년의 생명을 유지한 아르누보 (Art Nouveau: New Art) 역시 예술수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은 하나다. 규범을 따르기보다 일상성의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내부의 기능과 재료의 솔직성을 드러내는 예술수공예운동의 태도와 함께 근대적 재료인 철에 주목한다. 거기다가 온건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부르주아 엘리트 집단의 전격적인 지지로 아르누보건축은 탄생했다.(아르누보라는 이름은 독일 출신의 아트 딜러 사무엘 빙(Samuel Bing,1838-1905)이 1895년 파리에 개장한 갤러리(Maison de l'Art Nouveau) 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당시에는 고유 명사라기보다는 새로운 흐름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였다. 유럽 나라별로 이 흐름을 지칭하는 명칭은 다양했다.)

 

▲ ⓒ강태웅
▲ ⓒ강태웅

건축역사 개설서에서 아르누보건축을 찾아 펼쳐보면 많은 책의 첫 장을 장식하는 사진이다.  브뤼셀(Brussels)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가 브뤼셀 자유 대학(Free University)의 교수인 에밀 타셀(Email Tassel)을 위해 설계한 타셀가옥(Tassel House, 1893-1894)의 계단실이다. ‘붉은 집’(Red House, 1859-60)이 영국수공예운동의 대표적 건물이라면 타셀가옥은 아르누보건축하면 항상 먼저 언급되는 건물이다. 이 계단실 사진은 소위 아르누보건축의 유기적 선형 미학을 잘 드러내 보이는 가장 아름다운 화각의 사진이기도하다. 그러나 테라스 하우스라 (terraced house)는 유럽도시주거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인해 파사드(facade)만 보이는 집의 외관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구불거리며 느끼한 패턴의 벽지와 계단의 난간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입면,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오르타 건축의 가치는 시각적 유희에만 있지 않다.

▲ ⓒ강태웅

강한 프랑스학계의 영향아래서 에꼴 드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건축교육을 받고 근 10년간 신고전주의 양식을 추구해 온 오르타가 사회주의 부르주아 엘리트 집단에 가입하고 그 후원 아래 처음 수주한 설계에서 갑작스런 시각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물론 타셀은 새로운 주거를 요구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소 평범한 듯 보이는 정면에 비해 내부에 구겨넣어진 공간의 켜는 평범하지 않다. 앞뒤로 두 개의 덩어리가 중요한 기능들을 수용하고 이 두 개의 덩어리는 위로부터 채광되는 밝은 볼륨(Volume, 채워져 있는 덩어리라는 의미가 더 강한 mass와 구별하기 바란다.)으로 연결되어 있다. 구불대는 선형의 패턴들이 표면으로 부터 튀어 나와 이 밝은 볼륨 속에서 빛과 어울리며 공간의 경계를 명확히 정의하고 있음과 동시에 공간을 인지하게 하는 중요한 매개요소로도 작동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브링크만(A. E. Brinckmann, 1881-?)의 공간 발생과 인지에 대한 이론이 구체화 되어 건축계에 등장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강태웅

타셀가옥이 아르누보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건물이라면 ‘민중의 집’(Masion du Peuple, 1895-1900)은 그야말로 아르누보 건축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타셀가옥’에서는 내재된 열정과 생각들을 내부에서 수줍게 드러냈다면 ‘민중의 집’에서는 확신을 갖고 대담하게 드러냈다고나 할까? 오르타가 1888년에 가입한 사회주의 노동당으로 부터 수주한 이 건물은 당시 귀족과 왕정에 대척점에 서 있었던 사회주의가 표방했던 투명성과 명징성 그리고 역동성을 건물의 외부와 내부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건물은 불규칙한 대지에 그대로 반응했고 그로인해 고전적 정면은 의미가 없어졌다. 벨기에의 전통적인 재료인 벽돌과 석재가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저렴해진 철과 유리를 통해 유기적으로 얽히고 있으며 입면은 철재 멀리온(mullion)시스템과 유리를 도입하여 극도의 투명성을 추구한 듯하다. 이러한 투명성으로 인해 건물의 프로그램(집회장, 사무실, 세미나실, 카페테리아)은 건물의 외피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어쩌면 예술수공예운동의 건축에서 보이는 내부 이야기의 솔직한 표출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건물에서 오르타는 보편적 생산 방식인 모듈의 개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이 건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집회장으로 들어가 보자. 집회장의 특성상 건물은 넓은 경간을 지탱해야 했다. 오르타는 중세 이 후 대규모 공간을 위해 많이 사용되어온 목재 외팔들보(Wooden Hammered Beam)를 철 구조물로 번안하였다. 철이라는 재료가 가진 물성을 십분 활용하여 아르누보건축의 선형 미학이 구축적 합리성을 통해 표출된 근대시기 구조설계의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정치적/사회적 패러다임은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부르주아 엘리트들에게 오르타의 이 모든 건축적 제스처는 그야말로 자신들의 이념을 구상화한 그야말로 민중의 전당이었을 것이다.

▲ ⓒ강태웅

그러나 1965년, ‘민중의 집’은 수많은 건축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후 되었다는 이유로 안타깝게 철거 됐고 20세기의 가장 의미심장한 건축적 범죄로 기록되고 있다. 와트킨(D. Watkin, 1941 - )에 의하면 집회장은 음향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며 그것의 위치상 활용도가 많이 떨어 졌다고 한다. 근대 시기에 철이라는 재료를 주요한 내외장재로 사용한 건물에서 항상 언급되는 내구/내화성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쉽게도 오르타는 짧은 진보적 행보를 마감하고 다시 보자르풍의 고전주의 건축(Beaux-Arts classicism)으로 회귀했다.

 강태웅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4.  김광우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

 

 

아르누보에 끼친 영국 디자인의 영향은 앙리 반 데 벨데와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가장 완벽한 아르누보의 초기 예는 유럽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가장 빨리 시작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한 벨기에의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의 작품이다.

그의 건물과 실내장식은 영국 디자인 개혁전통의 급진적인 정치이념이 신로코코 양식의 엘리트적 유미주의 그리고 건축에서 철강과 유리의 사용으로 가능해진 기술적 진보와 결합된 실용적인 예이기도 하다.

 

13세기 이전에 플랑드르 방직의 중심지로 운하로 북해와 연결되어 있어 외항기선의 출입이 가능한 겐트Gent(플라망어로는 헨트)에서 태어난 오르타는 파리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 부속 건축학교 재학 중에 이미 독보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뒤 공부를 계속하여 1881년에 브뤼셀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이 학교에서 존경받는 신고전주의 건축가 알퐁스 발라Alphonse Balat(1818-95)에게 사사했으며 그의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레오폴드 2세Leopold II(1835-1909)의 단골 건축가로 1874-76년에 라에켄Laeken에 지은 왕립 온실Royal Glasshouses의 둥근 지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의 이용에 뛰어난 발라는 창의적인 표현방식을 고안하여 강철과 유리를 재료로 혁신적인 구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에는 모리스, 애슈비, 비어즐리의 영향이 엿보인다.

발라는 반 데 벨데와 마찬가지로 재료와 구조의 성질에 충실한 조립에 의존하는 기능주의를 주창했다.

왕립 온실 건축이 오르타가 화려하게 디자인한 바론 반 에트벨데 백작Baron van Eetvelde(1852-1925)의 저택(1895-97)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르타가 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강과 유리 같은 재료의 건축적 가능성을 이용한 것은 건축물에 금속 요소를 많이 드러내 보인 벨기에 건축가 어네스트 헨드릭스Ernst Hendrickx(1844-92)의 조수로 일한 경력 때문이기도 하다.

 

오르타는 1890년에는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1893년에 성숙한 아르누보 최초의 건축적 표현으로 유명한 타셀 하우스Tassel House(1893-95)를 설계했다.

브뤼셀의 폴 에밀 얀스 가에 있는 자신의 주택 설계를 오르타에게 의뢰한 에밀 타셀Emile Tassel(1838-79)은 브뤼셀 대학의 도형기하학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애호가이자 전문가, 아마추어 사진작가, 일본 미술품 수집가였다.

오르타가 타셀을 만난 건 1893년 ‘자기완성, 관용, 그리고 계몽’을 교의로 프랑스 혁명 후 유럽에서 생긴 비밀결사 프리메이슨Freemason 집회에서였다.

타셀은 아마도 격조 높은 환경을 갖춘 주택을 원했던 것 같다.

타셀이 원한 것은 “학자와 미술가들만으로 구성된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독신자”의 집이었다고 오르타는 술회했다.

고객의 지적, 사회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타셀 하우스에서 노출된 철 구조물의 혁신적인 사용과 개방적 공간은 오르타 양식의 특징이 되었다.

집의 입구는 연철로 만든 곡선의 난간, 요동치듯 비틀린 벽면장식 그리고 선명한 색상의 모자이크 바닥으로 장식되었다.

방과 복도들은 눈에 띄지 않게 서로 통해 있다.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계단이며 철로 제작된 계단기둥은 식물을 모방해 만들어졌는데, 철제 난간은 물결치듯 흐르는 형태이며, 이런 형태는 벽의 덩굴무늬 그림과 바닥 모자이크의 덩굴무늬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나선형과 곡선은 아르누보의 주요 모티프로 영국의 맥머더 그리고 특히 삽화가 헤이우드 섬너Haywood Sumner와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다른 화가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오르타가 보여준 선의 형태는 벨기에 특유의 것이다.

그것은 이후 사람들이 ‘벨기에식 선’으로 명명한 긴장감 넘치고 추상화된 장식이다.

그러나 오르타의 장식미술에서 다른 아르누보 화가들처럼 식물의 잎이나 꽃이 아니라 기둥과 줄기였다.

그의 업적은 채찍선 같은 리듬을 지닌 전형적인 아르누보 곡선을 처음으로 공간과 구조로 변형시킨 데 있다.

1890년대 초 영국이 벨기에에 미친 영향은 실내장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응접실 장식에서 오르타는 애초에 구상했던 이집트 양식의 벽지를 버리고 반 데 벨데에게서 구입한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식당에는 찰스 프랜시스 앤슬리 보이지가 만들어 일레인Elaine이라고 명명한 또 다른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응접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한 의자 장식에는 리버티상사를 위해 제작된 수선화무늬가 있는 천을 사용했다.

역점을 둔 곳은 서재이고, 1층과 2층 사이에는 타셀의 사진작업을 위한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다.

타셀은 집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모임에서 사당 안쪽 벽면에 투사된 슬라이드를 이용해 강연을 하곤 했다.

손님용 욕실과 흡연실은 이런 모임을 위해 마련되었다.

 

타셀은 오르타가 브뤼셀 대학의 종합기술학부에서 조교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오르타는 대학에서 프랑스 건축가이자 건축보존위원으로서 건축물에 철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옹호한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르-뒤크의 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오르타는 타셀을 통해서 화학 콘체른Konzern의 대표인 발명가, 화학자 아르망 솔베이Armand Solvay를 알게 되었다.

1895년과 1900년 사이 고급스러운 루이즈 가에 솔베이 저택을 디자인했다.

아직은 조심스러웠던 타셀 저택의 외관과는 달리 여기서 건물 정면은 활 모양으로 구부러졌고, 측면의 돌출 창 부분도 궁형으로 튀어나왔다.

건물 배치부터 사소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내부는 다시금 서로 통하는 공간이라는 도식을 따랐다.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고 조정되었으며, 홀 안에서는 놀랍게도 부풀어 오른 공간이 캐러멜색, 금색, 살구색과 같은 많은 따스한 색조를 띤 채 방문객을 둘러싸게 된다.

 

브뤼셀에 있는 일련의 집들이 오르타의 명성을 증명하는데 그는 1894년과 1905년 사이에 자신의 집 외에도 다섯 명의 변호사를 위한 주택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주택은 변호사 외에도 정부 각료들을 위한 것으로 미적으로 진보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호화스럽기 때문에 오르타와 그의 많은 고객들이 속해 있던 벨기에 노동자당에 투표한 대중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브뤼셀의 많은 미술가들처럼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그는 1896년과 1899년 사이에 백화점, 사무실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당을 위해 다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강당을 건립했다.

1895년과 1899년 사이에 세워진 인민의 집Maison du Peuple 정면은 벨기에 최초로 철과 유리를 폭넓게 사용한 구조물이며 내부의 강당 지붕의 철골빔은 구조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장식적이었다.

이 건물은 1960년대에 아르누보를 경시한 택지개발업자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아르누보의 공적 표현은 상점과 백화점의 설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오르타는 동료 건축가 폴 세인트노이Paul Saintenoy(1862-1952)와 함께 아르누보 양식으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브뤼셀에서 가장 큰 두 백화점, 즉 폴 세인트노이가 1899년에 세운 올드 잉글랜드 백화점Old England Department Store의 유리 정면과 오르타가 1901년에 건립한 아 리노바시옹A L'Innovation으로 명명된 백화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 리노바시옹의 정면은 주위의 전통적 건물들에 반항하듯 볼록한 모습이다.

거대한 유리창은 외부에 벽돌의 필요성을 제거했으며, 보행자들이 내부에 진열된 많은 상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이 백화점들은 구매자들에게 오르타의 인민의 집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조명과 넓은 공간을 제공했다. 아 리노바시옹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오르타는 1903년에 다른 상점 그랑 바자 안스파크Grand Bazar Anspach를 설계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상점 양쪽에 늘어선 아파트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유리 정면을 없애고 위층에 벽돌을 올림으로써 어느 정도 소박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주출입문 위에 날개 모양의 유리덮개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적 느낌을 보탰다.

근대 재료인 철과 유리로 건축된 이 새로운 거대한 건축물은 쇼핑의 경험을 재규정했으며, 중류층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여가기회를 제공하고, 중하류층과 노동계층 여성들에게는 고용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각 층마다 상품들로 진열된 백화점들에는 화장실, 카페 그리고 심지어 미술화랑까지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여성들이 도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오르타는 1913년에 브뤼셀 미술협회 회장이 되고 후에 남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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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

김광우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 아르누보에 끼친 영국 디자인의 영향은 앙리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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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세기 말 변혁의 시대 ‘아르누보’ 건축양식…철과 유리, 화려한 장식의 심미적 건축

 

 

2015년 초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뜻하지 않은 전시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긴 머리카락과 늘어뜨린 옷 주름, 그리고 화려한 꽃과 식물의 덩굴 속에 둘러싸여 몽환적이기까지 한 여인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아르누보(Art Nouveau)’ 회화양식의 창시자 알폰스 무어(Alphonse Mucha)의 작품 전시였다.

▶세기 말 새로운 양식에 대한 변혁의 욕구

아르누보양식이 탄생한 19세기 말은 새로운 양식에 대한 변혁의 욕구가 거센 전형적인 세기말의 시대였다. 기존 질서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탈 전통운동이 일어났고, 부르주아라는 신흥 중산층이 이를 이끌었다. 이들은 문화전반에 거친 변혁을 주도했으며 근대건축운동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초기 근대건축운동은 다양한 양식이 있었는데 신건축, 신예술, 모던스타일 등으로 불렸다. 아르누보는 이런 다양한 양식을 대표하며 세기말적 고민과 미래를 향한 변화와 혁신의 상반된 시대 상황을 투영하며 탄생했다. 탈 전통의 선두에 선 개혁운동으로 19세기 말 가장 대표적인 통일된 예술양식이었다.

또한 20세기의 변화에 대한 욕구와 19세기의 전통에 대한 미련이 혼재하는 시기에 이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투영하며 새로운 변혁의 욕구를 기반으로 모더니즘을 해석하려는 정신운동이었다. 아르누보의 양식적 기원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 있었다. 미술공예운동을 처음 촉발한 사람은 영국의 월리엄 모리스였고 조류를 주도한 대표자는 벨기에의 알리 반 델 벨데이다. 영국인들은 공예품을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었고 당시를 풍미하던 시대에 뒤떨어진 과장된 복고 양식들에서 등을 돌렸다.

아르누보는 산업화로 인해 시대의 주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의 신분과 부의 위상을 과시하는 새로운 문화 예술적 표현양식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후원을 받으며 20세기 전후(1890-1905)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확산됐다. 아르누보 양식은 장식, 미술, 건축을 중심으로 시작해 회화, 조각, 일상의 거의 모든 물품에까지 다양하게 전개됐다. 이들은 덩굴식물, 백합, 이국적인 꽃, 물결과 노니는 백조, 머릿결 휘날리는 여인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유려하고 우아한 선과 파상(波狀)·곡선 ·당초무늬(唐草文) 또는 화염(火焰)무늬와 같은 흐르는 듯한 생동감 있는 선형적 표현과 같은 힘과 생명력에 충만한 선에 그 장식적 가치를 두었다.

하지만 아르누보는 유미주의 및 상징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지만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미적 감각을 추구하려는 애초 의도는 아쉽게도 사회적 경제적 제약들과 장식 과잉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또한 아르누보가 추구하는 수준 높은 생산물은 대량생산의 어려움 등으로 대중화를 어렵게 했다. 이것은 아르누보가 비교적 단명하게 끝난 이유이기도 하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르누보는 20세기 모더니즘 양식의 새로운 길을 여는 역할을 하며 신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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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son Coilliot, Alphonse_Mucha - Zodiac
 
▶아르누보의 기원-메종 드 아르누보

유럽 각지의 예술 중심지에서 일어난 아르누보는 광범위하게 건축, 공예, 조각, 미술 등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라마다 그 나라의 성격에 맞게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다.

메종 드 아르누보(Maison de l’Art Nou veau, House of New Art)라는 이름은 1895년 파리의 독일 예술품 판매상인 사무엘 빙이 연 갤러리의 이름이다. 그의 갤러리는 현대 가구, 태피스트리, 예술 작품들을 보여주었던 1900년 만국 박람회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아르누보라는 이름은 박람회 이후에 그의 갤러리에서 제공했던 새로운 스타일에 대해 갤러리 이름과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되었던 용어인 ‘아르누보’라는 단어와 깊게 관련짓게 된다. 아르누보라는 이름은 독일 권에서는 뭔헨에서 발행하는 유켄트라는 잡지가 이 스타일을 전파하면서 여기서 유래가 되어 유켄트슈틸(Jugendstil)로, 오스트리아 빈의 분리파 예술가들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전역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주며 세제션(Sec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 리바티(Stile Liberty) 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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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ro station entrance Paris
 
▶대도시 바꾼 아르누보 건축

건축에서 ‘아르누보’란 말은 처음에는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의 에펠탑과 기계관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새로운 예술’이란 의미를 갖는 아르누보란 말은 그 당시의 새로운 재료인 철재를 이용 거대한 탑의 높이와 기계관의 대공간 등 첨단 테크놀로지를 구현해 그 모습을 드러낸 에펠탑과 기계관을 지칭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말이었다. 1893년에 본격적인 아르누보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오르타의 타셀하우스가 지어지고 월리엄 모리스가 신재료에 의한 장식운동을 통칭하여 ‘아르누보’로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흥 부르주아는 건축적으로는 철과 유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철과 유리가 혼용된 건축은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으며 이러한 건물은 거대한 건축물이 마치 무게가 없는 듯이 보이게 했다. 아르누보 건축의 본질적인 규정요소는 장식, 즉 선형의 유기적인 새로운 형태의 장식으로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기하학적인 장식형태나 양식화된 선이 그 특색이다. 공간구성보다 면의 장식에 치중했다. 아르누보 양식의 철물장식은 귀족계층과 구별되는 신흥부르주아의 상업미학을 대표하는 대중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르누보 건축의 흐름을 주도한 중심지는 스코틀랜드와 벨기에, 프랑스의 파리와 낭시, 독일의 뮌헨과 다름슈타트, 오스트리아의 빈이었다.

 


아르누보 건축의 본질적인 규정요소인 장식만을 입힌 특색을 넘어서는 건축물, 이것들과 구별되는 골조 및 새로운 재료를 대표해주는 모던하며 순수한 아르누보 건축물들은 주로 이들 대도시에 지어졌다.

아르누보 건축물들은 ‘요제프 마리아 올리브히’의 <빈분리파 건물>과 ‘빅토르 오르타’의 <솔베이 호텔>, <타셀가옥>, <시민회관 극장>, <아 이노바시옹 백화점>, ‘찰스 레니 맥킨토시’의 <글레스고 예술학교> 등이며, 아르누보 건축의 창시자라 불리는 ‘앙리 반 데밸데’의 <블레멘 베르프 가옥>, <호엔 호프>, <폴크방 미술관 로비> 등이 있다. 또한 시대를 넘어서는 건축적 가치와 정신을 실현한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을 들 수가 있다. 아르누보 건축은 20세기 초 철골과 콘크리트에 의한 새로운 구조공법이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면서 소멸된다.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은 부동산 개발을 활성화시키며 구조적 효율성과 경제성이 근대 건축의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르누보의 장식적 성격은 물리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엔지니어링 건축의 거센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빠르게 변화하는 공업화에 부합되기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오면서 엔지니어링 제일주의가, 심미적 가치를 추구하던 아르누보 건축을 보수적인 건축으로 만들며 아르누보 건축은 실패로 끝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아르누보 건축의 뿌리인 장식적인 차원과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철, 유리, 콘크리트의 재료적인 특성을 살린 건축물은 세기 말 고전주의가 무너지는 혼란기에 새로운 안정적인 건축 질서를 보여주며, 고전과 모더니즘을 연결하는 신건축이었다.

이러한 재료적 특성을 예술과 산업의 협력으로 이끈 양식은 나중에 새로운 생산방식에 어울리는 디자인 방식의 적용과 공업화를 추구하는 바우하우스로 이어지게 된다. 바우하우스는 산업계와 연결하는 건축을 주축으로 예술과 기술을 접목시키며 교육하는 학교로 아직까지도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르누보 양식의 주요 건축가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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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오르타
 
아르누보 건축은 벨기에에서 상당히 발달했다. 벨기에의 아르누보 건축을 주도한 대표적인 건축가라 할 수 있는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는 벨기에의 부르주아 그룹의 후원을 받으며 1890년대 일련의 주택들을 설계한다. 오르타를 후원한 벨기에의 인테리전트한 부르주아는 ‘아미 필란트로프-박애주의자들의 모임’이라는 그룹이었다. 대부분의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그 그룹의 일원들에게서 수주해 1892년 오르타는 <타셀주택>의 설계를 통해 아르누보의 건축의 창시자로 전 유럽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된다. 오르타는 복잡한 양식의 혼재 속에서 한 가지 통일된 주제로 철을 주거용 건축에 많이 사용하였다. 철골구조와 유리창문은 그의 순수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나이 32세 때 설계한 타셀 주택은 건물의 외관보다 실내로 들어가면 그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을 볼 수 있는데 현관홀과 계단실의 철을 이용한 화려한 장식적인 표현이 완결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대표작으로 곡면을 유리와 철을 사용해 풍부한 아르누보의 장식을 화사드에 사용한 브뤼셀의 솔베이 부부를 위해 설계한 솔베이 저택(Solvay House)이란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공간 분할과 배치, 재료들의 값비싼 소재들,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과 외국산 목재, 금속, 호화로운 마감재, 채색, 광택제의 실내장식은 성의 내부를 방불케 했다. 그의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집회장의 철골 골조를 흐르는 듯한 곡선을 사용해 장식적으로 처리한 사회당의 브뤼셀 본부인 인민의 집(1898) 등이 있다.

프랑스에서 아르누보 건축은 그다지 번창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는 하나의 통일된 건축적 양식을 지향하기엔 너무나 많은 건축적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다원적인 프랑스 건축의 경향 중 아르누보 건축의 경향을 보인 대표적 건축가를 보면 헥토르 귀이마르를 들 수 있다.

귀이마르의 대표적 작품인 카스텔 베란제(Caste Beranger)는 파리에 세워진 집합주택으로 추상적인 형태에 의한 흐르는 듯한 곡선의 금속세공으로 된 문, 장식된 테라코타의 패널과 석재로 조각한 개구부, 스테인드글라스에 의한 풍부한 공간 구성은 환상적이며 아름답다.

그러나 귀이마르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1900년 프랑스의 만국박람회 개최 시기에 맞추어 개통된 파리 지하철 역사의 샘플 설계를 맡은 것이 계기가 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14년 동안 무려 140개의 파리 지하철 역사를 설계한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너무나 유명한 스페인의 대표적 건축가다. 그는 아르누보 건축의 대변자이기보다 아르누보 정신의 대변자로 그 양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축가다. 그의 건축물은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곡선과 창조적인 자연을 닮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세하고 강렬한 색상의 장식이 주를 이루며 건물의 난간이나 문에 금속성의 장식을 많이 사용했다.

가우디의 건축적 특징은 자유롭고 선적인 흐르는 듯한 형태를 3차원의 표현적인 건축형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철제 장식이라고 믿기 어려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격자무늬 곡선의 조화. 카사밀라의 테라스 장식을 보면 바위 위의 해초 같은 형태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철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장식을 이루고 있다.

[김종우 한미글로벌 부장]

출처 - 매일경제 Luxmen 제60호 (2015년 09월) 기사

 

 

 

 

 

 

 

 

 

 

 

세기를 거슬러 떠나보는 유로 건축 여행 20

 

(1) 벨기에가 나은 아르누보의 거장 빅토르 호르타와 그의 뮤지엄

파리를 상징하는 공공건축물과 시설물들 중에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20세기 초에 철과 유리로 수려하게 디자인된 유명한 메트로 스테이션 입구가 있다. 화려한 곡선과 장식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뤘던 예술 사조, 아르누보를 대표했던 프랑스 건축가 헥터 기마드 (Hectar Guimard)가 디자인한 공공시설물로 그에게 유명세를 안겼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바로 당시 벨기에 출신 건축가 빅토르 호르타 (Victor Horta)였는데 브뤄셀를 여행하던 헥터는 빅토르가 지리학 교수였던 에밀 타셀을 위해 설계한 현재의 타셀 호텔을 보고 아르누보 스타일에 푹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1894년에 지어진 타셀 호텔은 매혹적인 색채와 곡선으로 처리한 호텔 입구와 주 계단이 장관인 아르누보 건축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빅토르 호르타는 벨기에 겐트에 있는 아트스쿨에서 건축 공부를 마치고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파리 몽마르트의 한 건축가 사무실에서 실무를 시작하며 철과 유리를 이용한 디자인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많지는 않지만 그의 건물들을 살펴보면 실내에 대부분 절정을 이루는 공간에서는 주물로 뜬 우아한 곡선과 색채를 입은 불투명한 유리들이 사용되어 있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벨기에 대광장에서 남쪽으로 1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호르타 뮤지엄은 1901년에 빅토르 자신의 거처와 스튜디오로 지은 건물이었다. 아르누보 건축가들에게 건물 파사드는 일종의 미술품으로 간주된다. 일반적으론 미술가들과 장인들을 참여시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이는데 호르타 뮤지엄 입면은 의외로 절제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내면을 더 우아하게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 절제가 아니었을까 혼자 상상해본다.

 

 

 

황동판에 호르타 뮤지엄이라 새겨있는 문을 열고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목재 바닥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그리고 이런 나무 물결은 내부 깊숙이까지 이어진다. 입구 주변에 설치된 옷걸이, 거울 하나하나가 전형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이다. 램프, 문 프레임, 창문 프레임 등 어디 하나 미니멀한 구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리석이 깔린 계단실에 들어서면 한 겨울에는 냉한 기분이 들까 걱정도 되지만 카펫 덮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집 주인의 포근한 배려가 느껴진다. 빅토르가 지인을 제일 꼭대기 층에 위치한 게스트 룸으로 안내하기 위해 이 계단을 앞장 서 올랐을 것이다.

 

이 박물관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본래 빅토르 자신의 일상과 업무를 위해 기능적으로 디자인, 치장된 하우스 겸 스튜디오였다. 침실 벽에 붙박이 형식으로 소변기를 달아 놓은 것만 봐도 얼마나 철저히 기능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천창을 받들고 있는 벽은 금빛이며 꽃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나뭇가지 모양을 한 금빛 기둥 위에 걸 터 앉은 듯 한 램프들의 화려한 뒤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계단실 상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보이는 광경은 금빛에서 차츰 파스텔 톤의 녹색과 핑크 빛의 분위기로 전환되고 중간 중간 보이는 문의 경첩, 손잡이들은 모두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 되어 있다. 빅토르는 집안의 벽시계까지 디자인 할 정도로 이 곳에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던 만큼 그의 타고난 예술적 능력과 공간적 철학을 한눈에 보고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브뤄셀은 EU의 홈이라는 사실 외에는 딱히 알려진 게 없다. 그래서 더더욱 브뤄셀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꼭 한 번 빅토르의 건물들을 들러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인터넷에 떠 다니는 빅토르의 건물 이미지들은 저작권의 이유로 그 수와 질에 한계가 있고 그리고 호텔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있기에 직접 눈도장을 찍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박치원

RIBA, ARB (
영국 왕립 건축사)
SMAL AND PARTNERS (
도시 및 건축 설계 파트너쉽) 대표
뉴카슬 대학 건축 디자인 디플로마 튜터
www.smalandpartners.com
cpark@smalandpartner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