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가창면 운흥사
사명대사가 승군을 훈련시켰다는 운흥사는 호국사찰이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오리 최정산에 자리한 운흥사(雲興寺)는
신라 흥덕왕(興德王)때 승려 운수가 창건하여 동림사(棟林寺)라 불렸다고 구전되고 있다.
창건 당시의 위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산 정상부에 자리했다고 전해진다.
절이 3개 군의 경계에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자
당시 주지가 절을 조용한 곳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한 노인이 나타나
절 앞의 연못을 메우면 된다고 했다.
이에 연못을 메우니 신도들이 하나도 오지 않아
절을 곡산(谷山)으로 옮겨 수암사(燧巖寺)라 이름했다.
그러나 역시 신도가 없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절 이름을 운흥사로 바꿨더니
번창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운흥사에서
승병 300여 명을 지휘하여 왜적을 격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비슬산은 승병들의 최대 훈련장이었고 사명대사는 이곳 용연사에 기거하며
승군을 지휘했다.
그 당시 청도를 점령한 왜군들이 팔조령을 통해서 대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순찰사 이용순이 병사를 거느리고 팔조령으로 향했다.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들도 뒤를 따랐다.
왜군이 팔조령에 나타나자 겁에 질린 순찰사 이용순이 활과 창을 버리고
말등에 채찍을 가하면서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사명대사는 휘하의 승군을 냉천(가창면)의 절벽 위에 매복하는 등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왜군을 섬멸시켰다.
사명대사가 이끈 수십 명의 병사들이 수백 명의 왜군을 물리친 이른바
'냉천승첩'이 구전되고 있다.
운흥사는 1620년(광해군 12)에 무념 대사(無念大師)가 중창했고,
1757년(영조 33)에 치화 대사(致和大師)가 중건하였다.
이 무렵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대구부(大邱府) 불우(佛宇) 조에 '최정산운흥사'가 실려 있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운흥사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보물 제1814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시대의 목조 불상 3구로 수조각승 도우(道祐)와
보조 조각승 경옥(敬玉), 경신(敬愼), 응택(應澤), 옥순(玉淳) 등이 1653년에
운흥사의 전신인 최정산 수암사의 불상으로 조성했다.
불상의 조성 시기와 제작자는
아미타여래상 내부에서 나온 조성발원문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본존불의 대좌에 나무를 벌목(伐木)한 시점부터 완성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묵서가 남아있어 제작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정형적인 산지 가람이면서도
산지 중정식 가람 배치와는 그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종무소와 요사채가 대향하고 있다.
대웅전 배면에 삼성각이 배치된 'ㄷ' 자형 배치이며
근년에 전면 축대와 육각정(六角亭)을 건립하여 전반적으로 옛 모습이 많이 상실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의 건물로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계(多包系) 양식을 지니고 있다.
살미의 모양은 앙서[仰舌: 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받침]형으로 끝부분이 비스듬히 자른 것으로
조선 후기의 수법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데
여기서는 독특하게 아미타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불(挾侍佛부처를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불)로 하고 있다.
(이상 글 출처 :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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