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유교건축
도동서원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에 있다. 현풍에서 구지면사무소를 지나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약 4㎞쯤 가면
닿는 곳이다.
도동서원은 원래 1568년(선조 1)에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건립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
(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고,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는데,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東來]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동서원은 앞으로 낙동강을 굽어보는 작은 구릉 위에 동북향을 하여 자리잡았다. 서원 앞에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 뒤로 자연 지세에 어우러지며 서원이 조성되었다.
도동서원이 건립된 현풍 땅과 김굉필이 관계를 맺게 된 연유는 증조부 김중곤이 현풍 곽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현풍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성장기를 현풍면 대니산 남쪽 솔례촌에서 보낸 한훤당은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18세 때 합천군
야로에 있는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 근처 계곡에 '한훤당'이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이때 인근에 위치한 함양에 군수로 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수제자가 되어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정몽주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잇게 된다.
김굉필은 2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지목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후에 전라도 순천에 이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약을 받았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명예를 회복하였다.
도동서원은 대니산의 한줄기가 서북으로 뻗어내린 끝자락의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낙동강 건너
고령 땅 개진들이 넓게 펼쳐진 곳이다. 서원 앞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그 뒤로 비교적
경사가 급한 지형을 따라 서원이 조성되어 있다.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반듯하게 설정한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심축에는 이를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통로와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 구성과 배치 형식은 우리나라 서원건축 중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 구성도 우수하다. 특히 1600년대에 건립된 강당과 사당 등 건물들은 당시 서원과 사묘건축을 대표할 만큼 매우 훌륭한 짜임새와 수법을 보이고 있고,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들도 우수하여 이들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루인 수월루는 공부하던 유생들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던 곳으로, 1888년(고종 25)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3년에 중건되었다. 물 위에 비친 달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뜻을 가진 수월루의 건축적 품격은 서원 내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난간을 두른 2층 누마루에 오르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서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서원 정문인 환주문은 맞담에 세운 규모가 작은 문으로서 사모지붕이다. '환주(喚主)'는 '내 심성의 주(主)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뜻을 가졌다.
수월루 뒤에는 서원 정문인 환주문이 있고, 그 뒤로 강당인 중정당 앞 마당에 닿는다.
중정당은 강당 건물로,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금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용의 상태를
말한다. 중정당 기단은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이 빈틈없이 서로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 용두석을 배치하고, 기단 윗부분에는 크기가 다른 꽃송이가 좌우에 나란히 조각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인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가 대칭을 이루며 마주보고 있다. 강당 왼쪽인 북쪽으로는 생단이 있는데, 향사 전날 제관들이 제수로 쓸 생(牲)을 올려놓고 품평을 하는 장소이다.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담으로 두른 일곽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김굉필을 주벽으로 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되기를 원하는 김굉필의 도학정신을 표현한 벽화 두 점이 있다. 제향 후에 축문을 태우는 망례위는 일반적으로 석물로 지상에 조성되는데, 도동서원의 경우는 사당 서편 담에 작은 구덩이처럼 생긴 감(坎)이 설치되어 있다.
[이상 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도동서원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11. 30., 이상해)
[이호신 화백의 세계유산 순례]
- 도가 동쪽으로 온 의미를 받아들인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 -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엄격한 도학자(道學者)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기념하여 창건되었다.
그는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연산군의 사약을 달게 받은 전형적인 사림(士林)이다. 창건주는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영남학파 예론(禮論)의 최고봉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였다. 그 인물에 그 건축이랄까?
-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3> ‘성리학의 건축적 담론, 도동서원’중에서
도동서원을 한마디로 말할 때 ‘그 인물에 그 건축’이란 의미가 특별하다. 김굉필(진외증조부)을 기리기 위해 생애를 다한
정구(외증손)의 노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달마(達磨)가 동쪽으로 와 선종(禪宗)이 파급되고 선승들이
사찰의 창건주가 되었다면, 도(道)가 동쪽으로 온 의미를 적극 반입한 서원이 도동서원이다.
그 안목을 지닌 창건주 정구의 작품(건축)을 만나러 다시 왔다.
급경사를 이룬 산자락에 자리한 서원
지난 2008년 <내일신문> 5대강 특집인 <강에서 띄우는 그림편지> 연재로 낙동강을 따라 현풍에서 다람재에 올라
화첩을 펼친 기억이 아마득하다. 그 전망대에 올라 대니산(戴尼山)에 둥지를 튼 도동서원이 바라보는 낙동강은 유장하고 가을빛에 젖은 풍광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곳에 세워진 김광필의 시비(詩碑) ‘노방송(路傍松) - 길가의 소나무’를 만나며
선비의 심회를 떠올렸다.
한그루 늙은 소나무가 길의 먼지를 견디며 一老蒼髯任路塵 [일로창염임로진]
지쳐 고달픈 오가는 손님 맞이하고 보내네 勞勞迎送往來賓 [노로영송왕래빈]
겨울 추위에도 너 같이 하나로 섬기는 마음 歲寒與汝同心事 [세한여여동심사]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는가 經過人中見幾人 [경과인중견기인]
오늘은 세계유산등재에 기여한 김수영(金守永) 유사(有司, 김광필의 18세 손)를 만나 다람재에 오른다.
전경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크게 변한 풍광은 아니되 산 아래로 터널이 생겨 고갯길은 이제 사이클 동호인들이
즐기는 코스이다. 터널이름은 김유사가 ‘도동서원터널’로 요청하여 승인된 것이라 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자리한 서원은 애초(1568) 현풍현 비슬산에 사우(祠宇)를 짓고 향사(享祀)를 지내며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불렸으나 1597년 왜란(倭亂)으로 불탔다. 그 후 이곳으로 옮겨 2년간(1604~1605) 서원건축을
재건, 보로동서원으로 부르다가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령(賜額令)을 받았다. 그리고 3년 후(1610) 사액현판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건축 배치의 정형’으로 불리는 도동서원의 입지는 풍수적 해석이 각별하다. 낙동강 너머에서 바라보면
대니산(공자가 살던 곳의 지명에서 유래) 건너 동남쪽의 다람재는 마치 거북이 형상이다.
그리고 마주한 강가의 작은 산은 개구리산(절두산)으로 불린다. 그 산 앞에 선덤(立石)이 있으니 거북이가 물길을 향해
이 바위를 바라보는 형국이다. 신령스런 거북이 강으로 내려오는 입지에 북향을 바라보며 서원이 자리했다.
사적으로 지정된 9개 서원중 산자락에 가장 급경사를 이룬 곳이다.
이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는 것은 입구의 은행나무이다. 일명 ‘환원당 은행나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심은 이는 정구이니
‘한강 은행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김유사가 말하니 나 역시 공감이다. 거대한 은행나무를 사생하며 느끼는 감회는 도동서원의 상징이자 지킴이다. 서원 전체를 아우르는 기운과 정신이 녹아있다는 생각이다. 낙동강과 서원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로 도산서원 앞마당의 왕버드나무도 떠오른다.
은행나무 주변의 비각(신도비)과 비석들을 살펴보고 수월루(水月樓)로 오른다. 이 누각의 뜻은 ‘차가운 강을 비추는
달(寒水照月)’이다. 그런대 이 누각이 첫 관문인 환주문(喚主門)에서 바라보는 강의 시야를 가린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수월루 상량문(이원조 지음, 1849)에는 “서원 앞 차가운 강물이 비치는 달처럼 밝게 빛나고, 안개 낀 달밤에는 작은 배를
타고 노닐며 무이도가(武夷悼歌)를 부를 수 있으니 선비들의 마음은 밝은 달과도 신령스럽게 통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김굉필의 시 ‘배위에서 - 선상(船上)’이 전해져 강과 달의 의미를 더한다.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 船如天上坐 [선여천상좌]
거울 속에 노는 듯 漁似鏡中游 [어사경중유]
술 마신 후에 거문고 끼고 배 가는데 飮罷携琴去 [음파휴금거]
강 한가운데 달빛이 배 가득 찼네 江心月一舟 [강심월일주]
건축과 조경이 만들어낸 미학을 보다
갓을 쓴 선비(환주문)가 양팔 소매(담장)를 드리운 듯한 환주문은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으로 불린다. 좁은 계단과
좁은 문은 겸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계단 돌부리의 앙증한 정지석은 한 번 더 정숙을 요구하고 조각돌은
연꽃문양으로 피어난다. 추녀 밑 모서리 네 곳의 목조각도 연꽃이다. 지붕에는 항아리로 씌워 빗물을 막게 했다.
절병통(節甁捅)으로 부르는 이 조형물이 미감을 더한다.
이 문에서 바라보이는 시야가 서원의 상징이자 압권이다. 강학공간으로 동재 거의재(居仁齋), 서재 거인재(居仁齋)를
거느린 중정당(中正堂)의 엄숙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부에 걸린 도동서원, 중정당의 편액 아래로 마루문이 열리고
그 뒤로 사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펼쳐진다. 한 곳으로 동선이 집약되어 몰입하게 한다.
도동서원(道東書院) 편액은 두 개로 강당 앞 처마 밑은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했고, 강당 안 중정당 위의 것은
배대유(裵大維, 1563~1632) 것으로 알려진다. 중정당의 여섯 기둥 위에는 흰 띠인 상지(上紙)로 둘렸는데 서원 중
유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단석의 아름다움과 사연은 감동이다. 기단석의 형태와 색이 모두 다른 것은 건축 당시
각 지역의 유림들이 가져 온 돌로 이루어져서라고 한다.
부석사의 석벽이 장엄하다면 이 조각보 같은 돌들의 구성과 짜임은 상생의 조화이다. 이 지극한 성심이 빚어낸 기단석에는 용머리 조각이 4개, 연꽃문양과 다람쥐형상이 새겨진 것도 2개나 발견된다. 좌우의 다람쥐는 방향이 반대이니 오르내림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 중정당 마루에서 돌아보자 하늘아래 무한강산이 펼쳐진다. 수월루, 환주문이 일직선이요, 양편으로 동, 서재가 대칭으로 다가온다. 마당에는 일체의 조경을 삼가해 텅 빈 충만이다. 해서 눈길은 자연 환주문 담장에 꽂힌다. 돌과 흙 그리고 기와를 이용한 이 담장의 아름다움은 형용이 어렵다.
하지만 이곳 담장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된 이유를 헤아릴만하다. 막돌 위 진흙벽에 암기와가 수평의 띠로 늘어서고
간간히 둥근 수막새가 별처럼 액센트를 주었다. 그 담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조형은 담장 미학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제 내삼문(內三門) 계단을 걸어 사당(祠堂)에 오르는 두 개의 길. 계단 입구의 꽃 봉우리, 만자(卍字) 음각과 일명
해태상으로 불리는 조각이 있는 길은 신주(神主)를 모시는 길이다. 또 하나는 내방객의 출입인데 내삼문은
동입동출(東入東出)이다. 마당의 석등과 담장에 뚫린 축문을 태우는 감(坎)을 살피고 사당에 참배한다.
정면에는 환훤당, 오른쪽에는 한강의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양 편의 벽화는 앞서 소개한 두 시편의 내용과 상응하다.
‘설로장송(雪路長松)’이 노방송(길 위의 소나무)이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가 선상(배위에서)의 시정(詩情)으로
간취된다.
사당 협문를 지나 증반소(蒸飯所, 제사음식 만드는곳)와 전사청(典祀廳, 서원 일을 돕는 숙식 장소) 그리고 곡간채, 문간채로 나와 유물전시관을 둘러본다. 별도로 부대시설인 장판각(藏板閣)과 수로에서 올려다보는 담장과 배롱나무 꽃은 또 다른 아취다. 건축과 조경이 행복한 풍광을 자아낸다.
날이 저물어 김수영 유사댁에 하룻밤 신세를 지니 관수정(觀水亭)이다. 예전 선대가 머물던 곳의 현판을 옮겨단 집은
아늑하고 차경(借景)이 뛰어나다. 꿈을 꾸듯 달빛이 푸른 밤을 노닐다 이튿날은 대니산으로 오른다. 서원 주변은 거반
장송들이 늠름하여 서원을 보호하는 느낌이다. 돌아 본 서원과 소나무, 그리고 강산은 어젯밤 달빛에 그려 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환훤당 산소를 향해 오르는 길목, 선인들의 자취와 영혼이 서린 길에서 나그네의 심회는 아득하기만 하다. 그 산길에서
모두 여섯 기의 산소(산 아래로부터 정경부인 순천박씨 묘, 한훤당의 묘, 손자의 묘, 그리고 셋째 딸과 넷째 아들 부부의 묘)를 만났다. 귀한 인연에 모두 참배하고 산을 내려왔다.
길 떠나기 전, 다시 무성한 은행나무에 깃든다.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우러르니 뭉게구름 속에 두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인물에 그 건축을 이룩한 이름은 한훤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이다. 세대를 초월한 두 강물이 만나 오늘에 이르고
미래를 향해 흐르고 있다.
(이상 글 출처 : 여행스케치 - 이호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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