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가보니…"아방궁은 무슨…소박하다" ]
일명 '지붕 낮은 집'…채광·통풍 좋지만, 주거용으론 불편
사저 관람객 "아방궁이라 해서 화려할 줄 알았는데 간결해 소박해"
(글 출처 : 김해=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2008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 귀향 당시
보수층으로부터 '아방궁' 논란을 일으켰던 노 전 대통령의 사저는 어떤 모습일까.
노무현 재단이 1일 일반에 개방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사저는
아방궁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형태라는 소감이 대다수였다.
일반 개방에 앞서 재단 관계자 안내로 취재진에게 모습을 드러낸 사저는
'소문'과는 달리 아담하고 소박했다.
사저는 자연의 품에서 인간의 삶이 이어져야 한다는 노 전 대통령의 뜻이 반영돼
낮게 지어져 일명 '지붕 낮은 집'으로 불렀다고 재단은 소개했다.
고(故)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사저는
대지면적 1천290평에 건축면적 182평 규모다.
건축면적 중 사저동은 112평, 경호동이 70평 정도다.
이날 공개된 곳은 국가소유인 경호동을 뺀 사저동이다.
사저 입구 경비 초소에서 대문까지 길이 50여m의 좁은 콘크리트 길을 지나
대문으로 들어서자 지하차고가 먼저 보였다.
차고에는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취임하기까지 3개월 정도 사용한
체어맨 승용차와 유모차 형태의 자전거, 소형 굴착기 등이 세워져 있었다.
현관문을 지나쳐 정원으로 우회하니 여러 가지 정원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높이 2.5m 정도의 산딸나무는 사저에서 유일하게 표지석이 있는 나무다.
제주 4·3 유족회가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4·3 제주민중항쟁이 재조명된 데 대한
고마움으로 제주에서 보낸 나무라고 재단은 소개했다.
사저 중 먼저 사랑채로 들어섰다.
사랑채는 노 전 대통령이 손님을 맞이하고 가족이나 보좌진과 함께 식사했던 장소다.
정남향으로 지어져 인공조명 없이도 밝고 봉화산과 들녘을 풍경처럼 볼 수 있는
커다란 창이 설치된 점이 특징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창으로 봉화산을 보거나 자신이 토굴을 짓고 공부했던
삼각형 모양의 과수원을 풍경화처럼 감상했다고 재단 관계자는 전했다.
퇴임 이후인 2009년 봄에는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을 앞두고
바깥출입을 자제하면서 힘들 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랑채는 18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중앙에 자리 잡은 것을 빼면 단출하다.
신영복 선생이 쓴 '사람사는 세상' 표구와 노 전 대통령 취임식 장면을 담은 대형 액자,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 뜰에서 손녀와 다정한 한때를 담은 조그만 액자가 취재진을 맞았다.
이 손녀가 사람사는 세상 표구 아래에 한 낙서도 그대로 뒀다.
취임식 액자는 취임식장에 초대받지 못한 해외교포가
근처 높은 빌딩에서 촬영한 취임식 장면을 노 전 대통령 퇴임 이후에
보낸 것이다.
사랑채 맞은편에는 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재단 관계자가 식당이라고 소개했지만, 식당보다는 주방이라고 해야 할 규모였다.
일반 가정에도 있을법한 크기인 옥색 상판의 4인용 식탁과 전기밥솥,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정수기 등 주방가구와 다양한 식기가 찬장에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재단은 노 전 대통령 내외와 가족끼리 식사할 때만 이곳을 사용했다고 한다.
주방 창에는 손녀 서은양이 핑크빛이 나는 유리 펜으로
권양숙 여사를 지칭한 듯한 '할머니 사랑해요'라는 낙서 아닌 낙서를 새겨 놓았다.
사랑채 건물을 나와 안채를 둘러봤다.
사저 중 노 전 대통령 내외의 유일한 개인생활 공간이다.
소박한 침대가 있는 침실을 제외하면 TV와 책상, 컴퓨터가 있는 거실이 개인 공간인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자료조사와 글쓰기용으로 각각 활용하던 컴퓨터 2대는
서거하기 직전 마지막 글이 쓰여졌다.
컴퓨터 옆에는 생전 노 전 대통령이 착용하던 안경과
책상 한쪽에는 '한국의 늪', '재미있는 꽃이야기' 등 생전에 읽은 책이 놓여 있었다.
안채를 뒤로하고 옆으로 옮기니 서재가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이 독서나 집필, 퇴임 후 보좌진과 민주주의, 진보의 미래 등을 토론했던 곳이다.
서재에는 노 전 대통령의 방대한 독서량을 추정할 수 있는 1천여권의 책이 여전히 꽂혀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업무를 보다가도 봉하마을을 방문한 시민이
'대통령님 나와 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리면 한두 차례 나가서 이야기하다가
하루에 많을 때는 13차례나 나갈 정도로 시민과 소통했다고 재단 관계자는 말했다.
서재 옆에는 노 전 대통령이 시민과 만날 때 쓴 밀짚모자가 옷걸이에,
서재 옆 벽면에는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취임선서 액자가 걸려 있다.
사각형 한옥 구조로 이뤄진 사랑채와 안채, 경호동 중간에는
지붕이 없는 마당 '중정'이 있다.
중정을 중심으로 한 사저는 채광과 통풍은 좋으나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는 등 집 안에서 이동할 때도 신발을 신어야 해
주거용도로는 다소 불편하다고 재단 측은 전했다.
이날 사저 개방행사에 참여한 설상근(52·김해시)씨는
"이전에 아방궁이라 해서 화려할 줄 알았는데 아주 소박해서 보기 좋았다"며
"우리가 듣던 것과 달라서 충격이었고 벽면에 손녀가 낙서한 것도 감동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선희(35·여·전남 여수시)씨도 "아방궁이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그냥 논란뿐이었구나 싶다"며 "(노 전 대통령 성품) 그대로 간결한 곳이고 화려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사저는 2006년 11월 부지 매입을 시작으로
2008년 3월 완공됐다.
노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서거하고 나서
혼자 기거하던 권 여사는 2013년 11월 사저를 기부하겠다는 의향서를 재단에 제출했다.
권 여사는 지난해 10월 사비를 들여 인근 다른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재단은 앞으로 한 두 차례 더 시범개방을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보완해 정식 개방할 방침이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 내가 설계한 사저가 아방궁이라니… ]
정기용 / 건축가
( 글.사진 출처 : 연합뉴스. 등록 : 2009-05-25 )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기자회견 하겠다” 간청하자 “참아라”
지붕 낮은 집을 원한 대통령
5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찌푸린 하늘아래 가랑비가 흩뿌린다.
비극적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가슴이 애린다. 끊임없이 눈물이 고인다.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이 큰 슬픔과 놀라움 속에서 하루가 지난 오늘새벽까지도
부엉이바위는 내 눈앞에 나타나 나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하고, 지금 떠나서는 안 되는 분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경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오늘 나는 고백해야만 한다.
그동안 가슴속에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만 하겠다.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노무현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를 설계하고,
봉하마을 계획들을 옆에서 거들어 오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대통령은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훌륭한 건축주이셨다.
집짓기를 위한 회합을 거듭할수록 계획안은 점점 나아졌고,
서로 간에는 드디어 신뢰와 공감이 생겨났고, 퇴임 후 사저로 입주한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찾아뵙고 또다시 봉하마을 생활 속에서 피어난 꿈의 계획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두 가지를 마지막 가시는 길을 위해 밝혀야만 한다.
한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TV카메라에 비친 모습만 바라보는,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저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귀향한 한 농촌인으로서 농부 노무현이 꿈꾸던 소박한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오늘의 이 비통함과 가슴 저리는 심경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되는 최소한의 예의는
고인에 대해서 끈질기게 널리 퍼뜨렸던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봉하마을의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건축가인 내가 제일 잘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봉화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해서 사저를 비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의마저 엿보이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니 참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다 밝혀질 일이지만 내가 설계한 대통령의 사저는
재료로 말하자면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리고 아방궁이 아니라 불편한 집이다.
처음 만남에서 농촌으로 귀향하는 이유를 대통령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마을에 자원봉사도 하고,
자연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도심아파트 같이 편하게 살아서는 안 되고,
옛날 우리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이,
한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서 이동하는 방식의
채 나눔을 권유하였다.
한 공간에서 모든 것이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는 도시의 집과 달리
식사를 하거나 집무실로 이동할 때마다 봉화산을 바라보거나
공기 내음을 맡으면서 농촌에 살고 있음을 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대통령은 흔쾌히 동의 하셨다.
흙집에다가, 도시 사람으로는 살기에 불편한 집. 그러나 품위가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집,
그런 집을 결과적으로 원하신 셈이다.
그리고 경호원들과 비서진들의 공간은 너무 떨어뜨리지 말고
한 식구처럼 생활하도록 주문하였다.
집이 다소 커져 보이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경호동을 안채와 붙여서
비서진들과 경호원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나는 중정형의 집으로 화답한 셈이다.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나라에서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확장한 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다.
건축가는 안다. 건축주가 누구이며 집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지붕 낮은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봉하마을 주민들의
농촌소득 증대사업을 유기농법으로 전환시키고,
봉화산과 화포천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치유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생태교육의 장을 만들고자 하셨다.
재임시절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인 농촌의 문제를 스스로 몸을 던져 부닥치려는
대통령의 의지는 퇴임 후 일 년 내내 쉴 새 없이 지속되었다.
앞으로 마을뒷산 기슭에 ‘장군차’도 심을 예정이었고,
마을 마당 앞뜰에는 마을특산물매장도 꾸리고 노무현표 브랜드 쌀도 팔 계획도 세웠다.
특히 장터 지하 쪽에 작은 기념도서관 건립도 꿈꾸고 계셨다.
민주화운동시절 당신이 가까이했을 수밖에 없었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
당시의 젊은이들의 양식이 되었던 모든 책들을 모아 작지만 전문적인 민주주의 전문도서관을
구상하고 계셨다.
농사도 짓고, 자연과 생태를 살리고, 나아가서는 작은 동물농장을
봉화산자락 부엉이 바위 밑에 만들어 청소년들과 함께 하려는 생각들이 바로
인간 노무현대통령이 꿈꾸던 소박한 꿈들이었다.
그리고 틈틈이 폭넓은 독서에 빠져 통치시절을 정리하며 집필 작업에 임하셨다.
독서와 토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즐기던 값진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대통령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내 탓이다.
‘산은 멀리 바라보고 가까운 산은 등져야한다’는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고
집을 앉힌 내 탓이다.
봉화산 사자바위와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하던 부엉이 바위 가까이에
지붕 낮은 집을 설계한 내 탓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던져 우리들에게 남긴 질문들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애통함 속에서 한 마디의 단어, 그것은 ‘순교’이다.
한국 현대사 속에 심연처럼 가로놓인 질곡들, 멍에들, 허위의식들,
인간의 탈을 쓴 야수성들. 이 모든 것을 안고 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나는
순교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나는 부엉이 바위 밑에 작은 동물 농장의 그림을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킨 채
지금 봉하마을로 내려간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도 바로 거기에 계시므로.
정 기 용 /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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