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산에 우뚝 솟은 '붉은 수정꽃'
경남 마산시 양덕2동에 있는 마산교구 양덕동 주교좌성당은
현대 건축의 거목 고(故) 김수근(바오로, 1931~1986)씨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모양과 느낌부터 여느 성당과 달리 예사롭지 않다.
연면적 1695㎡(513평)의 건물 아래 부분은 깨진 벽돌을 쌓아 거칠고 강한 느낌 속에 안정감을 주고,
윗부분은 붉은 벽돌로 처리해 솟은 느낌을 준다.
특히 6각 모양의 지붕과 그 주변 부정형의 보조지붕들은 마치 한 송이 꽃을 연상시킨다.
김수근씨의 말처럼 ‘바위산에 핀 수정꽃’ 같다.
성당 입구 정문을 들어서면 우뚝 솟은 붉은 성전건물과 마주치게 되지만 본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보이지 않는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나 있는 나선형의 돌담길을 따라가야 한다.
성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돌담길을 걸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건축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알루미늄 십자가가 솟아 있고 길은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본성전 정문으로 연결된다.
원래는 알루미늄 십자가 대신에 나무 십자가가 서 있었으나 비바람과 태풍에 썩어 쓰러지자
1990년 이 알루미늄 십자가로 교체했다.
성당 안은 약간 어둡고 침침한 듯 하지만 6각 지붕과 보조지붕 사이의 가늘고 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빛으로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낮 시간에도 성당을 찾아 성체조배를 하거나 기도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이처럼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 때문인 듯.
신자석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노출공법의 시멘트 천장과 기둥들이 이채로움을 더한다.
제대를 향해 둘러싸듯 배치된 1, 2층 신자석은 가족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단 위에 서면 신자석이 한눈에 들어오고, 신자석에서는 어디에서나 거의 사각없이 제단을 가깝게 바라볼 수 있다.
신자석은 400석 정도. 주교좌성당임을 감안한다면 좌석 수가 약간 적은 듯했다.
개방형의 2층 신자석으로 올라가면 신자석 뒷벽에 요한 묵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인과 용’을 그린 성화가 눈길을 끈다.
유리화가 최영심(빅토리아)씨 작품이다.
마산교구가 설정된 것은 1966년이지만 양덕동 주교좌성당의 역사는 이보다 더 짧다.
본당 설정일은 1975년 12월8일.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박기홍(조제프 플라츠, 현 몬시뇰) 신부는
가톨릭여성회관의 일부를 빌려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성전건립 준비에 들어갔다.
자매교구인 오스트리아 그라츠교구 소속으로 마산교구에 파견돼 나와 있던 박 신부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성전을 짓겠다는 일념에서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 주교)에게 훌륭한 건축가를 추천해줄 것을
요청했고, 마침내 건축가 김수근씨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김씨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박 신부의 설명을 듣고 성당 건축을 맡기로 했다.
박 신부는 건축 설계를 위해서 29차례나 서울과 마산을 기차로 오가면서 김수근씨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양덕성당 25년사」에서 회고하고 있다.
성당 신축을 위해 2300㎡(696평)의 성당 부지와 설계도는 마련됐지만 더 큰 문제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1억6500만원의 건축기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박 신부는 출신 교구인 그라츠 교구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했다.
본당 설립 때부터 사무장으로 재직하고 강남도(로베르토, 55)씨는
“당시 그 비용이면 보통 성당 3개를 건립할 수 있었다”면서 “그리츠교구와 교구청, 독일교회기관,
오스트리아 부인회 등의 도움 속에 신자들이 성전건립 비용을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양덕동본당은 착공 1년 만에 성당을 완공, 1978년 11월25일 당시 교구장이었던 장병화 주교 주례로
새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성당 주변은 바위산투성이의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성당이 완공된 후 김수근씨는 ‘바위산에 핀 수정꽃’ 이라는 말로 감회를 표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건립되자 교구는 주교좌를 남성동성당에서 양덕동으로 옮기기로 하고
이듬해인 1979년 4월 양덕동성당은 주교좌성당이 됐다. 여기에는 양덕동성당 일대가 개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도 고려됐다.
양덕동성당은 이후 주교좌성당으로서 뿐 아니라 공장지대가 많았던 관할지역의 특성상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80년대 당시 주일미사 참례자가 1000여명을 훨씬 웃돌
정도로 활기찬 본당이었다. 하지만 창원시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신자들이 빠져나가고 석전·구암본당을
분리한 후에는 교세가 많이 줄어들어 현재는 미사 참례자 수가 7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최영철 주임신부는 “양덕동본당은 설립 당시에는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항상 도움을 주는 본당이었다”면서
“이 본당에서 활동하고 성장한 신자들이 새 본당으로 가서 사목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이 본당은 평신도 인재를
양성하는 본당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양덕동성당은 교회 밖에서 더욱 유명하다.
조선일보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건축 20선을 선정했는데 양덕동성당이 9번째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 유명세 덕분에 1년 내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건축과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일본 등 외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 이하 글 자료 : 공간 그룹 )
'마산 양덕성당'은 대통령자문 건설기술ㆍ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에 의해
2007년도에 ‘5월의 건축환경문화’로 선정됐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독특한 재료의 구사와 비범한 조형이 뿜어내는 강력함이 있다"며
"교회건축이 이 땅에서 어떻게 정착돼야 하는 가에 대한 건축가의 진지한 고민과 노력이 담긴 건축물"이라고
평가했다.
'마산 양덕성당'의 특징은 서구 성당건축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교회로서
종교 건축의 독자적인 해석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붉은 벽돌로 된 성당은 한 눈에도 그것이 교회 건축임을 알아볼 수 있는 외관이지만
중세 교회의 형태를 답습하지 않고 현대적인 조형을 취하고 있다.
내부 역시 차분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로 신성한 종교 공간을 조성하고 있어 예배 기능에 적절하게 부응하고 있다.
평면과 공간은 기독교 교회의 관습을 따르면서도 개성과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 현대건축의 견인차, 김수근은 누구인가
건축가 김수근은 1931년생으로 향년 55세,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실제 건축 설계를 한 기간은 약 25년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지만, 그는 한국 현대건축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건축가 김중업과 함께 세계 건축사의 조류를 이끌던 모더니즘 양식을 본격적으로 수용했고,
그에 함몰되지 않은 자신만의 뚜렷한 건축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김수근은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이다.
1943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정착해 3~4년 간격으로 1950년까지 삼청동, 가회동, 원서동을 옮겨다녔다.
한옥과 좁은 골목길이 많은 북촌에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김수근이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해방 이후 국내에 주둔하던 미국 병사 때문이었다.
밥(Bob)이란 이름의 미국 병사는 하와이 출신의 건축가 학생이었다.
김수근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Bob이 김수근에게 건축 공부를 제안했고,
김수근은 1950년 실제 서울대 건축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던 김수근은 1951년 일본으로 부모의 허락도 없이 밀항했다.
김수근은 이때부터 9년간 도쿄예술대 건축과, 마쓰다 히라다 건축설계사무소를 거쳤다.
1958년에는 일본인 야지마 미치코와 결혼까지 했다.
김수근이 일본에서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1959년 5월 발표된 ‘국회의사당 설계도안 현상모집 공고’ 때문이었다.
당시 이 현상설계는 규모와 건물의 상징성 때문에 국내 건축계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김수근은 당시 일본에서 함께 수학하던 박춘명, 강병기, 정종태와 함께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도전했고,
당선돼 귀국한다.
비록 5·16 군사정변으로 김수근의 국회의사당 설계안은 폐기됐지만,
김수근은 1960년부터 국내에 남아 건축가로 활동했다. 1961년 자신의 이름을 딴 설계사무소를 세우고,
워커힐 관광사업 시설 설계에 참여한 뒤, 1962년 ‘삼호공업사’·‘오양빌딩’, 1963년 ‘자유센터’·‘타워호텔’
‘고대의대 부속병원’ 등을 설계했다.
부침도 있었다. 왜색 논쟁을 부른 ‘부여 박물관’이 문제였다.
1967년 동아일보가 고고학자의 제보에 의해 실은 기사가 ‘한창 잘나가던’ 김수근의 발목을 잡았다.
부여 박물관의 정문과 지붕의 모양이 일본의 신사와 유사하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대 건축계를 주름잡던 김중업마저 “부여박물관은 비건축가에게도 뚜렷이 일본식임이 짐작 가듯
일본식 건축임이 틀림없다…. (중략)”고 비판했다.
이에 김수근은 “부여박물관은 ‘누구도 닮지 않은 바로 김수근식’ 건물”이라며 받아쳤다.
당시 김수근의 부여박물관을 놓고 벌인 건축계 및 사회 각층 인사의 논쟁은 한국 건축계에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다.
일반인들에게 건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창조는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건축계의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건축가 김수근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도시계획에도 관심을 보였다.
워커힐 관광사업 시설 설계 때부터 인연을 맺은 김종필의 후원 아래 대규모 공공사업의 설계용역을 도맡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수장을 맡았다. 김수근은 종로 3가 재개발, 여의도 도시계획 등을 진행했다.
1970년대는 김수근 건축의 황금기로 꼽힌다.
학계에서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대표직을 1969년 사임한 뒤 급격히 친밀해진 최순우와의 만남이
그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김수근은 선생 격인 최순우가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할 때까지
전국의 민가와 초가, 사찰을 함께 누볐다. 전인하 한양대 교수는 “김수근이 건축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시기는
북촌에서의 유년기, 일본 유학시기, 최순우와 함께 한 한국 건축의 연구 시기로 꼽을 수 있다”며
“최순우는 김수근이 사물을 바라보는 격을 높이도록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김수근은 1970년부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원서동 공간사옥’을 비롯해
‘서울대학교 예술대학’·‘덕성여대 약학관·가정관’·‘창암장’·‘세이장’·‘문예진흥원 전시장·공연장’·‘샘터사옥’·
‘해외개발공사 사옥’·‘한계령 휴게소’·‘경동교회’·‘양덕성당’·‘청주박물관’·‘진주박물관’ 등의 설계를 왕성하게 이어갔다.
벽돌 건축을 통한 김수근 특유의 중첩 되고, 비틀리는 공간 미학도 이때 꽃 핀다.
김수근은 건축 설계뿐 아니라 미술·문화계의 부흥에도 힘썼다.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가는 건축 저널 ‘공간’을 창간하면서 건축계의 장(場)을 마련했고,
설계 사무소로 쓰기에도 비좁은 사옥에 공연장을 만들어 수많은 문화예술인의 발표를 도왔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온 원로 건축가 중 많은 이들이 김수근의 동료이자 제자다.
그중에서도 장세양, 민현식, 승효상, 우규승, 이종호, 유걸, 김종규, 김병윤, 김영준 등은 김수근의 직계(直系)로 통한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는 “김수근은 한국 현대건축의 견인차”라며 “건축계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전방위적 영향을 미친 건축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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