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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현대건축 이야기

건축기행-08 통영 윤이상 기념공원 (2013. 06.)

 

 

 

 

     윤이상 기념공원

 

                                                경남 통영시 도천동 148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과 그의 음악을 테마로 한

기념공원으로 도천동 윤이상 생가 옆 6745㎡ 부지에 조성한

'테마공원'으로서 윤이상선생의 음악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지상 2층 연면적 865.5㎡ 규모의 기념전시관과 소공연장이다.

 

야외공연이 가능한 음악광장과 관객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음악당인 프린지홀, 그리고 고인의 유품이 전시되어있는

윤이상 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선생이 생전 독일 베를린에서 거주하며 남긴 유품

148종 412점이 있으며, 독일 정부로 받은 훈장과 괴테 메달을

비롯해 사무집기, 생전 연주하던 첼로, 항상 품고 다녔던 소형태극기

등이 있다. 사진 500여 점도 별도 전시된다.

 

윤이상 기념공원은 건축가 민현식 교수(기오헌)의 작품으로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둘러싼 여러 정치적 이슈들로 인해

'도천테마공원'이라는 이름으로 2010년 3월 오픈했다.

 

 

 

 

 

 

 

 

 

 

(사진출처 : 홈페이지)

 

(사진출처 : 홈페이지)

 

 

 

 

 

 

 

 

 

 

 

 

 

 

 

 

 

 

 

 

 

 

 

 

 

 

 

 

 

 

 

 

 

 

 

 

 

 

 

 

 

 

 

 

 

     나의 음악은... My Music is...

 

 

" 내 음악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 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

 

 

(이하 글 출처 : 홈페이지)

 

 

 

 

 

 

 

 

 

 

 

 

 

 

 

 

 

 

 

 

 

 

 

 

 

 

 

 

 

 

 

 

 

 

 

 

 

 

 

 

 

 

 

 

 

 

 

 

 

 

 

 

 

 

 

 

 

 

 

 

 

 

 

 

 

 

 

 

 

 

 

 

 

 

 

 

 

 

 

 

 

 

 

 

 

 

 

 

 

 

 

 

 

 

 

 

 

 

 

 

 

 

 

 

 

 

 

 

 

 

 

 

 

 

 

 

 

 

 

     윤이상과 음악

 

윤이상은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문화의 창조적인 '대화' 를

통하여 이루어 낸 자신의 독창적인 음악언어로 세계 현대 음악계에

우뚝 선 20세기 한국의 작곡가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과 화합, 조국의

민주화 및 억압 받는 민중의 인권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친 휴머니스트이다.

 

윤이상에게 있어서 삶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예술가는 결코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순수하고 정의로운

양심에 뿌리를 둔 진실한 작품만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예술가로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가 남긴 총 150여 곡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은 동양적 사상에

토대를 둔 이러한 그의 예술적 신념과 세계관의 표출이다.

 

 

1917년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윤이상은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78세를 일기로 망명 작곡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39년간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

해방과 민족분단, 한국전쟁의 비극을 체험했다.

 

 

그는 20세기 초반 한국 서양음악 초창기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서양음악을 공부했고, 시대 및 세계와 호흡하는 민족음악(한국음악)의

수립을 추구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윤이상은 이의 실현을 목표로

유럽의 현재 작곡기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1956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39년간의 유럽생활 동안 자신을

형성시킨 조국의 전통문화 유산에 내재한 창조적인 가능성을 끊임없이

찾고 발견하며 그것을 자신의 샘솟듯 솟구치는 창작 에너지의 원천으로

삼아 독창성을 지닌 세계음악을 창조했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지만 전 인류의 평화를 간절히 염원했던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윤이상과 통영

 

1994년 9월 1일 독일 베를린의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유럽 및

독일 주재 한국 특파원과의 회견이 끝난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파리에 살고 있는 동양 출신의 한 지인이 찾아왔다.

꾸벅 인사를 한 그는 대뜸 "선생님 드리려고 멸치를 갖고 왔습니다"

라며 종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 순간 윤이상 선생은 "통영, 통영 멸치!? 아니 이게 정녕 통영 멸치란

말이오?"라고 울음 섞인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은 이내 눈물로 얼룩졌다.

그 지인이 "네, 선생님이 통영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실 때 제자였던

제 누이가 직접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 통영 멸치를 받아 들고 울먹이던 노음악가의

모습에 주변의 특파원들도 모두 숙연해졌다.

- ‘부산일보’ 세계적인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님의 기사 중에서

 

 

윤이상 선생의 고향은 통영입니다. 그 분은 그 먼 독일 땅에서

살아오면서 생의 마지막 끝자락을 잡고 계실 때까지 통영

앞바다를 찍은 큰 사진을 벽 한켠에 붙여 놓으셨으며 노후를 통영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답니다.

 

마지막 순간 유언하시기를 "고향인 통영에 묻힐 수 없다면... 차라리

베를린에 남겠다"라고 하셨다 합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윤이상 선생님, 그 분에게

통영은 어떤 의미에서 큰 그리움의 대상이었을까요?

우리는 윤이상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

나의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구라파(유럽)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 번도 통영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 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통영은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멀리 떠난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분도 그러했나 봅니다.

이제는 세계의 유수한 유명 음악가들을 '통영국제음악제'라는 이름으로

이 작은 마을 통영으로 오게 불러놓고서는 정작 자기 자신은 끝내

오지 못하고 그 넓은 통영바다 대신, 향기로운 통영의 향토 대신

한줌의 통영에서 퍼간 흙만으로 통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독일 저

먼땅에서 아직도 꿈을 꾸고 계신가봅니다. 나비가 되어 고향으로 향하는

꿈을...

 

윤이상 선생의 묘비문 : "윤이상은 고향인 통영에서 퍼 온 흙 한줌과

함께 여기 잠들어 있다."

 

 

 

 

 

 

 

 

 

 

 

 

 

 

 

 

 

 

 

 

 

 

 

 

 

 

 

 

 

 

 

 

 

 

 

 

 

 

 

 

 

 

 

 

 

 

 

 

 

 

 

 

 

 

 

 

 

 

 

 

 

 

 

 

 

 

 

 

 

 

 

 

 

 

 

 

 

 

 

 

 

 

 

 

 

 

 

 

 

 

 

 

윤이상 尹伊桑 Isang Yun

 

                 

                                                            위키백과

 

출생 1917년 9월 17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사망 1995년 11월 3일 (78세)

        독일 베를린

 

 

윤이상은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겸 현대 음악 작곡가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독일식 이름은 Isang Yun(이장 윤)이다.

경상남도 산청 출생이며 경상남도 통영에서 성장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 시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치 도모지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 후 다시 저항활동을 도모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해 서울로 도피했다.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통영고등학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첫 딸 정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였다가 서울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유럽에서의 활동

 

1956년에는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와 1966년 도나우에슁어 음악제에서 초연한 교향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

 

1963년 4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소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희곡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 안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 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옮겨

그 뒤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사망

 

1994년 도쿄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 했다.

1994년 9월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갈등을 겪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음악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12음주의로 작곡하며 주요음 (Hauptton) 그리고 주요음향 (Hauptklang) 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한국 궁중음악에 대한 연상작용을 이용해 작곡하기도 했다. 오보에는 피리를, 하프는 가야금을,

플루트는 대금을, 바이올린은 해금을 대신하게 하는 등 한국 전통 악기의 음색을 서양 고전 악기로

옮기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