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건축이야기 ■/현대건축 이야기

건축기행-06 벌교 태백산맥문학관 ( 2013.04.) - 문학은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기여해야 한다

 

 

 

 

 

순천만의 매서운 찬바람이 남아 있던 3월초,

납월매를 보러 순천 금둔사에 들렀다가

금전산 아래의 낙안읍성 곁에 2011년에 새로 문을 연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도 함께 들렀다.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은 고 한창기 선생이

살아생전 전 재산을 털어 수집했던 유물들을

 사후에 순천시에 기탁하게 되었고

이에, 시는 박물관을 건립하여 고인의 뜻을 잇게 된 건물이다.

 

 박물관은 연면적 약 520평의 박물관 1동과

한옥 8동으로 건립됐으며

 6,000 여점의 전통 민속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신축한 박물관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전시실을 모두 지하로 내려 보내고 한껏 몸을 낮춰

낙안읍성과 주변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기 위해 애 쓴

흔적과 배려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그런데, 나란히 있는 한옥의 이전은

좀 더 심사숙고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박물관 옆의 한옥은

1920년대에 지어진 백경 김무규 선생의 고택으로,

전남 구례에서 옮겨 왔는데

구례에 있을 때 영화 서편제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주인공 송화가 눈이 먼 뒤 아버지와 함께 잠시 머물렀던 집으로,

영화 속에서는 고색창연하고 운치 있던 고택이었지만,

지금은 낙안읍성과 박물관 사이에서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집이 간직했던 역사와 배경과 주인마저 사라져 버리고

타향의 빈 벌판에 억지로 둥지를 튼 탓에,

길 잃은 미아마냥 생뚱맞은  표정으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역시, 사람이나 집이나

모두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제자리가 항상 있는 법이다.

 

 

 

 

 

낙안읍성

 

 

 

 

 

간단하게 박물관과 한옥을 둘러보고 보성군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가기 위해서 차를 몰았다.

 

낙안 들판을 거쳐 차를 달린지 얼마되지 않아 벌교읍의 꼬막집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예전엔 낙안읍성에서 벌교가 이렇게 가까운 줄을 미처 몰랐었다.편리한 네비게이션 때문에 아무런 생각없이 길을 나서게 되는 여행의 폐단이기도 하다.

 

나는 그제서야 낙안읍성이 그 벌판에 있게 된 이유를 마침내 깨닫게 된다.바다로 열린 벌교 포구에서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는 낙안 들판을 그 옛날 왜적들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낙안읍성의 축성이 꼭 필요했었던 것이다.

 

 

 

 

 

벌교 안내도

 

 

벌교 홍교 - 예전에는 이 자리에 뗏목을 이어서 만든 다리가 있었기때문에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한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 중에서)

 

 

 

 

 

벌교 꼬막잡이 현장 (문학관 제2전시실에서 촬영)

 

 

 

 

 

 

꼬막의 집산지와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 하지 말라!’던 벌교가

이제는 2008년 ‘태백산맥문학관’이 세워지면서

문학기행, 테마여행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소설의 주요 무대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의 제석산 자락에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문학적 성과를 기리고

관광자원화하기 위하여 보성군에서 건립하였다.

 

 

 

보성군은 일찌기 1993년부터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인 벌교에

문학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작품이 이념 분쟁에 휘말리면서

무산될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5년 검찰에서, 이 작품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고발에 대하여 무혐의로 처분함에 따라 비로소 다시 추진될 수 있었고,  

같은 해 10월 착공된 뒤 2008년 11월 21일 마침내 개관을 보게 되었다.

2003년 김제에 설립된 '아리랑 문학관'보다 먼저 추진했지만

건립이 늦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문학관은 작가의 육필원고와 증여 작품 등의 전시물품을 보관하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 전시관이고,

 건축물은 건축가 김 원(광장 건축) 씨의 작품이다.

 

 

2008년 ‘태백산맥 문학관’이 개관하던 날,

국내의 한 언론은 아래와 같이 썼다.

 

 

 

 

 

 

 

 

 

 

 

 

 

 

 

 

"2008년 11월 21일 오후 2시 전남 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357 제석산 끝자락.

한국 분단문학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조정래(65)씨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하는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태백산맥> 의 첫 장면, 정화섭이 무당 소화를 만나기 위해 길을 가던

바로 그 지점에 세워졌다.

 

 

<태백산맥>은 해방 직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4ㆍ3항쟁과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부터 6ㆍ25 휴전 후 분단이 고착화한 1953년 10월까지를 다뤘다.

 

1989년 완간 후 지금까지 700여만부가 팔렸다.

집필기간 6년, 원고지 1만6,500매에 달하는 작품의 집필과정에도 곡절이 많았지만

이적성 시비로 11년 간 검찰 수사를 받는 고초를 감내한 신산한 세월이 있었다.

작가 조씨는 "<태백산맥>때문에 겪은 좋은 일과 궂은 일이 모두 이 문학관에 전시돼 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개막 테이프를 끊었다.

 

 

......

 

 

보성군이 <태백산맥>의 현장 보존과 복원을 위해 45억원을 들여 지은

'태백산맥문학관'은 2005년 10월 착공돼 2007년 11월 2층 건물로 완공됐고,

벽화 작업에 1년이 걸렸다.

 

......

 

 

623점의 전시물들은 "<태백산맥>은 발과 귀로 찾은 살아있는 역사"라고 한

어느 평자의 말을 확인케 해준다.

조씨가 1983년 직접 그린 벌교읍 지도,

작품 속 소년 빨치산의 실제 모델인 경제학자 고 박현채와

작가가 지리산 취재를 다니며 찍은 사진이 있다.

 

'참패한 혁명의 현실적 대가는 곧 죽음이다.

소설은 산하에 널린 무수한 죽음 위에서 끝났다'로 시작되는,

소설가 김훈씨가 한국일보 기자시절 썼던 <태백산맥> 탈고 관련 기사와

조씨가 부친의 장례식 때 나흘 외에는 중단치 않았던 집필과정 누계표,

그리고 우익단체의 협박에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2통의 유서도 볼 수 있다.

......."

 

< 글 출처 :  인터넷한국일보, 입력일자 : 2008/11/22 >

 

 

 

 

 

 

뒷쪽의 텅빈 주차장을 두고 전면광장을 주차장으로 바꾸어서 문학관의 진출입과 분위기를 많이 훼손시키고 있다.

설계도 중요하지만 사후관리 또한 중요함을 새삼 깨우쳐 준다

 

 

옹석벽화

 

 

                                                                     정면 입구에 걸린 건축가 김 원의 설계 소묘 현판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 원 씨는

설계의도를  건물 주출입구 벽에 새겼다.

 

"조정래 선생에게 설계 제의를 받은 것이 2004년 11월 중순.

이틀 뒤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벌교로 현지답사를 갔다.

벌교에서 태백산맥의 현장들을 둘러 본 느낌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의 길고 어두운 분단의 역사의 터널을 빠져나온 듯 했다.

 

소설 <태백산맥>은 그것을 영화로 만든 임권택 감독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질곡의 현대사를 거쳐 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데도 새삼 생각이 미쳤다.

 

작가는 그렇게 묻혀지고 잊혀진 것을 파내고 캐내서

햇빛 밝은 곳으로 드러내보이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썼을까 하는 본질적인 물음 속에서

“역사의 갈등과 아픔을 해원의 굿판으로 풀고 싶은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나름의 답을 내렸다. 그렇게 자신이 느낀 대로 건물을 만들고 싶었지만

사람들에게 나 자신의 생각이나 감동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건물은 주어진 언덕 위에 지어진다.

하지만 ‘언덕위의 하얀 집’처럼 건축물이 두드러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건축가의 기념비가 아니라 문학작품을 기념하고 담아내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려낸 분단의 아픔은 산의 등줄기를 잘라내는 아픔과 비견될 것이었다.

 

건축가가 산자락을 잘라내는 행동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건물은 우리의 그 아픈 이야기가 묻혀있던 땅 속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등줄기가 잘라지는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했다.

 

땅을 파내려가 만든 토목옹벽이 건축물의 벽이 되었다.

나머지 한쪽 옹벽에는 소설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마음먹었다.

그 엄청난 일을 일랑 이종상선생이 흔쾌히 맡아 주셨다.

그 고마움에 나는 건물 전체를 그림을 향하도록 놓았다.

 

건축물 앞에는 억새를 심고 뒤편으로는 대나무숲을 두를 생각이었다.

비싼 나무를 옮겨다 심는 수려한 조경은 의미가 없다.

언덕 아래에서 볼 때 건물의 앞면이 억새로 조금 가려지고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황량한 느낌이면 더 좋겠다.

뒤편의 대나무숲은 무당 소화네 집에 심어져 있는 대나무들의

연장이라 느끼면 될 것이다.

 

 

 

 

 

 

 

 

 

 

 

 

 

 

건물은 한 발 물러선 듯,

멀리서 보면 그저 언덕에 유리탑 하나가 서 있어서

밤에는 지하의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듯한

탑이 하나 보였으면 했다.

 

건물의 옥상은 그저 펑퍼짐한 해원굿의 무대다.

산줄기를 잘라낸 상처 자리를 건물로 메꾸며 생겨난 엉성한 흔적이다.

이 위에서는 치유와 화해의 대동놀이가 있어야겠다.

건물 안에 무엇을 많이 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작가가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태백산맥』관련해서

수 많은 평가와 연관작업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두고두고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갈 수 있도록,

즉 ‘되어진’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개념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유형의 것 만은 아니다.

이것은 살풀이의 굿판이다.

제한된 빛이 들어오는 텅 빈 홀에

김소희 명창의 구음이 흐르게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장난치고 재잘거리는 어린이 수학여행단의 무리도 이 안에 들어서면

잠시 서늘한 전율과 침묵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아직 역사 속 어둠을 다 지나온 게 아니고

통일 이후에도 풀어야 할 문제들은 쌓여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그러므로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오늘의 현실을 담아내야 한다는 소망도 남아 있다.

이제 완성된 건물은

사람들이 역사의 어둠과 빛을 한꺼번에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2008. 11. 21. 건축가 김원 >

 

 

 

 

 

 

 

 

 

 

 

 

 

 

애초에 문학관의 설계자는 보성군청에서 단순히 설계입찰로

 선정한 지역 '건축사사무소'가 있었지만

조정래 선생이 이를 거부하고 김 원 건축가에게 재설계를 의뢰하게 된다.

 

설계를 의뢰받은 김 원 건축가는

소설 <태백산맥>에 담겨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통일 염원을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의미의 건축언어로 풀어서 담아냈고 

 건물이 완공된 후, 보성군에서는 문학관의 설계자를

보성군의 명예군민으로 선정했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趙廷來, 1943년 8월 17일 ~ )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전라남도 승주군(현 전라남도 순천시)의 선암사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보성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표작으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의 역사소설이 있다.

 

조정래의 작품은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미쳤는데,

실제로 <태백산맥>의 경우 무혐의 처분을 받을 때까지 11년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논쟁을 일으켰다.

 

현재는 모교인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7년 <오, 하느님> (문학동네)을 저술하였다.

                                                (자료 : 위키백과 )

 

 

 

 

 

 

 

 

 

 

  2층의 제2전시실은 기둥이 없이 천정에 매달려 있는 구조이다

 

 

 

 

 

 

건축 개요

 

 

위      치 : 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364번지 일원

사업기간 : 2005. 10. ~ 2008. 8.

사 업 비  : 4,465백만원

규     모  : 1동 2층

연 면 적  : 1,375.8㎡

대지면적 : 4,359.6㎡

건축면적 : 979.7㎡

전시자료 : 159건 719점(육필원고 등 증여 작품)

 

 

 

전시내용

 

<제 1전시실>

 

첫째마당

. 작가는 시대의 산소

. 4년간의 자료 수집

. 6년간의 집필, 소설「태백산맥」의 탄생

 

둘째마당

.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

. 16,500매의 육필원고

. 한(恨)과 의식의 매듭을 풀며

 

셋째마당

. 분단문학의 지평을 열다

. 이적성 시비와 논란

. 영화「태백산맥」

. 세계인의 소설「태백산맥」

. 내가쓰는「태백산맥」

.「태백산맥」무혐의 결정

 

 

<제2 전시실>

 

넷째마당

. 육필의 혼, 작가 조정래

. 작가 조정래의 문학세계

. 작가의 삶과 문학

. 우리의 소설 태백산맥

 

다섯째마당

. 문학사랑방 :  예술관련 각종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열린공간

 

여섯째마당

. 작가의방 : 작가가 직접 거주하면서 집필 활동을 하는 장소로서,

                 유사 문학관과의 차별화된 공간

 

 

 

 

 문학관 전시실은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소설 <태백산맥> 출간 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소설 <태백산맥>

이란 4개의 장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고,

1만 6천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한

159건 719점의 증여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아직 <태백산맥>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3월 달에 문학관을 방문한 이후

처음에는 책을 읽어보고 난 후에

이 글을 써 보기로 작정했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소설의 내용과 주제로 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건축물 위주로 살펴보는 것도

오히려 객관적이고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자료들에 나와있는

소설 <태백산맥>의 개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 세력인 군경의 수중에 들어가자

좌익 군당 위원장 염상진은 하대치, 안창민 등과 산 속으로 퇴각한다.

비밀당원으로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게 되는 장하섭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무당딸 소화를 이용하고,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는데 ......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을 하지 못하자 농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이 과정에서 소작인 강동기는 지주를 샆으로 내리찍고 산으로 들아가 빨치산이 된다.

반면, 지주 서민영은 자기 소유의 논을 모두 소작인들과 공유하기도 하고,

국군 벌교지구 사령관 심재모로 하여금 모든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한다.

 

 

 

 

 

 

 

 

 

 

 

 

 

1950년 6ㆍ25의 발발과 함께 벌교는 다시 염상진 등에 의해 장악되고,

좌익 세력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지만 또다시 살육의 참상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김범우와 손승호는 빨치산의 길을 택하게 되지만,

김범우는 미군에게 붙들려 강제로 통역관이 되어 미군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목격하게 된다.

 

6ㆍ25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국의 개입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이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하지만,

군경의 진압 작전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지고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그리고 그의 목이 벌교 읍내에 내걸린다.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해방'은 실패로 끝나지만,

염상진을 추종했던 하대치 등이 살아 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에의 결의를 다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자는 <태백산맥>의 후기에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시대를 흔히들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라고 한다.

그것은 곧 그 시대가 그만큼 치열했고 격랑이 심했으며,

분단사 속에서 또 그만큼 왜곡과 굴절이 심했음을 의미한다.

 

그 시대의 진실과 참모습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복원하고 되살리느냐가

바로 분단극복이고 통일지향일 것이다.

그 시대의 복원은 바로 오늘을 푸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작업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현장을 찾아다녔다.

소설은 단순히 상상력의 산물일 수만은 없으며,

엄연한 역사사실 앞에서 소설을 쓰는 자는 제멋대로일 수가 없는 것이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렇게 증언을 토대로 하고 확인을 거친 것들이다.

그 이야기들을 소설로 엮으면서 나는 시대정신에 냉정하고자 했고,

우리의 오늘을 투영하고자 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도 했다.

 

“해방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다루는 대하소설의 무대로 벌교를 삼은 것은

제가 벌교읍의 골목골목까지도 훤히 안다는 이점 말고도 벌교가 겪은 역사가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전형성을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 인근 벌교읍에서 조계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빨치산의 투쟁 루트 등이 소설의 배경으로서 적당했기 때문이죠.”

 

 

 

 

 

 

 

 

 

 

 

 

 

 

 

 

 

 

1층의 제1전시실에는 <태백산맥> 취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작가가 직접 그린 벌교읍내 약도와 지리산 약도, 꼼꼼하게 적은 취재 수첩과 메모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80년대 대표적인 한국의 정치경제학자였던

박현채 선생과 함께 지리산에서 찍은 사진과

박 선생이 알려준 빨치산 노래를 적은 원고,

토벌대의 빨치산 분포도도 공개했다.

태백산맥 집필 당시에 썼던 만년필과  함께

사람 키보다 높게 쌓아 올린 육필 원고도 전시되어 있다.

 

이밖에 10권의 책을 쓰게 만든 단 2장의 작가 구성노트,

집필과정 누계표,

그리고 우익단체의 협박에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2통의 유서도 볼 수 있다.

 

 

 

 

 

 

 

 

 

                     16,500 매의 육필원고

 

 

 

      

              취재 수첩 

 

 

취재 노트

 

 

우익단체들로 부터 끊임없는 협박을 받고 2번째로 작성했던 유서

 

 

 

 

 

 

 

 

■  소설 <태백산맥 > 연보

 

 

1983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 시작

1986년   제1부「한의 모닥불」 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한길사), 제2부「민중의 불꽃」(2권, 1987)

             제3부「분단과 전쟁」(2권, 1988), 제4부「전쟁과 분단」(2권, 1989, 전10권 완간)

1990년   현역 작가와 평론가 50인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시사저널》)

1991년 『태백산맥』으로 단재문학상 수상, 전국 대학생이 뽑은 ‘가장 감명 깊은 책’ 1위(《중앙일보》)

1994년 『태백산맥』 영화화(태흥영화사, 임권택 감독)

1995년 『태백산맥』을 출판사를 옮겨서 출간(도서출판 해냄), ‘가장 읽고 싶은 책` 1위(《한겨레신문》)

1996년   독자 선정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1위(《동아일보》)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큰 책’ 1위(《시사저널》),

             단일 주제 비평서 『태백산맥 다시읽기』가 권영민 교수 집필로 출간

1997년 『태백산맥』1백 쇄 출간 기념연 개최, 대하소설로 1백 쇄 발간은 최초의 일

1999년   ‘20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에 선정(《중앙일보》)

              문인들이 뽑은 지난 1백 년 동안의 소설 중에서 ‘21세기에 남을 10대 작품’ 선정(《한국일보》)

2000년 『태백산맥』 일어판 10권 완간(집영사와 1982년 완역 출판계약 체결)

 

 

 

 

 

 

 

 

 

 

 

 

 

 

 

 

 

 

 

 

 

 

 

2층 제2전시실에는

 <아리랑>과 <한강> 등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비롯하여

작가의 아들과 며느리가  <태백산맥>을 4년동안 필사한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부대시설로서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는 '문학사랑방'과

 작가가 직접 머무르면서 집필활동을 할 수 있는 

'작가의 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작가의 아들과 며느리가  <태백산맥>을 4년동안 필사한 원고

 

 

 

 

 

 

 

 

 

문학관 전시실의 대형 유리창 너머 마주 보이는

정면 외부에 국내 최초의 거대한 '옹석벽화'가 있다.

건물 측면 산자락을 절개한 옹벽에는

이종상 화백이 제작한 길이 81m, 높이 8m의 대규모 벽화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이 들어섰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이 자연석 벽화는 오방색 돌을 활용해

백두대간과 지리산, 독도 등 우리 국토를 형상화했다.

오방색 돌 가운데 몇 점은 이종상 화백이

지리산에서 직접 가져와 붙인 것이라 한다.

 

 

 

 

 

 

 

 

 

 

 

"내가 평소 존경하고 그 문학성에 심취해 있던 조정래(趙廷來)님의 소설 ‘태백산맥’의

심오한 문학정신과 그의 치열(熾烈)한 역사의식 속에서 내 어린 시절 직접 체험했고,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왔던 질곡(桎梏)의 역사와 그 진실을 보았다.

슬기로운 우리의 부모 형제들은 이를 극복하고

광맥(鑛脈)처럼 깊이 파 묻혀있는 비극에서 7천만 민족의 통일염원을 발굴하여

민족의 수난 속에 희망을 캐내어 우리의 미래를 열고 싶었다.

 

나의 이런 생각에 앞서 역시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이 시대의 건축가 김원(金垣)님께서

이런 작품의 사의(寫意)를 최첨단 건축언어로 표현하여

평시 기피하는 북향(北向)의 조형물로

창의적이고도 훌륭한 소설 태백산맥의 혼을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불멸의 문학정신을 역사의식 속에 용해(溶解)시킨 소설 태백산맥의 내용을

한점 누수없이 담아내는 데 성공한 문학관 건축의 함의(含意)를 비보(裨補)하며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민족의 통한(痛恨)을 종식(終熄)하고

통일의 염원을 담은 원형상(源形象)-백두대간(白頭大幹)의 염원을 남긴다."

- 일랑  이 종 상 -

 

 

 

 

 

 

 

 

이 옹석벽화는 한국기록원으로부터 국내 최초, 최대 작품으로 공인 인증을 받았으며,

현재 기네스북 등재를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  소설 <태백산맥 > 추천사

 

작가 조정래가 파악하고 있는 민족분단의 문제는 정치적 이념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삶이 밑바닥에서부터 본래적으로 얽혀 있던 의식의 매듭에 해당된다. 이러한 인식은 분단상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논의가 드러내는 논리적 허구성을 지적할 수 있는 심정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의 장편대하소설『태백산맥』은 이러한 관점에서 분단민족의 허리를 이어가는 작업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숨겨진 진실의 재확인과 민족적 자기 모럴의 새로운 확립이다. 우리 민족 모두가 분단의 비극에 대해 새로운 비판적 반성을 시도해야만 하는 윤리적 판단이 이 작품에 깊이 깔려 있다.

  - 권영민(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대하소설을 통해서 우리 현대사를 다루는 일에 관한 한 『태백산맥』을 넘어설 작품은 아직 없다.

이 책은 첫째 반공 이데올로기와 분단 이데올로기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고, 둘째 현시기의 민족,민주 운동의 진전에 의한 당시의 사회, 정치사 대한 심화된 인식을 작품 안에서 역사,논리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셋째 그 결과 여순민중항쟁에서 6·25에 걸친 기간의 분단상황에 대한 총체적 파악에 성공하고 있다.

  - 이재현(문학평론가)

 

 

 

 

 

 

 

 

 

작가의 방 - 작가가 직접 거주하면서 집필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열린 도서실 - 문학사랑방

 

 

 

 

 

 

 

 

3층에는 옥외광장이 있어나

평소에는 잘 개방하지 않고

 

4층에는 전망대가 있어

벌교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4층 전망대

 

 

 

 

 

4층 전망대에서 본 벌교 전경

 

 

 

 

 

소설 <태백산맥 >은 2009년에 마침내

200쇄 돌파, 1300만부 판매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당시의 언론 기사이다.

 

"이미 300만명 이상 읽은 글을 법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것이

1992년 소설 '태백산맥'의 이적성 논란을 수사한 대검의 판단이다.

그렇게 '태백산맥'은 정권의 소용돌이를 지나 21세기까지 버텨왔다.

200쇄 돌파, 1300만부 판매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작자 조정래(65)씨가 2일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200쇄 돌파를 기념,

"태백산맥의 이적성 시비를 끝낸 것이 독자의 힘이듯,

우리 민족이 다시 한 번 모일 때"라며 현 시점의 남북문제를 언급했다.

1980년대에 민족의 비극인 분단 이데올로기를 방대한 소설에 투영한 작가는

작금의 경색된 남북관계를 누구보다 우려한다.

 

 

 

 

 

 

 

 

'소화의 집'에서 본 문학관

 

 

 

 

소설 '태백산맥'의 이적성 시비는 1994년부터 만 11년 동안 작가를 괴롭혔다.

대한민국 수사기관의 내사도 진행됐고, 보수단체들의 고발도 이어졌다.

'태백산맥'의 이데올로기 논란은 11년 만인 2005년 검찰의 무혐의 결정으로 마무리 됐다.

전남 보성의 태백산맥 문학관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또 "태백산맥이 법적으로 무혐의 처리 받은 것이 독자의 힘이듯,

우리 민족이 모여서 정치적 왜곡을 풀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설가 김훈(61)씨는 축사를 통해

"태백산맥이 연재될 당시 이 소설은 우리 사회에서 결코 완결될 수 없을 것이고,

조정래씨가 한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면서

"이 소설이 많은 시련과 평단의 편견 속에서도 200쇄를 맞게된 것은

열광적인 독자들의 힘이 이뤄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자료 : 뉴시스 | 입력 2009.03.02 >

 

 

 

 

  문학관 2층에서 내려다본 '소화의 집'과 '현부자네 집'

 

 

  '현부자네 집'에서 본 문학관

 

 

  '현부자네 집'

 

 

 

 

보성군에서 발간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1990년판) 현 부자집 집은

1930년경 밀양박씨 박사윤이 지은 것으로 나온다.

본래는 큰 건물이 5채 정도 있었지만 박사윤의 아들 대에서 집안이 몰락하여

건물이 대부분 팔려나가 사라지고 몸채 하나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보성군에서 복원하였다.

 

 

 

 

 

 

‘태백산맥 문학관’ 옆 현 부자네 집 마당.   <태백산맥>을 상황극으로 각색한 공연이 동절기를 제외하고 한달한번씩 열린다

 

 

 

                "버리고 기쁨을 얻는 곳!"- 문학관의 야외화장실답게 그 이름도 문학적이고 심오하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우리의 지난 역사와 문학사에는 비민주적이고 비상식적이던 어두운 시절과

 이데올로기를 당리당략이나 사리사욕을 위해서 정치인들이 이용한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소설가 조정래를 생각하며 ‘태백산맥 문학관’ 을 방문하지만

나는 건축가 김원을 생각하며 ‘태백산맥 문학관’ 을 방문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정래 문학관측에서 나의 관람을 결코 거부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철학이 똑 같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반대의 입장이 될 경우가 더 많다.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 세상을 보더라도 

남한테 피해 안주고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세상을 살면  아무 문제가 안되는 것을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갈등이 생긴다

 

"작가는 주장하거나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람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사실을 왜곡하거나 거짓이 없었다면 이적성의 판단은 사법부의 일이 아니라

독자의 몫 이라는 당시의 결정은 지극히 당연했다고 생각되며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일이

이 땅에서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조정래 작가는

"민족의 숙원이자 비원인 통일 문제에 대해 문학적으로 응답하기 위해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집필 의도를 회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평화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3단계 통일의 길을 제안했다.

"첫번째, 경제적 연합을 해야 한다. 두 번째는 문화적 화합을 해야 한다.

정치 통합은 맨 마지막 3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경색된 남북관계의 해소를 위해

귀담아 들어 볼 필요가 있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성군에서 1993년 기획하여  15 년만인 2008 년 준공된

‘태백산맥 문학관’ 은 건축가 김원씨의 디자인과 설계를 통하여

과거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기 위해 벌교읍 제석산의 등줄기를 잘라내고,

2층에 있는 제2전시실은방 후부터 6.25를 거친 민족 분단까지의  '민족사의 매몰시대'를 상징하여

벽 없이 공중에 떠있는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옥상으로 올라가면빛을 담은 유리탑이

새 역사의 희망을 상징 하듯 제석산 능선 위로 솟아 오르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건물을 북쪽을 향해 열어 놓았다.

 

 

  앞으로 보성군에서는 이미 준공된 문학관을 기반으로

소설 <태백산맥>의 현장들을 보존하고 복원하여

주릿재와 철다리, 중도 방죽과 테마 공원으로 이어지는

문학 벨트를 조성할 장기적인 계획도 가지고있다.  

 

영국이 '세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고 말했듯이

보성군 벌교는 조정래라는 고향 출신 작가로 인해

뻘 속에 뭍혀 있던 벌교의 역사가 바로 살아나고

국내 최대의 ‘문학관’과  소설 속의 성지를 보유하는 문화 고장이 되었다.

 

앞으로 '벌교 꼬막정식'보다 

‘태백산맥 문학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벨트가벌교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될 날을 상상하며

'꼬막정식'을 맞보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2013. 0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