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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함안 무기연당 - 3 ( 2012. 11.)

 

 

 

...... 함안에서 마산 쪽으로 난 국도 5호선을 따라 가다가, 구고사 이정표가 보이는 구성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무기천을 거슬러 안쪽으로 들어가면 청룡산 자락의 아담한 마을, 무기리舞沂里가 나온다.

지금은 마을 주위로 공장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서 동네 분위기가 많이 망가졌지만 칠원면 무기리는 상주 주씨의 집성촌으로, 국담菊潭 주재성 선생을 모신 종가집과 별서정원인 연못, 무기연당이 마을 뒤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담 선생은 조선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영남지방의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함께 민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관군들은 선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기양서당 앞마당에 연못을 새로 만들어서 국담 선생에게 선물한 것이 무기연당의 유래이다' 라고 문화재청 홈페이지와  일반자료에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무기연당의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고, 국담 선생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일부 반론도 있기에 ‘이인좌의 난’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부 미담이 인위적으로 첨삭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4년) 3월에 일어났다.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세력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영조임금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려고 했던 쿠데타인데,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무신난’이라고도 한다.

 서울·경기·충청·강원·전라·경상·평안·함경도 등 나라의 반쪽이 가담하였는데 영남지방에서는

정온 선생의 4대손인 정희량과 조성좌 등이 가담하여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진압되었다.

 

 이 반란에 분개한 영조임금은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우고 영남지역을 반역의 원흉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시험 응시를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로써 합천과 진주, 거창, 함안, 고령, 성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은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차별과 소외를 당하는 시련의 세월을 겪게 되었는데 그 빌미를 제공하였던 사건이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보는 시각도 있다.

 

 무기리의 주씨 종가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의 주거영역과 연못에 딸린 하환정何煥亭, 풍욕루風浴樓 등의 별당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에는 주재성 선생의 충신정려忠臣旌閭와 선생의 아들인 주도복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선홍빛의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나란히 걸려있고, 대문채는 일반 살림집에서는 볼 수 없는 삼문형식을 취했고 화려하게 단청까지 하였다. 이는 정려각旌閭閣을 겸하기 때문에 대문채의 격을 높인 특별한 사례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