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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함안 반구정 (2012.11.)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서 용화산의 산뿌리를 휘감아 돌아가는 곳에 정자가 둘 있으니 하나는 합강정이요 하나는 반구정이다.

반구정은 대산면 장암리 333번지에 소재하는 정자로 한여름 강에서 떠오르는 일출이 아름다워 악양루의 석양과 함께 함안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꼽힌다.

1557년 8월 11일 가야읍 검암리에서 태어나 의병장으로 활약한 두암(斗巖) 조방(趙방)이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낙동강가의 웃개나루(上浦)에 있었는데 허물어져 1866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문장으로 유명한 성재 허전이 기문을 지었다.

 조방은 형 조탄과 함께 1592년 4월 22일 곽재우 장군과 창의했으며 정암나루와 남강과 낙동강이 합치는 기강 등지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는 금오산성의 적을 격퇴하고 화왕산성을 지킨 인물이다.

용화산의 중턱으로 옛날 청송사가 있던 곳에 자리한 반구정은 확 트인 시야로 남지들판과 낙동강의 굽이치는 절경을 조망할 수 있어 항상 사진작가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 반구정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회가 안정을 찾을 무렵 옛날 의병장으로 활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뱃놀이를 즐긴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 바로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과 용화산하동범지도(龍華山下同泛之圖)이다.

1586년부터 1588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내며 함주지를 지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는 1607년 정월에 함안군 대산면에서 남지로 건너가는 도흥나루에 내려온다. 군수로 지낼 때 돌을 구해 옮기던 중 강가에 두었는데 잃어버려서 잠수부를 불러 그 돌을 찾고자 한 것이다.

정구가 내려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과 함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창암정에서 하루 밤을 자고 배를 타고 도흥나루로 오는데 함안군수였던 박충후(朴忠後, 1605∼1607년 재임, 선정비를 세웠음, 함주지 기록)도 마중을 나왔다.

또 합강정에서 이 소식을 들은 입암(立암) 조식(趙埴)이 금라전신록을 지은 아들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에게 연락해 조임도가 장춘사에서 책을 읽다가 길을 나서 아버지와 함께 삼촌 두암(斗巖) 조방(趙방)이 지내는 반구정에서 자고 다음날인 정월 28일 술과 안주거리를 마련한 세 사람이 배를 타고 도흥나루로 정구를 찾아간다.

이날 의병장 신초를 비롯해 남명 조식의 문하로 곽재우와 함께 의병에 참여한 함안의 이명호, 박진영, 이명경과 따로 의병활동을 한 이길, 이숙, 이명념, 이명각, 이명여 등 함안사람 14인, 영산 10인, 창녕 1인 등 총 35명이 모였기에 배를 타고 우포를 향해 십리 길의 뱃놀이를 즐기는데 조식, 조장, 조임도가 편주에 술과 안주를 싣고 뒤따랐다.

자리가 익었을 때 정구가 이를 기록해 두자고 제안해 이명호가 붓을 들고 먼저 정구, 곽재우, 박충후, 장현광 네 명의 이름과 자(字), 호(號), 생년, 거주지, 본관 등을 차례대로 적고는 다른 사람은 나이순대로 35명의 이름을 적었다.

정구가 직접 시켜 용화산하동범록이라고 제목을 적었는데 한 부는 정구가 가져가고 처음에 만든 초안을 안정(安정)이 가져갔는데 14년 후에 조임도가 이를 보고 싶어 하자 안정이 엮어 둔 것을 주었다. 조임도가 감격해 동범록이 만들어진 사연과 경과를 적고 또 나중에 동범록을 보면서 느낀 점 등을 추가했다.

140여 년 후 박진영 장군의 증손자인 박상절(朴尙節)이 조임도의 고손자인 조홍엽을 방문했을 때 이를 보여줌에 다시 그 감회를 적고 당시의 일과 그 일대의 장관을 그린 용화산하동범지도의 여덟 그림을 그리고 각 그림마다 시를 붙여 추록했다.

처음에는 단지 35명의 이름밖에 없었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나라를 구한 당대의 의병장이자 학자들이 모여 뱃놀이를 한 뜻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하니 실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결국 돌은 찾지 못했지만 용화산하동범록과 동범지도가 남겨진 것이 돌을 찾은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출처 : 함안군청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