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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24. 안동 예안 이씨 충효당 - 어질음과 공경으로 이웃을 받든다

 

 

 

 

 

 

 

 

 

 

          안동 예안 이씨 충효당忠孝堂

 

 - 충성과 효도로 가문을 이어가고 어질음과 공경으로 이웃을 받든다 -

 

 

 

 

 안동 시내에서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방면으로 길을 잡아서, 국도 34호선을 한참 달리다보면 갑자기 산과 인가가 사라지고 풍산읍의 드넓은 들판을 만나게 된다. 중앙고속도로의 서안동IC가 외곽을 통과하기도하는 풍산읍은, 남쪽 방향의 나지막한 구릉과 골짜기 사이사이에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고,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은 매곡천과 상리천을 중심으로 한 풍산평야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다.

 풍산평야는 보문산에서 발원하는 매곡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불노봉에서 발원하는 상리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됨으로써, 낙동강, 매곡천, 상리천 유역에 삼각주가 형성되어 관개용수가 풍부하면서도 비옥한 곡창지대를 만들었다.

 

 

 

 

 

충효당 전경 ( 2006. 09.)

 

 

 

 

 

 풍산읍내의 우체국 근처의 중심가 도로변에는 고색창연한 정충각과 정효각 두 정려旌閭가 나란히 서 있다. 이 정충각旌忠閣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예안 이씨 이홍인 선생(1525~1594)께 내려진 정려이고, 정효각旌孝閣은 이홍인 선생의 9대손인 이한오 선생(1719~1793)의 효행에 대해 국가에서 내린 정려이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한 집에서 충신과 효자가 한꺼번에 났다고 해서 풍산들 우렁골의 예안 이씨 종가집을 충효당忠孝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정충각 및 정효각  

 

 

 

 

 뿐만아니라 풍산읍내로 들어서는 입구의 낮은 언덕 아래에 자리 잡은 체화정棣華亭도 예안 이씨 집안과 관련이 있다. 체화정은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이민적 선생이 지은 정자로서, 정자 앞을 지나는 풍산천의 흐름을 그대로 살려서 중간에 3개의 석가산을 쌓고 연못을 조성하여 체화지棣華池라 불렀다. 기존의 개천에 섬 3개(봉래산, 방장산, 영주산)만 간단히 추가하여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을 표현하고, 형님인 이민정 선생과의 화목과 우애를 두터이 하였던 형제간의 정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리고 그림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단원 김홍도의 진귀한 글씨 현판, ‘담락재湛樂齋’도 그 곳에서 구경할 수 있다.

 

 

 

 

체화정 전경 ( 2011.04.)

 

 

 

 

 

 체화정을 나와서 풍산초등학교 근처의 안교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다리를 건너고 농로를 따라 쭉 직진하면, 너른 풍산들판과 작은 야산에 묻혀 있는 풍산읍 하리부락(우렁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근 하회마을의 명성에 가려서 덜 알려져 있지만, 전의 이씨와 예안 이씨들이 수 백 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 온 이 유서 깊은 마을에는 하리동 일성당日省堂과 예안 이씨 충효당忠孝堂 같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

 

 

 

 

 

 

 

충효당 전경 ( 2006. 09.)

 

   

하리동 일성당 전경

 

별당 정자와 충효당의 몸채 ( 2005. 08.)

 

 

 

 

 

 

 우리가 생활하는 집의 이름, 즉 당호堂號중에서 가장 흔하고 많은 것이 아마 충효당忠孝堂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집안들이 염원을 당호에 담았을 뿐, 몸소 행하고 명실상부하게 실천한 사례는 예안 이씨 충효당이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정충각旌忠閣을 하사받은 이홍인 선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재를 털어서 무기를 만들고 군량을 준비하여 700여 명의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관군들이 패퇴하자. 노구를 이끌고 예안, 풍천 등지에서 왜적들을 격파하고 안동지역을 방어하는 의병장으로 고군분투하였으나 구담전투에서 향년 69세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정효각旌孝閣을 하사받은 이한오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시중은 하인이나 종을 시키는 법이 없이 항상 몸소 받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버님이 병을 얻어 아주 위독하였는데, 백약이 소용없었으나 잉어와 꿩이 특효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추운 겨울에 꿩고기를 찾아서 여러 날 산천을 헤매었어도 찾을 수 없어,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분 앞으로 꿩 한 마리가 스스로 날아들어 죽었다고 한다.

 또, 잉어를 잡기 위해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낚시를 던져서,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겨우 잉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돌아오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선생은 “잉어는 절대로 내놓을 수 없다! 아픈 어른께 드리고 다시 올테니 기다려라!” 하고서, 길을 비켜주면 나중에 돌아와서 자신의 몸을 대신 주겠다며 애원하자, 호랑이도 탄복해서 밤길을 안내해 주었다는 동화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호랑이가 지켜주는 하늘이 낸 효자(出天之孝)라고 주변의 칭송이 끊이지 않자, 순조 임금이 효자 정려를 내리니, 예안 이씨 충효당은 명실공히 충과 효를 겸비한 명문으로서의 주변의 칭송과 함께 지역사회의 자랑으로서 두고두고 모든 가문의 귀감이 되어왔다.

 

 

 

 

 

연못에서 본 충효당 전경 ( 2006. 09.)

 

몸채와 별당 사이로 보이는 풍산들판 ( 2005. 08.)

 

별당 아래서 본 풍산들판 ( 2006. 09.)

 

 

주차장쪽에서 본 충효당 전경 ( 2006. 09.)

 

 

 

 

 

 주택으로서는 몇 안되는 보물(제 5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예안 이씨 충효당은, 조선 중엽(명종 6년, 1551년)에, 이홍인 선생이 큰댁에서 출가하면서 건물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기름진 풍산평야와 풍산읍, 상리천의 넓은 전망이 한 눈에 펼쳐지는 나지막한 야산의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지세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배산임수의 원리를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서 충효당의 배치는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충효당의 구성은 오른편에 충효당忠孝堂 현판이 걸려있는 ㅁ자형의 본채와 왼편에 쌍수당雙修堂 현판이 걸려있는 별당, 정자 1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행랑채와 솟을대문은 예전에 사라지고 담장으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진입부의 위치도 반대편으로 옮겨졌고, 현재 주택 진입부로 사용되는 건물 서북쪽 입구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겨울철 찬바람을 막기 위한 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가 안채에 맞붙어 있어,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정을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측면의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었지만 지금은 정면의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연못에서 본 충효당 전경 ( 2011. 04.)

 

별당과 몸채사이 ( 2005. 08.)

 

북측에서 본 충효당 전경 ( 2011. 04.)

 

 

 

 

 

 사랑채는 자연석 기단을 2층으로 설치했다. 살림집의 기단을 2층으로 쌓은 예는 흔하지 않지만, 전면의 탁 트인 풍산들의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공간구성은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편에 3칸의 사랑공간을 배치하고 오른편에 마구간과 방이 1칸씩이다. 사랑공간은 1.5칸의 사랑방이 중문과 연이어져 있고 그 옆으로 역시 1.5칸의 사랑마루가 놓였다. 대개 사랑공간이 3칸일 경우에는 2칸의 방을 내고 1칸 크기의 사랑마루를 까는 것이 일반적이나 충효당의 경우에는 방을 반 칸 줄이는 대신 사랑마루를 반 칸 늘여 마루의 기능을 키웠다.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쪽마루로 연결하여 출입에 불편함이 없도록 고려하였고, 일반 사대부집의 사랑채에 비해서 실용적이고 소박한 모습을 띄고있다.

 

 

 

 

 

 

충효당의 주출입구 ( 2006. 09.)

 

충효당의 몸채 ( 2011. 04.) 

 

 

 

 몸채  전경( 2011. 04.)

 

 

 

 

 

 

 안채는 왼편부터 부엌 1칸,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이 1칸이다. 안방 앞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아 대청과 건넛방으로 이동하기가 편리하도록 하였다.

안방의 드나드는 문은 바깥 테두리 틀을 짜 맞추었고  대청의 판장문도 문틀을 짜 맞추었다.
 안채를 구성하는 기둥의 형태는, 전면 가운데 3개의 기둥은 싸리나무로 된 원형 기둥이고 나머지는 소나무를 쓴 사각형의 기둥이다. 또한 부엌의 내부에는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팔각형의 기둥이 하나 더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기둥을 볼 수 있다.

안채는 다른 부분에 비해서 그나마 변형이 덜 되어 초기의 모습을 비교적 많이 간직하고 있다.

 

 

 

 

안 채 - 1  . 마루에 종부 할머니가 앉아 계신다 ( 2006. 09.)

 

 

안 채 - 2 ( 2005. 08.)

 

안 채 - 3 ( 2011. 04.)

 

 

  안 채 - 4 ( 2011. 04.)

 

 

 

 

 

 본채의 왼편에 자리를 잡고 풍산들판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중층의 정자 이름은 쌍수당雙修堂이다. ‘충과 효를 쌍(雙)으로 닦는 집’이라는 의미다. 충과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라 하여 백원당百源堂이라는 당호도 함께 갖고 있기도 하다.

 평면구성은 북쪽인 왼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누마루를 두고 남쪽인 오른쪽에 한 칸 반 크기의 온돌방과 반 칸 폭의 퇴를 두고 돌계단을 통해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기둥의 형태는, 하부의 경우에는 아름드리 나무를 생긴 모양대로 사용하여 굴곡을 그대로 살려서 자연미가 느껴지며, 상부의 경우에는 건물 전면은 원주를 썼고 뒷면은 각주를 사용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기품을 살렸다.

 

 

 

 

 

 별당 쌍수당 - 1 ( 2006. 09.)

 

 

별당 쌍수당 - 2 ( 2005. 08.)

 

 

 별당 쌍수당 - 3 ( 2011. 04.)

 

 

 

 

 

 풍산들을 삶의 근거지로 삼은 예안이씨 충효당은 양반주택의 기품보다는 서민적 특성이 드러나는 전통가옥이다.

 농가적 특성이 드러나는 사랑채는 실용적인 면을 살려 실생활 공간들이 함께 배치되었고, 다듬지 않은 기단, 생긴 그대로의 목재를 사용한 들보와 서까래 등에서 자연친화적 정신도 엿볼 수 있다. 반면 쌍수당은 누다락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별당 건축양식의 좋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정리하면, 조선중기에 지어진 풍산의 예안이씨 충효당은 사대부가의 건축양식과 민가의 실용성이 결합된 자연미가 돋보이는 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충효당 입구의 백일홍 ( 2006. 09.)

 

 

 

 

 

 현재, 예안 이씨 충효당의 안주인은 구순이 넘은 안동 권씨 권기선 할머니이시다. 20대 꽃다운 시절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외아들을 훌륭히 키워내셨다.

 내가 2005년과 6년, 두 차례 충효당을 방문했을 때는, 혼자서 충효당을 지키고 계셨지만, 지난해 봄에 매화가 필 무렵 오랜만에 다시 방문하니, 할머니께서는 검은 머리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백발이 되셨고, 귀도 많이 어두워지셨다. 그러나 서울에 거주하던 아드님이 귀향하여 노모를 봉양하고 계셨다. 아드님 이준교 씨는 언론계에 종사하셨던 분인데 집안의 전통에 따라 종손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실천하고 계셨다.

 지난 해 가을, KBS의 추석특별기획 <종가, 500년의 초대>라는 프로그램에서는, 93세의 노모에게 손수 밥을 지어 수발하는 67세의 아들 이준교 씨의 효행이 충효당의 역사와 함께 미담으로 방송된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매스콤의 조명을 받았다. 눈망울이 큰 탤런트 이세은 씨도 예안 이씨 집안의 출신이라고 한다.

 

 

 

 

 

텃밭에서 본 충효당 전경 ( 2005. 08.)

 

 

 

 

 

 종손께서 직접 운영하는 충효당 홈페이지에는, 충효당의 정신과 역사와  언론보도자료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일화들이 잘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채마전’에 대한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충효당은 대지가 별로 넓지는 않으나 텃밭이 대여섯 뙈기는 된다. 근래 에 쌓은 담장 안쪽도 내가 어렸을 때는 밭이었지만 지금은 마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남쪽 마당에는 지금도 두어 평 가량의 손바닥만한 밭이 남아있다. 효자 할아버지의 사연이 어린 채마전이다.

 

편찮으신 아버지께서 엄동설한에 갑자기 잉어와 꿩고기가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중략)

 

......이튿 날은 꿩을 찾아 뒷산을 온통 헤맸으나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날이 저물자 '정성이 부족해 꿩을 잡을 수 없다'고 탄식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때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남쪽 텃밭에 날아들었다. 용눌재께서는 '이는 하늘이 주신 은혜'라 생각하며 꿩을 붙잡아 잉어와 함께 이치탕(鯉雉湯)을 만들어 봉양했다. 이로 인했음인지 마침내 입맛을 되찾고 쾌차하셨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이웃고을 사람들까지, '효자는 호랑이도 보호한다'면서, 역시 '효자는 하늘이 알아보고, 큰 효자는 하늘이 낸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효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나도 크면 부모님께 효도하리라 굳게 다짐하곤 했다. 효자 할아버지 앞에 꿩이 날아와 떨어진 곳, 바로 그 자리가 채마전이다. 커다란 밭 한 뙈기를 모두 마당으로 만들면서도 이곳만은 지금도 남겨 두고 있다.

 다른 농작물은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집 텃밭엔 요즘에는 콩을 주로 심는다. 그런데 콩씨를 뿌려 놓으면 싹이 나기도 전에 뒷산에서 꿩들이 날아와 부지런히 파먹는다. 때로는 대여섯 마리씩 무리지어 날아든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이 꿩들을 쫓아버리지 않으신다. '너들이랑 나랑 농개(나누어) 먹자. 너들 먹고 남는 건 우리가 먹지' 하신다. 그러다보니 콩씨를 두세 번씩 심는 것은 예사다.

 

“훗날, 내가 없더라도 밭에 내려온 꿩을 나무라지 말거래이. 짐승도 은혜는 갚는다는데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제. 혹시 우리 집에 오는 꿩은 할배(할아버지)께서 봉양하신 꿩의 후손들일지도 모르니까!” 하신다. 연세가 아흔 셋이신 어머니께서는 머리카락이 새하얀 아들에게 꿩의 뒷날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채마전은 우리 식구들이 꿩들에게 은혜 갚는 밭이다.“

 

 

 

 또, 이런 인터뷰 글도 홈페이지에 있다.

 

“......회갑을 지난 내 나이에도 어머니가 곁에 계신다는 것만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축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시대의 충忠은 자신의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고, 효孝는 부모에게 걱정을 안 끼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효행일 수 있다.....”

 

                                                                      ( 자료 출처 : 충효당 홈페이지 www.chunghyodang.net )

 

 

 

 

 

 

 

 서쪽 중문 너머로 보이는 풍산들판 ( 2011. 04.)

   

 

 

 

 

 

 

 ‘충성과 효도로 가문을 이어가고 어질음과 공경으로 이웃을 받든다. (家傳忠孝 世守仁敬)’ - 충효당의 가훈이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과 세계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우리시대의 화두는 ‘웰빙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의 추구’가 대세인 듯하다. 이것을 가훈으로 정리하면 ‘열심히 일하고 모아서 건강하게 한평생 잘살자‘ 정도의 내용이 될 수 있겠는데, 충효당의 가훈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남을 느낄 수 있다.

 충효당에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있고 자기에 대한 고려가 없다.‘ 반면에 우리시대는 ’자기에 대한 고려만 있고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다.‘

 

 충효당의 가훈에는 500년 이상 지켜 온 삶의 지혜가 묻어있다. 우리 이웃과 사회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나만의 스위트 홈은 모래성과 다를 바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이것은 최근에 우리사회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는 흉악한 범죄현상으로도 증명이 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의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사회정의와 경제정의 측면에서는 그 만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소득 불균형의 심화와 소외, 그리고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등의 폐해를 초래하게 되었고, 따라서 반인륜적이고 흉폭한 범죄들이 최근에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범인이 피해자의 이웃이고 보면 우리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물질보다는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자신과 학문을 갈고 닦았고 그 실천의 첫걸음으로, 내가 먼저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면, 결국 그 이웃이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재물보다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차원 높은 삶을 추구하였다.

 지금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경제관은 앞으로의 생명력이 결코 길지 않겠지만,

충효당에서 수 백 년을 이어온 인본주의적 사회관은 앞으로 수 백 년 이상 면면히 이어질 것임은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내가 예안 이씨 충효당을 방문했을 때마다 종부 할머니께서는 항상,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시고, 멀리서 답사 온 손님을 맨입에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믹스커피를 직접 끓여 주셨다.

 커피와 한옥은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은 기우杞憂이다. 대청에 걸터앉아 하늘 한번 보면서 마시면 더욱 운치도 있고, 한옥의나무 냄새와 커피향도 아주 잘 어울린다. 더군다나 종부 할머니의 인정까지 담겨 있으니!

 

 죄송스럽게도 할머니로부터 커피 대접을 받을 때마다 나는, 다음에 답사 올 때는 답례로 사탕이라도 준비하리라고 다짐했지만, 아직껏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다.

 

 

 

 

 

                                                                                                              2012.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