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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21. 달성 삼가헌 - 일편단심, 붉은 연꽃으로 피어나다

 

 

 

 

 

 

 

 

 

 

 

      20. 달성 삼가헌三可軒

 

- 일편단심, 하엽정의 붉은 연꽃으로 피어나다

 

 

 

 낙동강 7백리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는 달성군은, 1995년 경상북도로부터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었지만 대구광역시에 속해 있는 유일한 군郡 지역으로, 비슬산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산지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평지로 나누어진다. 예로부터 낙동강 주변을 따라 넓은 충적지가 발달해서 주요 곡창지대를 이루었고, 최근에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을 비롯하여 섬유공업이 달성군의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더불어 각종 고속도로와 국도가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 편리성을 기반으로 하여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달성군의 3개 읍과 6개 면으로 나누어진 행정구역 중에서도 섬처럼 북쪽에 뚝 떨어져 위치하면서, 최근에 대구교도소 이전사업으로 인해 한동안 홍역을 치뤘던 하빈면 지역의, 역사 깊은 묘리 마을에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육신사六臣祠와 순천 박씨의 세거지 묘골마을이 있다.

 

 

 용이 마을을 휘감고 있는 형세라는 묘골마을의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위치한 육신사六臣祠는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목숨을 잃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 혼자만 후손에 의해서 배향되어 오다가, 선생의 제삿날에 나머지 다섯 어른이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게 된 5대손이, 그 뒤부터는 나머지 다섯 분도 함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인근 유생들의 노력으로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모셨는데, 하빈사는 나중에 낙빈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한참 뒤에 일부만 재건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에 따라 주요구조부를 콘크리트 만든 전통양식 건물, 지금의 육신사를 묘골마을에 건립하게 되었다.

 

 

 

 

육신사 전경 ( 2012.05.20.)

 

태고정 전경 ( 2012.05.20.)

 

1. 충효당                                         2. 도곡재

3. 사육신 기념관                                                                                    4. 묘골마을

 

 

 

 

 

 잘 알려진 바대로, 사육신들은 세조에 의해 그 자신의 직계는 물론이고 일가친척 3족까지 멸문지화를 당해서 모두다 후손이 끊어져서 제사를 지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조상이 돌봤는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손이 한 명 있었으니, 박팽년 선생의 손자인 박일산 이었다.

 박팽년 선생은 충남 회덕에서 태어나 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아버지와 동생, 아들 3형제 등 삼대가 함께 죽임을 당했다. 세월이 흘러 숙종 17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영조 때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조선의 진정한 선비였다.

 박팽년 선생의 혈육들이 모두 극형을 받을 무렵, 둘째 며느리인 성주 이씨가 임신 중이었다. 나라에서는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천우신조로 성주 이씨는 아들을 낳았는데 마침 그 때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서로 바꿔치기하여 아들을 살릴 수 있었다. 박씨 집안의 혈손을 맡은 이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숨어 살면서 이 아이를 박씨 성을 가진 노비란 뜻으로 박비朴婢라고 불렀다.

 훗날 박비가 자라 청년이 되어 사육신에 대한 평가가 호전되었을 무렵 외가 쪽의 도움을 받아 자수를 하자, 성종임금은 특별히 사면을 시키고 이름을 하사하기에 이른다. ‘유일하게 귀중한 자손’이라는 뜻을 담은 박일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박팽년 선생의 유일한 혈육은, 외가인 묘골마을을 터전으로 한 순천 박씨의 입향조가 되어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하여 묘골마을은 수백 년 동안 순천 박씨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고,  종가집인 태고정을 비롯하여 충효당, 금서헌, 도곡재 및 삼가헌 등의 유서 깊은 고택들과 충절의 정신을 지켜왔다. 

 

 

 

 

 

태고정에서 본 묘골마을 ( 2012.05.20.)

 

파회마을 삼가헌 전경 ( 2012.05.20.)

 

 

 

 

 

 

 근래에 신축한 사육신기념관이 있는 묘골마을의 입구에서 왼편 지름길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파회마을이 나오는데 - 차량통행은 불가 -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TV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유명했던 전통한옥, 달성 삼가헌三可軒이 있다.

 묘골마을에서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경계로 북쪽이 본동, 남쪽이 파회마을이다. 안동의 하회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간다고 해서 물 하河 자를 써서 하회河回지만, 파회坡回는 언덕이 물굽이 치듯 마을 뒤를 감쌌다고 해서 언덕 파坡 자를 붙였다 한다.

 

 박팽년 선생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 선생이 파회마을로 분가하여 초가로 안채를 건립하고, 자신의 호를 따라 삼가헌 이라는 문패를 걸었다. 그 뒤 둘째아들 박광석 선생이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고, 1874년에는 손자 박규현 선생이 할아버지가 삼가헌을 지을 때 흙이 필요해서 팠던 곳을 연못으로 만들고 주변에 국화와 연꽃을 심고 정자를 만들어 하엽정荷葉亭이라 불렀다. 그렇게 해서 4대에 걸친 100여 년이 걸려서 삼가헌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좌측이 별당채, 우측이 사랑채이다. ( 2012.05.20.)

 

사랑채와 우측 중문채의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다. ( 2006.07.15.)

 

 

 

 

 

 

 1970년대에 이미 일본 방송국에서 찾아 올 정도로 아름다운 연못과 정자를 가진 삼가헌의 구성은  살림채와 별당채의 영역,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살림채는 ‘ㄴ’자 모양의 사랑채와 ‘ㄷ’자 모양의 안채가 서로 맞물려 튼‘ㅁ’자형을 이루었고, 별당채는 연꽃정원과 하엽정, 그리고 뒷산 대나무 숲과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뛰어난 풍광과 운치를 간직하고 있다.

 

 삼가헌三可軒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사랑채에 걸린 삼가헌기三可軒記 현판에 잘 설명해 놓았다.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다.)”가 어원으로 중용中庸에서 따왔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지知이고, 벼슬을 거부하는 것은 인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용勇에 해당하는 것으로.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3가지를 모두 갖추고 은거하는 선비의 자세를 말함이라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 측면을 거쳐야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마루방, 청지기방을 두었고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 뒤쪽으로 돌출된 날개채 중에서 한 칸은 마루, 한 칸은 작은 사랑이다. 마루 한 칸은 벽감을 만들어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쓰고 있고, 작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 걸어 둔, 유교적 윤리 강령을 여덟 글자로 압축해 놓은 禮義廉恥孝悌忠信(예의염치효제충신)이라고 쓰여 진 현판은 전서체의 명필, 미수 허목 선생의 글씨이다.

 사랑채 지붕의 구조는 좌우의 모양을 달리해서 대청 위쪽은 팔작지붕이고 중문 위쪽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했다. 이런 비대칭 지붕구조는 묘골마을의 종가집인 태고정(보물 155호)의 지붕과 같은 형식으로서, 태고정을 본 뜬 결과로 추정할 수 있다.

 

 

 

 

 

 1. 사 랑 채 ( 2012.05.20.)                                            2. 대청마루

 3. 삼가헌기  현판                                                         4. 사랑채에서 본 대문채

 

  안 채 - 1 ( 화재전 모습   2005.02.06.)

 

안 채 - 2 ( 화재전 모습   2005.02.06.)

 

 

 

 

 

 안채는 ㄷ자형태의 구조로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 영역에는 장독대, 곳간채, 우물 및 옥외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안채는 2009년 4월 달에 화재로 소실되어 국민기금으로 다시 복원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나마

건넌방 날개채 일부가 피해를 입지 않아 과거의 목구조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랑마당에서 안채로 진입하는 통로인 3칸 규모의 중문채는 초가로 되어있다. 집안의 모든 건물이 기와집인데 중문채만 유일하게 초가집이다. 초막으로 삼가헌의 기초를 놓았던 박성수 선생의 정신과 검소함을 기본으로 삼았던 선비정신의 결과물로 보면 틀리진 않을 것이다.

 

 

 

 

 

  사랑채와 중문채 ( 2012.07.27.)

 

사랑채 대청마루  - 예의염치효제충신 - ( 2012.05.20.)

 

안채의 날개채 ( 화재후 복원된 모습   2012.05.20.)

 

  안 채 ( 화재후 복원된 모습   2012.05.20.)

 

 

 

 

 

 삼가헌의 자랑인 하엽정은,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 앞을 지나 별당채를 둘러 싼 흙담 사이의 쪽문을 통과하면 배롱나무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엽정은 원래 서당으로 썼던 4칸의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나중에 현재의 ㄱ자 형태로 돌출된 누마루를 추가로 설치하고 연못 앞으로 이축해서 연당과 어우러진 별당채를 완성시켰다. 그래서 정자에는 파산서당

巴山書堂과 하엽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있다.

 연못의 크기는 폭12M, 길이 18M 정도의 직사각형으로서, 집안의 연못 규모로는 조금 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돌로 2~3단의 축대를 쌓고 연못 한 복판에는 둥근 인공 섬을 조성하여, 방지원도方池圓島의 전형적인 우리나라 연못형식을 따랐고, 대나무를 걸쳐서 다리를 만들었다.

 

 

 

 

 

별당채 하엽정 - 1 ( 2012. 07. 27.)

 

별당채 하엽정 - 2 ( 2012. 07. 27.)

 

별당채 하엽정 - 3 ( 2012. 07. 27.)

 

 

 

 

 

 하엽정荷葉亭이라는 정자 이름은 ‘연꽃 잎의 정자’라는 뜻이다. 박규현 선생은 연꽃보다 잎을 더 사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군자君子의 꽃으로 칭송받는 연꽃의 아름다움이야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산들 바람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연잎들이 부딪히며 내는 노래소리와 깊은 밤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면 연잎의 정취 또한 연꽃 못지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귀와 가슴으로 느끼는 시적 감흥이

시각적 즐거움을 능가하는 진귀한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별당채 하엽정 - 1 ( 연못에 연꽃이 보이지 않았던 여름.  2006. 07. 15.)

 

별당채 하엽정 - 2 ( 2012. 05. 20.)

 

별당채 하엽정 - 3 ( 2012. 05. 20.)

 

별당채 하엽정 - 4 ( 2012. 07. 27.)

 

사랑채에서 본 별당채 하엽정 ( 2012. 05. 20.)

 

 

 

 

 내가 처음으로 삼가헌을 방문했던 것은 2005년도의 설날에 가족들과 함께였지만, 2006년 여름, 장마철에  다시 찾아갔다. 연꽃이 만발한 하엽정을 보기위해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찾아갔건만 연꽃은 흔적조차 없었다. 최근에 연못을 정비하면서 품종개량을 위해 기존 연꽃을 모두 뽑아 버렸다고 했다.

‘개악改惡’이라는 말이 그때처럼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었다.

 2005, 2006년 그 당시에는 삼가헌의 후손들이 직접 거주하지 못하고 관리인을 두어 집을 돌보던 시기였었다. 주인이 직접 살지 않다보니 집안 곳곳은 을씨년스럽고, 집안의 역사를 지켜온 연꽃마저 뽑혀 나간 것 같아 마음이 무척 편치 않았었다. 2009년도의 화재도 누전으로 판명되었지만 역시 안타까운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별당채 하엽정 - 1 ( 2012. 07. 27.)

 

별당채 하엽정 - 1 ( 2012. 07. 27.)

 

별당채 하엽정 - 1 ( 2012. 07. 27.)

 

 

 

 

 

 

 올해 들어 삼가헌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 봄에 갔을 때는 주인어른이 사랑채를 지키고 있었다. 집안에는

생기가 돌고 아까부터 쫄쫄쫄 따라다니는 강아지도 살이 토실토실 올랐다.

사랑방의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이 고택과 묘한 조화를 이루어 신비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인어른이 외출 준비 중이라 별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일어섰다.

 

 여름에 갔을 때는 집안에 행사가 있었는지 친척들로 붐볐다. 조용히 별당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배롱나무, 옥잠화, 난초, 꽃이 진 모란, 그리고 활짝 핀 연꽃에 둘러 싸인 하엽정은 한 여름의 꿈을 꾸고 있었다.

 연못은 바닥과 가운데 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연잎으로 덮혀있어, 싱싱하고 푸른 연잎을 밟고 연못 속을 돌아다니고 싶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갑자기 뒷산의 우렁찬 매미소리와  낯선 손님만이 이 고요한 정적을 아쉽게 깨뜨리고 있었다.

 

 나오는 길에 잠깐 뵌 주인어른은, 집안의 토종 연꽃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지만, 새로 심은 연꽃도 충정공 박팽년 선생의 지조와 일편단심을 닮아서인지 유난히 곧고 붉은 자태로 삼가헌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2012. 08. 15.

 

 

 

 

 

 

                 1940 년경의 삼가헌 전경 ( 자료 : 삼가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