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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19. 괴산 김기응가옥 - 담장마다 사랑의 수를 놓다

 

 

 

 

 

 

 

 

 

 

    19.  괴산 김기응 가옥

 

- 담장마다 사랑의 수를 놓다 -

 

 

 

 

 한강과 금강의 발원지이자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여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괴산군은 동쪽으로는 월악산국립공원이, 남쪽으로는 속리산국립공원이 위치하고 있어, 우암 송시열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낸 화양구곡을 비롯하여 선유동구곡,  고산9경처럼 ‘9’자를 강조한 관광명소들이 군내 곳곳에 즐비하다. 일반적인 8경으로도 부족해서 9경이니, 살기 좋고 경치가 뛰어난  강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고장이다.

 

 괴산에서 34번 도로를 따라 문경, 연풍 쪽으로 달려서 달천을 건너면, 칠성면의 중앙지역에 해당하는 율원리 성산마을이 나타난다. 소백산맥의 힘찬 정기가 남서로 뻗어 내린 군자산의 끝자락에, 성 모양의 뒷동산이 병풍처럼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성산마을은 넓은 옥토가 마을 앞으로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부락으로서 마을의 중심에는 꽃담과 공간구성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김기응 가옥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 배치도

 

 

외부 담장 (2012. 05.)

 

 

 

 

 

 

 

 일명 ‘칠성고택’이라고도 불리는 김기응 가옥은 1800년경에 지어진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으로서 1910년경 고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김항연 선생(김기응 선생의 조부)이 매입하여 중수하였다. 김향연 선생은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고향인 소수면 근처 이곳으로 낙향하여, 기존의 낡은 주택을 사들여 안채부분을 제외한 많은 부분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축 당시의 구조가 거의 대부분 보존되어 있고,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벽체, 아름다운 공간구성 등에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문너머 행랑마당.  가운데 부분에 중문간채 출입구가 보이고 우측에 담장너머 사랑채가 보인다 (2012. 05.)

 

 

                      안채 대청너머 장독대 (2012. 05.)

 

 

 

 

 김기응 가옥의 전체적인 구성은, 경사가 완만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대문채, 중문간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광채, 헛간채로 이루어지는 규모가 상당히 큰 부농의 집이다.

 긴 바깥행랑채의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서쪽에는 또 하나의 광채가 길게 배치되었고, 광채 위쪽으로 중문간채,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별도의 담장을 두른 사랑채는 바깥마당보다 한 단 높여서 일각대문을 설치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별당別堂 형식이고,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왼쪽 문간채 중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행랑마당이 나타나고 다시 오른 쪽 위 쪽의 중문을 들어서면 그제서야 안채마당에 이르게 되는 공간이 아주 깊은 집이다.

 

 

 

 

         

 

중문간채 마당과 내외벽 (2012. 05.)

 

                  중문간채 마당과 안채 출입용 중문 - 1 (2006. 08.)

 

중문간채 마당과 안채 출입용 중문 - 2 (2012. 05.)

 

중문간채 마당  (2006. 08.)

 

                    중문간채에서 사랑채로 가는 통로 (2005. 01.)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부엌, 안방, 대청, 뒷방을 일렬로 놓고, 꺾어져서 마루, 건넌방, 부엌을 두었다. 서쪽의 부엌은 4칸 규모로 다른 집보다 상당히 클 뿐만 아니라 모서리에 배치하여 뒷마당과의 연결을 쉽게 하였고, 안방에서 건넌방 앞까지 툇마루를 설치해 통로로 이용한 점도 특색이 있는 햇볕이 잘 드는 집이다.

 

 

 

 

 

안채 지붕너머 군자산이 보인다 (2006.08.)

 

안채 마당  (2006. 08.)

 

                  안채 대청 (2006. 08.)

 

안 채 (2006. 08.)

 

 

 

 

 

“ㄱ자형의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뒷면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은 모두 겹처마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크고 작은 사랑방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사랑방 동쪽에 누마루를 덧달아서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는 앞마당과 옆마당이 있고 또, 안행랑채와 사랑채 사이에 사랑채 뒷마당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 이 뒷마당은 중간 행랑 마당과 연이어 있지만 담장으로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어서 행랑마당에서는 이 사랑채 뒷마당이 인식되지 않는다. 즉, 사랑채의 앞마당은 전면 행랑마당을 통해서 연결되고 있지만, 뒷마당만은 안채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이는 외적으로는 남녀유별을 지키고 있지만 실생활에서의 편의는 고려한 배치형태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랑채에 딸린 정원과 안채 사이에 조성된 샛마당은 이 같은 편리성 외에도 내담 벽을 각종 문양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 놓아 특별한 공간적 감동을 준다.

 

이처럼 김기응 가옥에서는 각 건물 사이에는 내담을 쌓아 공간구분을 하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공간들이 여러 가지 대문들과 연결되어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구성을 이루고 있다. 미로 같지만, 그 은밀함이 공간감을 살리면서 각 채의 정체성을 보다 특별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자료출처 : 주택저널)

 

 

 

 

사랑채 -1 (2012. 05.)

 

사랑채 - 2

 

 

중문간채 마당 담장너머 굴뚝이 있는 곳이 사랑채 샛마당이다 (2012. 05.)

 

 

 

 

 

 마당 깊은 집, 김기응 가옥의 또 하나의 큰 자랑거리는 꽃담에 있다. 꽃담은 아름다운 무늬나 그림을 넣어 장식한 담장을 말하는데 화초담花草墻, 화문담花汶墻으로도 불린다. 꽃담의 백미로 꼽히는 경복궁 자경전과 교태전의 꽃담을 비롯하여 사찰과 서원, 사대부와 민가주택, 그리고 굴뚝에 이르기까지 장식의 화려함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다양한 문양의 그림과 글씨  등 희망사항을 새겨서 함께 감상하고 소원도 빌었다. 

 

 

 

내부 담장 (2012. 05.)

 

사랑채 샛마당의 꽃담 (2006. 08.)

 

 

 

 김기응 가옥에도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외곽의 화방벽 말고도 다양한 무늬의 담장이 곳곳에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샛담과 사랑채 손님들의 시선을 막기 위한 내외담, 중문간채의 내외벽, 그리고 토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사랑채 뒤뜰의 담장이다.

 사랑채 뒤편과 안채의 행랑채 뒤편 사이에 공간이 넓지 않아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샛마당이 있는데, 사랑방에서 마주 보이는 그 샛마당 담을 꽃담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부귀와 장수를 뜻하는 글 무늬를 좌우 에 배치하고 가운데에 연속무늬를 넣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을 뜻하는 연속무늬의 모서리에는 박쥐를 넣어 다산多産을 기원했고, 그 옆으로 인동초를 그려 넣어 마무리했다. 규모만 작을 뿐이지, 그 장식의 화려함은 마치 궁궐의 꽃담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이러한 꽃담을 일반 사대부집에 설치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었다. 그러나 이씨조선의 몰락과 함께 신분질서가 흔들리는 과도기적 시대 상황이었기에 가능했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김기응 가옥은 시대적 격변기를 거친 집의 역사가 잘 녹아 있고 공간구성의 아름다움과 외벽 장식의 화려함 그리고 건축구조의 완벽한 보존 상태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정통 상류 주택의 면모를 잘 간직한 소중한 집이라고 하겠다.

 

 

 

 

각종 출입구 - 1

 

각종 출입구 - 2

 

1. 중간행랑채 마당                                                      2. 안채 후원 - 1

3. 안채 후원 - 2                                                         4. 안채 후원 - 3

 

안채 후원 (2006. 08.)

 

 

 

 

 

 

 

 봄이 한창이던 지난 5월 중순에 김기응 가옥을 세 번째로 찾아 갔다.  장마철 소나기처럼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헤치고 도착했지만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우산을 쓴 채로 외부담장 사진만 잔뜩 찍고 아쉽지만 갈 길이 멀어 자동차 시동을 거는데 때마침 주인 가족들이 논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양해를 구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한창 농번기에 찾아와 폐를 끼쳐서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신속히 답사를 마쳤다. 워낙 넓은 집이라 현재 안채는 사용하지 않고 모든 가족이 사랑채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안채에서 사랑채 뒤편 샛마당의 꽃담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문에 빗장이 걸려 있었다.

 이 집을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는 이 입구를 찾질 못해서 지나쳤고, 두 번째 와서야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었던 꽃담이라 미련이 많이 남았지만 더 이상 귀찮게 구는 것은 결례가 될 것 같아서 포기하고 돌아 나오다가 대문 앞에서 안주인을 만났다.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집이 깊고 담장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글쎄요. 아름다운 집이 밥을 먹여 주진 않지요......”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질 못하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찌푸렸던 하늘도 개이고, 모심기 준비가 끝난 물이 가득 찬 논에는 석양의 해가 빨갛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득한 100년 전 쯤에, 증조부 김항연 선생이 큰 뜻을 가지고 칠성면 성산마을에 대저택을 지었다. 하지만 그동안 생활양식과 유행도 바뀌어서 이 집이 지금의 후손들에게는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10분의 1 수준으로까지 줄었으니 관리와 청소마저도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증조부가 백년대계를 생각하여 집을 짓지 않고, 황금(돈)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었다면 그 유산은 벌써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뀔지라도 후손들에게 삶의 근원인 주거문제를 해결해 주고자했던 증조부의 깊은 사랑이 이 집을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사랑을 하나하나 꽃담에 새겼을 것이다.

부귀와 장수를 뜻하는 글을 새기고 영원함을 상징하는 회문양을 넣고 박쥐와 인동초를 그려 넣어 자손들의 보존과 번성을 기원하는 마음을 함께 담에 새겼을 것이다.'

 

 

 가문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부담이 되고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 평생의 작업이다. 그래서 사명감이 없이는 그 일을 시작할 수도 없고, 또, 일반적으로 그 어려운 일을 완성 하는 사람과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보통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국가문화재 수준의 주택 작품을 남긴 것은 증조부 자신의 영화를 위한 일이 아니라, 100년 뒤의 후손들을 위한 깊은 사랑이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2012.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