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봉화 가평리 계서당
- 춘향전 이몽룡의 생가 -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동해를 벗 삼아 남하하다가 본격적으로 내륙으로 접어드는 곳, 백두대간 전체를 받쳐주는 중요한 요충지점이며 우로는 태백산, 좌로는 소백산이 기둥이 되고 백두대간의 능선 32km와 낙동정맥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풍요로운 땅 봉화는, 춘양면 구룡산과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시작된 시냇물이 봉화군 명호에서 합류되어 본격적으로 낙동강이라는 명칭을 얻고 이곳을 시발점으로 하여 봉화를 휘감아 경남 김해까지 1,300리를 흐르며 영남의 메마른 대지를 비옥한 옥토로 바꾸는 영남인의 젖줄이자 생명수가 된다.
이 시대 최고의 청정지역이자 누구나 살고 싶고 가고 싶은 유토피아의 고장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미래를 위해 예비해둔 땅이 바로 봉화이다......“ (자료 : UGN 경북뉴스에서 발췌)
우리나라 최고의 청정지역이자 유토피아로 자랑이 대단한 봉화군은, 천혜의 자연조건뿐만 아니라, 안동의 도산서원과 영주의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연결하는 찬란했던 문화벨트의 중간 지점으로서, 조선시대 선비문화가 남긴 귀중한 문화재가 군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그 중에서 주거문화재로는 해저 만회고택, 거촌리 쌍벽당, 설매리의 3겹 까치구멍집을 비롯하여 물야면 가평리에는 '춘향전'의 남자주인공, 이몽룡이 살았다는 창녕 성씨의 종가 집, 계서당溪西堂이 있다.
봉화읍 소재지에서 물야면 방면 915번 지방도로를 달려 가평에서, 안내판을 보고 두문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소나무 숲에 둘러 싸여 있는 단아한 고택, 계서당을 만날 수 있다.
창녕 성씨의 종가 계서당 마을전경 (2012. 05.)
황금들판에 뭍혀 있는 계서당 전경 (2006. 10.)
황금들판 사이로 난 주진입로 (2006. 10.)
건너편 국도에서 본 계서당 전경 (2012. 05.)
대문에서 본 사랑채와 우측 사당 일각문 (2012. 05.)
계서당은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광해군 때 초가로 지어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집을, 그 뒤 후손들이 수대에 걸쳐서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다.
성이성 선생은, 남원부사를 지낸 성안의 선생의 아들로, 진주목사를 비롯해서 여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선정을 베풀고 임지를 떠날 때는 항상 침구만 챙겨서 떠나는 청렴결벽 했던 목민관으로, 암행어사를 4차례나 역임할만큼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이 높았던 분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사후에 부제학으로 추서 되었고,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淸白史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이 계서당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성이성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다.
실제로,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직전에 이몽룡이 읊었던 "금잔의 좋은 술은 천인의 피요, 옥반위의 맛있는 안주는 만인의 기름이로다........(金樽美酒 千人血, 玉盤嘉肴 萬姓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라는 시는 성이성 선생이 직접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이몽룡과 흡사한 성이성 선생의 행적내용이 계서공파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계서선생일고',
'필원산어'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및 구전되는 설화를 면밀히 대조 확인한 결과이며, 남원 광한루에 지금도 남아있는 성안의 선생의 송덕비는 이몽룡이 실존인물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라고 했고, KBS 1TV 역사스페셜(1999.12.4.방송)에서도 이몽룡은 성이성을 모델로 한 실존 인물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자료와 기록을 토대로 방영한 바 있었다 한다.
정리하면,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인물은 성이성이며, 여자 주인공 성춘향은 성姓이 이李씨였는데, 당시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실존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작가가 고의로 남,녀의 성을 바꾸어 쓰게 되었고,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각종 고사, 설화 등 픽션을 첨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성이성 선생이 13세 무렵에, 남원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성안의 선생을 따라 남원에 갔을 때 관기官妓의 딸인 춘향이와 벌인 불장난이 오늘날 '춘향전'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이다.
1. 정 면 2. 성이성 선생이 심었다는 소나무 (보호수)
3. 측 면 4. 후 면
기단부분이 상당히 높은 우측 사랑채와 가운데 부분에 안채 출입구가 보인다 (2006. 10.)
사랑채 누마루와 우측편의 사당 -가을 (2006. 10.)
사랑채 누마루와 우측편의 사당 -봄 (2012. 05.)
사랑채 대청에서 바라 본 대문채와 황금들판 (2006. 10.)
사랑채 대청마루. (2006. 10.)
아무튼, 춘향전의 로맨스와 청백리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가평리 계서당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 그리고 대문간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영남지역 양반가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종가집치고는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대문간채가 딸린 ㅁ자 집으로, 매우 아담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대문간채는 논이 끝나는 평지에 세웠으나, 몸채는 뒷동산의 경사진 언덕에 남쪽을 향하여 자리를 앉혔다. 자연히 몸채의 기단이 높아지게 되고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사랑채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많은 계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솟을대문이 달린 대문간채는 왼쪽부터 고방, 부엌, 방, 대문간, 마구간, 화장실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대문간채를 왼쪽으로 치우치게 위치 시켰는데, 이것은 외부에서 사랑채가 잘 인지될 수 있도록 하고, 사랑채의 막힘없는 전망을 고려한 배치로 보인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높은 곳 서쪽에 중문간채가 있고, 동쪽으로는 사랑채가 이어져 있다. 이중 기단위에 높다랗게 자리한 사랑채는, 전면과 측면을 누마루같이 꾸몄으며, 마루아래의 기둥 사이 공간은 흙벽을 쳐서 막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일반적으로 사랑방은 홑집으로 구성하는데, 뒤쪽으로 방을 들여서 겹집으로 만들었고, 사랑채 대청마루 모서리 부분에도 독특한 시설이 하나 있는데, 남자들이 간단하게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판벽으로 설치한 간이 화장실이 그것이다. 사랑채 구석에 은밀하게 화장실이 설치된 경우는 영광의
연안 김씨 종가와 함양의 정여창 고택에도 있지만, 일반 사대부집에서 대청 전면 모서리에 노출시켜서
설치한 것은 전례가 없으며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어린 학생들과 노인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라는 게 종가를 지키는 주인어른의 추측이다.
우측 상단에 대청마루의 돌출된 간이화장실이 보인다 (2012. 05.)
안채 전경 (2012. 05.)
안채 부엌에서 사당과 바깥마당으로 나가는 작은문이 보인다 (2006. 10.)
건너편 부엌에서 본, 안채 날개채와 사랑채 사이에 비워둔 공간 (2006. 10.)
1. 대문간채 2. 사랑채
3. 안 채 4. 사당채
몸채는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이며, 사랑채 서쪽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의 정면
3칸은 대청이고, 좌우 2칸은 안방과 건너방이 대칭으로 놓여 있다. 안방과 건너방 뒤에는 마루방을 각각 반 칸씩 설치하여 반침으로 사용한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안방 부엌은 마당 쪽으로 길게 뻗어 중문간이 있는 앞채와 직각으로 만나고, 건너방 쪽은 부엌에서 반 칸만 내밀어 사랑채 부분과 1M 정도 띄워 놓았다. 날개채의 부엌은 외부로 문을 달아서 바깥마당의 통로로 유용하게 이용된다.
별도의 영역으로 자리 잡은 사당은, 사랑채 오른쪽 약간 위쪽으로 토담을 둘렀는데 사당건물 지붕부분의, 전면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로 처리하여 차이를 두었다.
계서당의 가을 (2006. 10.)
사당에서 본 사랑채 측면(2006. 10.)
사당채 측면 (2012. 05.)
사랑채 후면에서 본 사당 (2006. 10.)
우리나라 최고의 로맨스이자, 4대 국문소설의 하나인 '춘향전'의 탄생 비밀이 숨어있는 곳으로 새롭게 부각된 계서당을, 역사 유적지로 복원한다는 봉화군청의 발표가 2004년도에 있었다.
고증을 거쳐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계서당 본채와 허물어진 담장을 원형대로 보수하고, 철거된 부속건물들도 복원하고, 진입로를 넓히고 주차장도 마련하는 등 관광 편의시설도 확충해서, 계서당 일대를 ‘고전문학의 성지’ 및 ‘전통 사랑의 메카’로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재 계서당에 살고 있는 후손 성기호씨의 말씀에 따르면 “청백리로 존경받는 인물을 기생과 사랑놀음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 선조를 욕보일 우려가 있다”하여 문중 일부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달라진 세태관념을 인정해서 받아들였다 한다.
지난 주말 연휴 때, 6년 만에 다시 계서당을 방문하였다. 모심기로 한창 바쁜 농번기라서 주인 어른은 만나지 못했지만 마을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마을 입구에 넓은 주차장과 정자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집안 내부에도 창고가 복원되고 공용화장실도 생겼다. 하지만 ‘고전문학의 성지’로서의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철거된 일부 건물의 복원과 담장의 설치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는 듯 했다.
뒷산에서 본 계서당 전경 (2006. 10.)
텃밭에서 본 계서당 전경 (2006. 10.)
1. 몸 채 2. 복원된 창고 (공용화장실 겸용 )
3. 마을입구 주차장 4. 마을입구 주차장의 정자 쉼터
사당 뒤쪽에서 본 본채 전경 (2012. 05.)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원한 청춘 고전, 춘향전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 주인공 성몽룡과 이춘향이의 애절했던 백년가약은, 당시 너무나도 엄격했던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비극으로 끝난 것이 현실이라고 하니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성이성 선생이 직접 쓴 어사일기 ‘계서선생일고’에 따르면, 50대 중반 무렵 암행어사를 그만둔 직후, 남원 광한루를 방문하여, 늙은 퇴기와 노복을 불러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춘향이의 행적을 물어 보고는 한참동안 회환에 젖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선생이 만난 사람은 월매과 향단으로 추측되며,
안타까운 사실은, 백년회로하는 소설과는 달리 춘향이와 성이성 선생은 어린시절 헤어져 다시 만나질 못했고, 춘향이는 병으로 꽃다운 나이에 일찍 죽었다 한다.
2012. 05. 30.
안채 지붕
'■ 건축이야기 ■ > 전통건축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거건축-020. 영양 서석지 - 바위처럼 살리라 (0) | 2012.08.08 |
---|---|
주거건축-019. 괴산 김기응가옥 - 담장마다 사랑의 수를 놓다 (0) | 2012.06.13 |
주거건축-017. 예산 추사고택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과 사랑이라 (0) | 2012.05.24 |
주거건축-016. 홍성 조응식 가옥 ( 우화정 ) - 천하태평을 기원하는 꽃비가 내리는 집 (0) | 2012.05.14 |
주거건축-015. 안동 의성김씨 대종가 - 차라리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리라 (0) | 2012.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