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소로우의 ‘월든’(walden)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품질의 삶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삶이다. 그러나 굽신거리기 싫어서 우체국장을 때려치우고 전원으로 돌아간 도연명이나, 도회지의 삶을 경멸하면서 매사추세츠 주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유유자적한 소로우의 결단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먹고사는 일에 부대끼다 보면 한달에 한번 등산가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산수화이고, 집안에 조성한 정원이다. 동양의 식자층들은 산에 못 가는 대신 명산대천을 축경(縮景)해 놓은 산수화와 정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대리만족하곤 하였다. 한국의 정원가운데 가볼만한 곳이 용호정원(龍湖庭苑)이다. 경남 진주에서 산청쪽으로 10분 정도 국도를 달리다보면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박헌경(朴憲慶:1872~1937)이 1922년에 인공으로 조성한 ‘용호정원’이 있다. 용호정원이 유명한 이유는 용호지(龍湖池)와 무산(巫山) 십이봉(十二峰)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무산은 중국 사천성의 파산산맥(巴山山脈) 중에 솟아 있는 명산이다. 산 모습이 무(巫)자 형태를 띄고 있어서 무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첩첩이 솟아 있는 열두 봉우리들 사이로 강이 흘러가면서 만들어낸 무협(巫峽)은 삼협(三峽)가운데 하나로 포함될 만큼 장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태백과 두보를 비롯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무산의 십이봉과 무협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한자문화권의 식자층들이 가장 동경하던 자연의 모습은 이처럼 산과 물이 적당히 어우러진 형태였다. 용호정원은 무산 십이봉을 모델로 한 것이다. 십이봉은 흙을 쌓아서 올린 둥그런 봉분의 모습이다. 4~5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열두 봉우리가 가운데의 연못인 용호지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열두 봉우리에는 각각 백일홍을 심어 놓았다. 600평 넓이의 용호지 가운데에는 팔각정의 정자인 용호정이 자리잡고 있다. 부채 만한 크기의 연잎이 녹색으로 무성해 졌을때 팔각정에 앉아 있노라면 주변의 붉은 색 백일홍 꽃과 연꽃의 향기가 어우러져 가히 신선의 경지를 맛볼 수 있다. 무산십이봉에서 내려와 용호정을 건너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바람 부는 날에는 물 위에 비친 무산십이봉이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보름달이 뜬 밤에 나룻배를 타고 연꽃 향기를 맡으면서 용호정을 건너가는 그 쾌감을 어디에다 비유할 것인가.
하지만 용호정원이 보다 의미있는 것은 그 아름다움의 밑바탕에 적선(積善)의 공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박헌경이 일제 시대 소작인들에게 베푼 은혜를 감사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공덕비는 무려 7개나 된다.무산 열두 봉우리가 빚어내는 미(美)는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선(善)을 자양분삼아 솟아난 봉우리였다. 용호정원을 조성한 인물은 당시 만석꾼의 거부였던 밀양 박씨 박헌경이다.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일대는 1919년 이래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밥을 굶고 이 곳 저 곳을 떠도는 유랑생활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박헌경은 사재 수만금을 풀어 취로사업을 벌였다. 이재민들에게 집과 땅을 주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600평 넓이의 연못을 파고 무산 십이봉을 쌓아 올리는 사업을 벌렸던 것이다. 1922년 박헌경의 고택 앞에 조성된 용호정원은 이재민을 구호하기 위한 구호사업의 결과였다.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나선 한국판 뉴딜 정책이었던 셈이다. 그보다 앞서 1920년, 용산리 마을 동쪽 산간에 세운 용산사라는 절도 이재민을 도와주기 위한 취로사업이었다. 특히 1929년에는 폭우로 동네의 개천제방이 터지면서 용산리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용산리 가구 40호 중 절반이 넘는 24호가 물에 떠내려 가고 4명의 주민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이 발생하자, 박참봉은 사재를 털어 동네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조선농회보’에 따르면 1920년대 진주 일대 소작인들이 지세(地稅) 거부운동을 벌였다. 소작인들은 가을 추수기가 끝나면 한 해 동안의 소작료와 지난봄에 빌려온 양식의 이자를 지주에게 갚아야만 했다. 원금과 이자를 지주에게 갚다 보면 남는 것은 한 바가지의 누런 벼 뿐이었다고 한다. 소작인들은 당장 끼니를 잇기 위해서는 다시 지주로부터 쌀을 빌려야만 하는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 악순환을 끊기위해 일어난 것이 지세거부 운동이었는데, 보통 지주들은 이 운동을 당연히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지주들과 달리 박헌경은 소작인들의 거부운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박헌경은 소작인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돈을 빌려준 기록을 담은 채권장부를 사람들이 지켜보는 그 자리에서 불살랐다. 뿐만 아니라 소작인들에게 지세를 반환하는 결단을 내렸다. 박헌경의 행적은 진주 일대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고, 공덕비를 7개나 세우게 하였다. 소작인들이 감사의 표시로 세운 7개의 공덕비는 한곳에 모아져 현재까지 용산리 국도변에 서있다. 한 개인에 대한 공덕비가 무려 7개나 서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공덕비 중에는 이 집에 드나들던 과객들이 세운 것도 포함됐 있다. 진주에서 산청을 거쳐 함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박참봉 집에는 많은 과객들이 드나들었는데, 그 신세를 졌던 과객들이 박참봉이 죽자 돈을 추렴하여 세운 자그마한 공덕비가 맨 왼쪽에 서 있다.
돈을 버는데 있어서도 노하우가 필요하지만,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것도 학습이 필요하다. 이 집안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박헌경이 공동체의 불행을 당해서 거금을 아낌없이 내 놓을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렸을때부터 보고 배운 할머니의 영향이 크다. 박헌경의 할머니였던 숙부인 인동 장씨도 역시 돈을 쓸 줄 알았다. 명석면 용산리와 50여리 떨어진 사천시 곤명면에는 인동 장씨 할머니를 기리는 공덕비가 서 있다. 남성이 아닌 여성을 추모하는 공덕비는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500석의 재산을 가지고 있던 장씨 할머니는 1910년대에 곤명면 일대의 춘궁기에 쌀을 내 놓았다. 매년 봄가을에 100여호 남짓 되는 동네 사람들에게 쌀 한 되씩을 집집마다 공짜로 돌렸던 것이다. 요즘이야 쌀 한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어야만 했던 당시에서 매년 봄가을에 걸쳐 장씨 할머니가 주는 쌀 한되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1919년에 심각한 흉년이 닥치자, 장씨 할머니는 자기 집의 쌀 창고 문을 동네사람들에게 과감하게 개방했다. 곤명면에서 필자가 만난 70대의 노인 한 분은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서 지금도 장씨 할머니의 공덕비 주변을 매년 빠짐없이 손질하고 있었다. 진주의 밀양 박씨 집안은 재물 하나를 가지고 진선미(眞善美)라는 인생의 궁극적 가치를 모두 잡을 줄 알았던 지혜로운 집안이었다.
(출처 :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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