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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07. 창덕궁 연경당 - 한국건축 2천년의 숨결

 

 

                                                                                                              안채마당 (2006.06.)

 

 

 

 

 

          07. 창덕궁 연경당延慶堂

        -비원 속에 살아있는 한국건축 2천년의 숨결

 

 

 

 

 

“어쩌다가 가을소리 빗소리에 낙엽이 촉촉이 젖는 하오, 인적도 새 소리도 끊긴 비원을 찾으면 빈숲을 등진 연경당延慶堂은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 담담하고 외롭다.

 알맞게 무겁고 미끄러운 기와지붕의 곡선, 사뿐히 고개를 든 두 처마 끝이 그의 지붕 밑에 배꽃처럼 소박하고 무던한 한국의 마음씨들을 감싸 안고 있다.

 밝고 은은한 창과 창살엔 쾌적한 비율이 깃을 드리웠고, 장대壯大나 화미華美 따위는 발을 붙일 수도 없는, 질소의 미덕이 시새움도 없이 여러 궁전들과 함께 가을비를 맞는다.“ (출처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

 

 

 국립 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혜곡 최순우 선생이, 한국의 주택건축 2천년사의 아름다운 결정체라고 책에서 극찬한 연경당은, 창덕궁 비밀의 정원 두 번째 골짜기에 꿈꾸는 듯 선비처럼 의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창덕궁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별궁으로,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궐이라고도 불렸다. 경복궁의 전각 배치가, 중심축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대칭의 인위적인 엄격한 질서를 따랐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서 건물들이 골짜기에 안기도록 설계함으로써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비정형적 자연미를 추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태고적의 신비함을 간직한 ‘비원’이라는 아름다운 왕실 후원도 잘 간직하고 있다.

 

 

 창덕궁의 비원 골짜기에 자리 잡은 연경당의 관람방식은, 수차례에 걸쳐서 바뀌어 왔는데, 요즘은 홍보해설사가 동행하는 제한적인 특별관람으로만 2시간 정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초, 새해 첫날 아침에 비원과 연경당을 다녀오는 걸로, 대망의 2011년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게을러서 그마저도 실천을 하지 못했고, 늦게나마 옛날 자료와 사진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진입마당에서 바라 본 연경당 (2006.06.)

 

  연못에서 올려 다 본 문간채 (2006.04.)

 

  속세와 월궁을 구분짓는 집앞의 수로 (2006.06.)

 

 

 

 

 연경당延慶堂은 순조 28년(1828년), 당시 왕세자였던 효명세자의 청으로 민간의 생활을 이해하기 위하여 일반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아흔 아홉칸 살림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남철 선생의 연구서적(연경당)을 살펴보면, 실제규모는 120칸 반이고 엄청난 규모와 별채의 서재를 거느린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사대부집을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라, 결혼하여 분가한 대군, 공주들의 사가, 즉, 궁집의 재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배치는 정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북.동.서 삼면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 쌓인 곳에 북서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집 앞을 거쳐서 동쪽으로 흘러나가 집 앞 연못과 애련정으로 빠져나가도록 물길을 잡아 풍수적 기법을 도입하였고 주 동선인 남북축에 대하여 직각 또는 평행하게 건물들을 앉혔다.

 대문(長樂門장락문) 앞 작은 개울 돌다리 옆에는 괴석을 담은 조그만 석분이 하나 있는데 측면은 꽃 장식이 되어 있고 네 모서리에는 두꺼비 네 마리가 매우 사실적으로 양각되어있다. 세 놈은 기어 나오려고 하고, 한 놈은 매달려 버둥거리는 모습이 참 앙증맞다. 두꺼비는 연경당이 근심 걱정 없는 월궁(月宮)임을 상징하고, 월궁은 신선이 사는 세계로 장락궁이 있다는 전설 속의 세상이다.

 

 

 

 

정문인 솟을대문, 장락문과 괴석 (2005.03.)

 

 행랑마당에서 바라 본 장양문(오른쪽)과 수인문(왼쪽) (2006.04.)

 

 

 

 개울을 건너 행랑채 중간의 높이 솟은 솟을대문(長樂門장락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길다란 행랑마당이 나오고 두 개의 중문을 통하여 각각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가게 된다. 행랑마당에서 안으로 인도하는 두 개의 중문은 모양이 다른데, 사랑채 중문(長陽門장양문)은 솟을대문으로 높이고, 안채 중문(脩仁門수인문)은 평대문으로 설치하여 두 공간의 위계를 달리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뿌리 깊은 남녀구별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인데, 여자는 장양문으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강릉에 있는 선교장과 같은 경우는 대문에서부터 별도의 안채 전용 출입구를 구분 설치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전통건축 곳곳에 배여 있는 남녀 및 신분차별 사상은 익히 잘 알려져 있으나, 엄격한 구별의 이면에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했던 선비정신도 있었음을 한번쯤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TV 사극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부인에게 결코 반말을 쓰지 않았다. 역할 구분에는 분명했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격조 있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선비정신의 단절과 함께 이 전통도 사라지고 말았다. 부부 네 명 중 한 명이 이혼한다는 오늘날,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막말만은 피할 수 있다면 결과는 훨씬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안채 담장 너머로 바라 본 사랑채 (2006.06.)

 

선향재에서 본 사랑채 (2005.03.)

 

 

 

 

 장양문을 들어서면 맞은 편 정면으로 사랑채가 있고 그 동쪽에 서재인 선향재善香齋가 있는데, 이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바로 연경당演慶堂이다. 바깥주인의 주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정면 5칸의 대청마루와 오른쪽 끝에 정면 1칸의 누마루로 이어져 있고, 뒤로 반 칸 물러서 각각 2칸의 사랑방과 침실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은 여름에는 발을 치고 겨울에는 탈착 가능한 분합문을 설치하여 공간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사랑채의 중심부분이다.

 그러나 대청의 주된 역할은 마당이나 사랑방, 누마루에 드나드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전실前室 개념의 전이공간으로서, 서양의 거실(Living Room)과는 기능과 성격이 확연히 다른, 동양 특유의 자유공간이다.

 

 

 사랑방 뒤에 붙은 작은 방은 침실이다. 바깥어른이 안채로 가서 주무시는 게 아니라, 독수공방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태종 임금 때부터, ‘사대부 집안에서는 부부간에도 같은 침실을 쓰지 않는다’는 부부별침의 내외법內外法을 국법으로 정해 놓고 시행한 일에서부터 연유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부부간의 사적인 일도 관리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은 외부에서 보면 담장에 의해서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으나, 실제로 건물은 一 자로 연결되어 있어서 침실 쪽에서 작은대청을 통해서 안채로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구조이다. 체통도 지키면서 이동의 불편함도 해소한 능수능란한 공간 구성 수법이다.

 

 

 

 

선향재와 사랑채 사이의 마당 (2006.06.)

 

 

 

 

 사랑채의 오른 쪽에는 개인 서고이자, 별채로도 이용 가능한 선향재가 있다. 가운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 쪽에 각각 크고 작은 3개의 온돌방으로 나누어지고, 작은 온돌방에는 벽장이 있어서 서적을 보관할 수 있고, 전면 1칸은 지붕을 청동판으로 덮은 차양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선향재를 처음 봤을 때(1984년), 건물 측면의 벽돌벽과 생소한 차양으로 인해 일제시대의 변형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우리나라 한옥의 차양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기록이 남아 있고, 해남의 윤고산 고택, 강릉의 선교장 등에서 그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는 우리의 전통적 양식임을 알게됐다.

 이 차양 칸에는 칸마다 두 짝의 창호를 가로닫이로 달아놓고, 평상시에는 끈을 잡아당겨 젖혀서 매달아 놓고, 석양녘에는 끈을 풀어 내려뜨리면 따가운 여름 햇살이 창호의 살대에 걸러져서 햇볕은 선향재에 들어오지 못하면서 바람은 통하고, 하늘을 향한 시선은 차단되지 않는 지혜가 숨어 있다.

 

 

 선향재 뒤쪽 가장 높은 위치에는 정자인 농수정濃繡亭이 있다. 정면, 측면 모두 1간의 간단한 구조이고 겹처마 사모지붕을 얹었다. 언덕에는 4단의 꽃밭을 조성하고 그사이로 두 곳에 계단을 끼워 넣었다. 이 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 인데 분합문을 접어서 들쇠에 매달면 4개의 기둥 사이로 주변의 풍광이 쏟아져 들어 온다.

 

 

 

 

선향재 뒷쪽의 정자, 농수정 (2005.03.)

 

수인문에서 바라 본 안채마당 (2006.06.)

 

 

 

 사랑채의 왼편, 서쪽에는 안주인의 거처이자 집안 살림의 중심지인 안채가 ㄱ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방을 기준으로 우측으로 대청, 건넌방, 마루방, 사랑채의 침방 순으로 이어지고 안방에 붙어서 남쪽으로 돌출된 1칸은 누다락이고 아래는 안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 부엌이다.

 누다락은 안방마님의 여름철 거처이고, 건넌방은 며느리 방이거나 안방을 물려 준 노마님의 방으로 사용된다.

 안채의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음식을 만드는 부엌을 안채에 두지 않고 별채로 분리시킨 것이다. 사대부가 중에서도 규모가 큰 대갓집에서는 반빗간(부엌)을 별도로 건립하던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안채 뒤쪽에 담장으로 구획된 반빗간(北行閣)을 두고 부엌, 방, 곳간, 광을 배치하여 음식을 조리하고 바느질과 세탁 등을 담당하게 했다.

 

 안채의 좌측, 아랫채(西行閣)는 어린 자녀와 나이 찬 규수의 거처이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남쪽 끝은 중문간행랑채의 서쪽 끝과 맞닿아 있다. 이 중문(脩仁門)을 나서면 처음에 들어온 행랑마당과 만나게 된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된 방과 작은대청(2006.06.)

 

 

                             안채에서 바라본 뒷뜰과 반빗간의 지붕모습 (2006.06.) 

 

 

 

 

 우리나라 정통 한옥의 규범이자, 모델인 연경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다. 단아하면서도 의젓한 자태는 방문객의 뇌리 속에서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맴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주택건축으로, 빼어난 건축술과 조형미, 탁월한 공간구성 수법을 자랑하는 연경당의 끝없는 매력과 예찬은, 최순우 선생의 글로 시작하고, 최순우 선생의 글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주택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것은 사랑채의 효용과 그 평면의 묘에 있다.

이 연경당이야말로 서재 풍으로 된 가장 전형적인 큰 사랑채 하나의 부분으로서는 절묘한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동쪽 뜰 기슭으로 선향재라는 나지막한 서고를 거느렸고, 또 이 선향재의 뒤 언덕 위에는 난간을 두른 아기자기한 단칸 정자 농수정을 둔 것은, 담담하기만 한 이 연경당의 분위기에 한가닥의 풍류를 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까. 어쨌든 설계자는 이 연경당 한 채가 주위의 자연 속에서 어떻게 멋지게 바라보일까를 먼저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연경당을 설계하고 감역한 건축가의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19세기에 있어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뛰어난 건축가의 심미안에도 뒤설 수 없는, 멋진 눈의 주인공 들을 적지 않게 가졌던 것을 자랑해야겠다.

 

 한국미의 증징, 그리고 한국미의 주체, 이것은 에누리 없이 우리 조선 주택 속에 너무나 뚜렷하게 너무나 멋있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목조 주택의 전통이 이천 년 전 한족의 중국 문화에서 받아들여졌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주택은 벌써 제 발걸음을 한 지 오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한국 사람들의 꿈이 자라나고 노래가 자라나고 미술이 자라나고 또 아름다운 아들 딸 들이 자라났다. 연경당 이것은 우리 주택문화의 영원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비원의 깊숙한 숲 속에 자리 잡았지만 어느 왕자의 절절한 염원, 인간에의 향수를 사무치게 품은 채 너는 오늘도 담담하고 값진 미소를 오 월의 하늘 아래 말없이 풍기고 있다.“ (출처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2011. 02.

 

 

 

 

 

 

 비원 깊은 곳의 옥류천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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