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함양 정여창 고택
- 백세청풍, 선비의 기품을 말하다 -
선비와 정자의 고장, 경남 함양은 한때, ‘내륙의 섬’이라 불릴 만큼 교통이 불편한 오지였었다.
서쪽엔 백두대간, 남북으로는 지리산과 덕유산이 첩첩이 벽을 두르고,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때문에 함양은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청정지역으로서, 불리한 지리적 여건을 자연보호와 전통계승의
기회로 활용한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맑고 기품 있는 군자君子정신이 살아있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좌 안동 우 함양, 좌 퇴계 우 남명’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안동이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고, 낙동강 서쪽에서는 함양이 그런 땅이며, 퇴계 이황에 필적하는 대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함양에 있다는 자긍심이 가득한 자랑이다.
그런데, '우 함양'의 기틀을 확립한 이는, 조선시대 동방오현 중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이다.
그는 세종 때에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나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김굉필과 함께 영남사림의
거두인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갔던 선생은, 세자에게 강론을 하는 시강원 설서를 지냈고, 안의현감으로 부임해서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 했어나, 연산군 시절에 스승인 김종직과 더불어 무오사화(1498년)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뒷날 후학들이 그를 기려서 신축한 남계서원이 근처의 수동면에 남아 있는데, 이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다음으로, 2번 째로 건립된 역사 깊은 서원이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서원 뒤에는 선생의 산소가 있다.
대문간에서 본 사랑마당 (2004. 07)
안채의 통과공간인 중간마당의 진입부 (2004. 07)
안채및 사당채의 진입부 (2004. 07)
행랑채 담장 너머로 만발한 능소화 (2007. 07)
앞으로 남계천이 흐르는 도숭산 자락의 지곡면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이 두 성씨의 후손들이고, 개평마을의 중심 위치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정여창 고택은, 문간채, 사랑채, 행랑채, 아래채, 안채, 사당, 고방채, 별당채 등과, 그기에 딸린 마당이 함께 적절히 잘 배치되어 있는 경남을 대표하는 상류주택의 전통 한옥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대하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소로 쓰였고, 이후로도 단골장소가 되고있다.
집터는, 3천여 평이 넘는 넓은 대지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진 각 부분들이 샛담으로 구획되어 있어서, 그리 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각 영역은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각 모서리 부분을 틔어서, 안마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간이 리드미컬하게 서로 연결되는 공간구성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5개의 정려패가 걸린 대문 (2007. 07)
기품있는사랑채 (2004. 07)
사랑채와 정원 (2004. 07)
집의 정문, 솟을대문에는 효자, 충신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패旌閭牌인 홍패가 5개나 높이 걸려있다. 한 명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데, 이 집안은 충신과 효자를 5명이나 배출한 명문중의 명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높은 축대위의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2칸으로 앞뒤로 툇마루가 붙어있는 겹집구조이며, 누마루가 사랑방 앞에 높이 달린 ㄱ자형 평면이다.
이 사랑채의 높은 축대는 바닥이 높은 안채의 마당과 레벨을 맞추기 위해서 높아졌고, 건물은 안채영역과 사랑채영역으로 두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하지만 사랑채의 방 들은 양쪽 마당 모두를 향해 열려있어서 조망과 출입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방 들은 양쪽 영역 모두에 관여하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누마루와 정원 (2007. 07)
사랑채 누마루에서 본 사랑방 (2007. 07)
사랑방에서 내다 본 모습 (2007. 07)
처마가 날렵한 사랑채의 누마루에 오르면, 바로 앞마당에 동산처럼 꾸며놓은 석가산石假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돌을 얹어 산을 축소한 형태로 정원을 꾸민 석가산의 기묘함과 더불어, 오래된 노송은 제 멋대로 휘고 굽어서 운치를 더하고, 담장 너머로 마을과 앞산이 시원스럽게 펼쳐져서,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하던 선비의 욕심 없는 삶을 엿 볼 수 있게 한다.
백세청풍 - 오래도록 맑은 바람처럼 맑은 가풍을 유지하라는 의미로, 후세에 모범이 되는 인격체를 상징함.
추사 김정희 선생과 흥선대원군도 머문 적이 있었다는 이 사랑채의 누마루 천장에는 ‘탁청재濯淸齋’라는 편액이, 사랑대청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온돌방 바깥벽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힘찬 필체로 '충효절의忠孝節義'라고 쓰여 있어,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정신과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선비정신과 격조 있는 이 집의 기품을 느끼게 된다.
안채로 가는 중간마당 (2007. 07)
“사랑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간 영역에 작은 마당이 있다. 사랑마당에서 보면 황토빛 흙벽의 고방(창고) 옆모습과 단이 진 기와 얹은 흙담, 자연스레 경사져 오르는 문간바닥과 바닥돌, 그리고 흙담을 배경으로 서있는 키 작은 꽃나무들이 아우러진 그림같은 자그마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들 전이공간이라 이름붙이는 곳이다. 이는 대문에서의 출입방향을 안채로 꺽어 주는 교통공간이면서 시선을 자연스레 받아주고 또한 차단하는 여유공간이다.
그리고 남자가 쓰는 사랑마당과 안주인의 안마당을 이어 주면서도 완충시켜주는 중간영역이고, 지대가 낮은 사랑채 부분과 그보다 높은 안채부분의 높이변화를 자연스레 받아주며 연결하는 매우 다목적 공간인 것이다. 또한 보기에도 훌륭하니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하나 된 기막힌 공간이다. 현대 주택의 설계에도 기꺼이 응용할 수 있는 멋들어진 전통공간 구성기법이다.
정여창 고택을 유신히 살펴보면, 여러 채의 한옥과 그에 딸린 마당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공간들의 변화와 표정에 감탄하게 된다. 여러 마당과 한옥들이 서로 만나기도 하고 다시 나누어지면서 사람의 움직임과 눈의 흐름을 잡아주기도 하고 또한 다른 공간으로 자연스레 이끌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여창 고택은 교과서 같은 사대부 집이다.“(자료- hamyang.org/jeungyuchangkotak htm)
안채마당 (2008. 07)
안채 (2008. 07)
안채 뒷뜰 (2008. 07)
능소화가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고택의 여름 오후 한나절, 아주 정감 있고 품위 있는 집의 정취에 푹 빠져 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문득, 2004년도에 이 고택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황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말끔하게 보수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안마당의 아래채가 방화로 인해서 시커멓게 그을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국보 1호 숭례문과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서도 방화 사건이 있었다. 수백년을 이어온 우리의 긍지와 자존심이 한줌의 재로 날아갔다. 일부 몰지각한 개인의 소행이지만, 문화재에 대한 우리사회의 몰이해와 무관심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함양에서도 방화로 추정되는 일련의 문화재 훼손 사건들이 있었다. 2003년 가을 화림동 계곡의 농월정이 완전히 불탄 데 이어, 2004년에는 안의에 있는 허삼둘 가옥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이어서 정여창 고택에까지 화마가 미쳤으나, 천만다행으로 초기에 발견되어 아래채만 약간의 피해를 입고 진화되었다.
방화로 피해를 입었던 아래채 (2004. 07)
제모습을 찾은 아래채 (2008. 07)
숭례문이 화재로 무너지는 것을 TV로 지켜보던 그 날의 참담함이 지금도 생생한데, 벌써 우리의 관심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이다. 문화재란 그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정신과 기억을 송두리째 말살하는 방화 행위야말로 무엇보다도 중대한 범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반드시 일벌백계로 엄히 처벌하고, 다시는 이 땅에 문화재를 방화하는 어처구니없는 후진국형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적극적인 교육과 제도적 보완 또한 하루바삐 정비되어야 한다.
조상이 남겨 준 문화유산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선진국 진입과 새문화 창조를 외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유유히 흐르는 남계천을 건너서 남계서원으로 향했다.
20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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