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경주 최부자집
- 버려서 모든 것을 얻다 -
‘경주’하면 떠오르는 수식어는 ‘신라 천 년의 고도’, ‘수학여행의 1번지’ 등이고, 고대와 현대, 보존과 개발이 뒤섞여있는, 그래서 혼란스럽기도한, 우리나라 제일의 문화유적 관광도시이다.
천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던 고대국가 신라의, 폐허와 무덤위에 세워진 중세와 근대사의 덧칠을 지워내고 이미지 통일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 단순히 콘크리트로 만든 한옥 건물의 양산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신라시대 이후의 역사와 삶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경주의 일부 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의 도시위에 산 자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보존과 개발에 대한 확고한 철학의 정립이 선행되어야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경주를 들럴 때마다 하곤 한다.
‘한너울 문화유산사랑회’의 새해 첫 답사지로 경주가 결정되었다.
‘언제든지 손쉽게 갈 수 있는 곳, 그러나 명성에 비해서 실속은 없는 곳, 그래서 항상 2%가 부족한 곳’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시큰둥했었는데, 갑자기 ‘경주 최부자집’이 떠올랐다. 1970년대에 사랑채와 별당채가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얼마 전에 사랑채가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때, ‘12대 만석군 집안’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존경받는 부자의 대명사, 경주 최부자집이 사랑채 하나를 복원하는데 40년이 걸린 안타까운 사연은, 일제시대와 군사독재의 격동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저항했던, 한 집안의 높은 철학과 아픔이 되어, 이 ‘경주 교동 최씨 고택’에 고스란히 배여있다.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마당전경 (2011.01.09)
‘부자富者 3대代를 못 간다’, ‘창업보다 수성이 힘들다’라는 말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집은, 무려 4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지켜갔고, 마지막 대에서 모든 재산을 대학교에 기증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짐으로써 우리나라 부자의 롤모델로서 전설이 되었다.
최부자집이 그 오랜 기간 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선대의 유훈을 받들어 전통과 원칙을 지키는 가문의 인재가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곳간채 (2011.01.09)
최부자집의 초석을 다진, 1대 만석군 정무공 최진립 선생은 의병장 출신의 무인으로, 2번에 걸친 왜란을 거쳐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중 용인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하여 병조판서에 추증됨으로써, 집안을 명문의 반열에 확실히 올려놓았다.
이후, 2대 최동량 선생은 국가에서 장려하는 형산강 간척사업에 참여하여, 넓은 농토를 확보하고, 농사방법(모내기법)을 개량하여 만석군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최진립의 손자 3대 최국선 시절에, '명화적'이란 도적떼를 만나 아주 큰 피해를 입었다.
불을 밝히고 공공연히 약탈을 한다는 뜻의 '명화적明火賊'은, 전쟁 후 몰락하여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최하위계층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일종의 절망과 격렬한 사회적 저항이었다.
이 참혹한 일을 경험한 최국선은, ‘합법적인 부의 축적’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자기 집을 약탈한 도적떼이지만, 본래는 자기의 이웃들이었고, 자기의 노비들이었는지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아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끌어안는 차원 높은 방법을 택했다.
곳간을 열고 구휼미를 풀어서 양민들을 기아에서 구제하고, 농업경영에 있어서 소작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분배하는 방법을 택하여, 물질적 부를 소유하는 것 못지않게 나눔의 정신, 베품의 정신을 실천하는 대단히 귀중한 재산운영방식의 원칙과 전통을 세웠다.
그 경영철학의 핵심은 '육훈'과 '육연'으로 정리되어 후손들에게 철저하게 교육되고, 실천되어졌다. 잘 알려진 대로 '육훈'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
다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며느리는 시집을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어느 것 하나 재산증식에 대한 내용은 없고, 한결같이 부자의 처신과 윤리경영, 상생경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곳간마당에서 대문채와 사랑채를 바라본 전경(2011.01.09)
올해 초 신세계백화점 그룹의 임원 워크샵은, 특이하게도 '400년 부자의 비밀, 경주 최부자'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다.
"협력회사는 신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파트너로서, 기업의 성장과 사회적 요구를 적절히 조화시켜 상생의 단계를 넘어서, 큰 틀에서 동반성장의 전략을 실천하자"고 오너는 역설했다. 이런 자각과 시도가 계속 이어진다면, 지난 해 연말에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5000원 치킨’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은 영세상인들의 생계영업인 치킨을 '미끼상품'으로 삼아서, 더 큰 이윤을 추구할 얄팍한 생각을 버리고, 영세상인들이 개발할 수 없는 큰 상품으로 눈을 돌려서, 기업과 국민경제에 다 같이 도움이 되는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랑마루에서 곳간마당을 바라본 전경(2011.01.09)
안채 전경(2011.01.09)
좌측의 사당과 안채 후원 전경(2011.01.09)
새해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경주 교동 최씨 고택(중요민속자료 제27호)’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 월성을 옆에 끼고 흐르는 남천 뒤 편, 양지바른 곳으로, 오른쪽 옆에는 경주향교를 두고, 뒤편으로는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어린 계림鷄林이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 주고 있는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집터는 원래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터의 자리로 알려져 있어, 궁궐에서나 사용함직한 거대한 석조유물들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집을 지을 당시, 인근 경주향교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유림들의 반발로 집터를 깍아 내리고, 처마높이를 낮추어서 권위적이지 않고 지금과 같은 수수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다.
대지 2천 평에, 1만여 평에 이르는 후원, 이 집에 살던 노비 숫자만 100여 명에 이르렀을 만큼 규모가 큰 집으로서,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 양반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一자형 별당과 큰사랑채가 장방형의 사랑마당을 이루고 있고, 사랑채 뒷 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정방형의 마당을 이루고 있다.
대문채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가진 一자 형태이고, 사당은 사랑채 뒤 편 후원 깊숙이 자리를 잡아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안채 중문에서 곳간마당을 바라본 전경(2011.01.09)
만석군의 집안답게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사랑채 오른편 마당에, 800석을 쌓아올릴 수 있는 곳간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곳간이 7채까지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빈 마당의 크기로나마 그 영화를 대신 말해 주고 있다.
곳간마당에서 바라본 중문채 전경(2005.02,)
안채에서 바라본 내외벽 모습(2011.01.09)
안채 전경(2005.02,)
그리고, 이 집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이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려면 칸막이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곧장 앞으로 가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내외벽內外壁이다. 여자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외부에서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든, 프라이버시 보호용 안전장치이다. 마당이 깊을 경우, 내외담을 설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조선시대의 남녀유별의 유교이념은, 양대 전란을 겪어면서 더욱 강조되어, 지체 높은 집안일수록 더욱 엄격히 시행하였다. 안동 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구조차 찾기 힘든 집도 허다하다. 유교권 국가 특유의, 이런 남녀유별사상 때문에 얽힌 일화가 이 집안에도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스웨덴의 의료참전단 간호사들이 교동 최부자집을 찾아 왔다. 그리고는 최부자집의 안채와 부엌 곳곳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의 특별명령을 수행 중이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는, 황태자였던 1926년에, 식민지시절의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서봉총'의 발굴에 참여하고, 경주 최부자집을 방문하여 조선 명문가의 생활양식을 직접 체험하고, 큰 감명을 받은 후 돌아갔다. 그래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간호사를 파견하여, 아무리 국빈이라도 남자였기 때문에 들어가 보지 못한, 여성전용공간인 안채와 부엌을 촬영해오라 지시한 것이었다 한다.
사랑채 복원 이전의 사랑마당 전경(2005,02.)
복원 이전의 사랑채터 전경(2005.02.)
사랑채 복원 이전의 안채의 벽체 모습(2005,02.)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당당한 사랑채는 얼마전, 2007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1970년대에 화재로 불탄 후, 40년 넘게 빈 터로 방치되다가 최근에야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폐허처럼 주춧돌만이 황량하고, 안채의 비워진 벽 일부를, 폐기용 기왓장으로 대충 막아 놓았던, 서글픈 그 옛날을 생각하면, 이제야나마 잘 생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나, 아직도 사랑채 좌측의 별당채는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12대 만석군을 낸 집안에서, 불 탄 집하나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는 기막힌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격동의 혼란기,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12대 마지막 만석군 최준, 그는 일제치하의 암흑기동안 군자금을 마련하여 상해로 보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동생이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고문으로 목숨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다시 찾은 해방 조국에서, 그의 재산이 의미 있게 쓰일 방법을 고심한 최준은,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쓰기로 결심하고, 선산과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사업에 희사했다.
마침내 1947년, 지금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961년 5. 16군사혁명이후 ‘대학설치령’이 강화되면서 대구대학이 심각한 운영난에 봉착하자, 당시 최고 부자였던 이병철에게 아무런 댓가를 받지 않고 학교를 넘겨주었다 한다. 그러나 이병철은 곧 대학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고,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병하더니, 영남대학이 탄생한다. 그 후 대학의 소유권은, 당시 최고 권력자의 일가에게로 넘어갔다.
황당한 일을 겪은 최준은, 나라가 더 발전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침묵을 지켰다 한다.
그리고 1990년 10월, 진정한 부자 최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전설은 탄생하게 된다.
최근에 복원된 사랑채(2011.01.09)
동서고금에, 수많은 부자들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주 최부자처럼 400년이란 세월 내내 한결같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사회봉사를 위해서, 전 재산과 후손이 살 종가집까지 기부한 진정한 부자는 결코, 사례를 찾지 못 할 것이다.
구례 ‘운조루의 정신’과 더불어, '부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를 충실히 할 때 가능하다'는 높은 철학적 품격을 갖춘 진정한 부자, 경주 최부자를 조상으로 둔 오늘날의 우리는 행복한 후손들이다.
현재, 경주 최씨 종가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안내인을 두고 관리를 하고 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그 역사와 철학은 우리의 자랑이자,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줄 국가적 보물이다.
아직도 복원되지 못한 별당채까지 하루빨리 정비되어서, '경주 최부자 정신의 산 교육장'이
원래의 온전한 제모습을 갖출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티 없이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드높은 기개를 닮은 예리한 칼바람과 잔설이 남아있는 고택을, 나는 옷깃을 여미며 한너울 회원들과 총총히 빠져나왔다.
2011. 01. 15.
복원되지 않은 별당채터(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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