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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04. 경주 안강 독락당 - 은둔과 기다림의 미학

 

 

 

                                                                                                         계곡에서 바라본  계정 (2005.01.)

 

 

 

 

 

     04. 경주 안강  독 락 당 獨 樂 堂


 - 은둔과 기다림의 미학-

 

 


 신라 천 년의 고도, 경주에서 포항 쪽으로 빠지는 드넓은 안강널의 화계산과 자옥산이 만나는 

계곡자락에는, 조선시대 동방오현 중의 한 분, 회재 이 언적 선생의 옥산서원과 독락당이 있다.

1491년, 근처의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대사상가의 좌절과 초월,

그리고 꿈이, 고스란히 이 자옥산 계곡과 독락당 곳곳에 스며 있다.

 

 회재 선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서, 그의 학문은, 퇴계 이황 선생에게로 이어져서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자가  된 분이다. 선생은,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관계로 진출하여 학자적 명성을 떨쳤으나, 41세 되던 해에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당하고 낙향하여, 양동마을의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안강 옥산리에 별서 사랑채인 독락당을 신축하고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련의 시기에 성리학을 넘어서 도교, 불교 등과 교류하고 학문과 인격 수양에 전념하여  독자적인 사상세계를 완성하였다.

 

 약 7년간의 은거가 끝나고 중앙으로 복귀한 후는,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종1품 좌찬성에까지 이르렀고,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는, 노모가 계시는 양동마을에, 무첨당과 향단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다 끝나지 않았던지, 57세 때 무고한 사건에 연루되어서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6년 간의 유배생활 끝에  1553년에 63세를 일기로 유배지 타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고, 독락당 입구의 옥산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회재선생을 배향한 옥산서원 전경 (2006.10.)

 

 도로에서 바라본 독락당 전경 (2005. 01.)

 

 대문에서 바라본 진입부 (2005.01.)

 

 

 

 

 예나 지금이나, 영웅은 시기하는 무리가 많은 법인지,  불우한 시대를 살다 간 대학자, 회재는

그 암울했던 시절의 고뇌와 희망을, 별서건축이라는 그 만의 방식으로 자옥산 자락의 맑은 바람과 물이 흐르는 사산오대의 계곡에 펼쳐놓았다.

 세상으로부터 담을 쌓기 위함인지,  모든 건물은 기단을 낮추어 철저하게 몸을 숨기고, 폐쇄적이고

미로와 같은 은밀한 공간 구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담장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 보기가 쉽지않다.

 

 '종가집'이라는 문패가 붙은, 후대에 고쳐 지은  어색한 솟을대문을 넘어서, 집 안으로 들어서면 방문자는 한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감각을 잃고 만다. 집안에서 길을 잃는 예기치 않는상황이 벌어진다.

 

 독락당 영역은 크게

첫째, 안채 공간

둘째, 사랑채 (독락당) 공간

셋째, 계정 공간

넷째, 행랑채 (숨방채 - 청지기 들의 거처 및 마굿간)공간

다섯째, 공수간 (솔거노비의 거처) 공간

여섯째, 사당 공간

으로 나눌 수 있고, 여기에 인종이 회재에게 보낸 수필답서를 보관하기 위한 어서각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각각의 공간은 담으로 구획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고, 그 입구를 쉽게 드러내 놓지 않는다. 그래서 바깥마당 오른쪽의 공수간 벽을 끼고 전면으로 곧장 나아가면, 정면의 벽은 막히고 좌,우로 출입구가 있고, 계곡으로 열린 좁고 긴 담장이 있는 작은 진입공간 -  중문을 만나게 된다.

 좌측 문을 밀고 들어서면, 숨방채와 안채가 마주보고 있는 길다란 샛마당이 나오고 안채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시 오른 쪽의 중문을 거쳐야 한다.

 

'ㅁ' 자형의 안채는 비교적 넓은 마당과 몸채, 바깥채, 날개채 그리고 독락당이 신축되기 전에 사랑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안사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중문에서 바라본 대문 (2005.01.)

 

 중문에서 바라본 안채와 사랑채로 갈라지는 작은 마당 (2005.01.)

 

중문에서 계곡으로 나가는 좁고 긴 담 (2006. 10.)

 

 

  사랑채 독락당과 계곡 사이의 열려있는 담장 (2005.01.)

 

 

 

 

 독락당은 안채에 이어서 붙여지은 사랑채의 이름이다. 직역하면, '세상을 등지고 홀로 즐기는 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진정한 의미는 좀 더 둘러보고 나중에 정리해 보기로 하자.

 독락당은 회재가 거처하던 곳으로 보물 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형태상의 특징은, 초익공 형식의 공포구성과 솟을합장이 사용되었고, 전면 4간의 홀수가 아닌 짝수 간살이를 채택했고,  지붕의 형태 또한 동쪽은 팔작지붕, 서쪽은 맞배지붕으로 달리하여, 기존의 틀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그의기질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랑공간의 구성방식에도 그 만의 생각이 묻어난다. 일반적으로  사대부 들의 살림집이 안채는

폐쇄적이고 내밀하게, 사랑채는 개방적이고 호방한 성격을 띄게 되는데 독락당은 별당과 같은 은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반면에, 자연과 이상을 향해서 한없이 열린 마음과 끊임없는 추구도, 독락당과 계정 곳곳에 스며있다. 독락당 동쪽 대청마루에 앉아서, 계곡의  흐르는 물과 물고기를 볼 수 있도록 외곽 담장에 구멍을 뚫고 살창을 끼워 넣었다. 시냇물은 담을 넘어 와서 사랑채 곁을 스치듯 희롱하며 지나간다. 몸은 집 안에 있으되, 눈과 마음은 물결을 따라 한없이 흘러만 간다!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회재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약초를 키웠던 독락당 뒷마당을 지나면 계정마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나타난다.

 미로찾기와 같은 중첩된 공간 들을 통과하여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계정마당은 무척이나 담담하고

수수한 감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뭔가 비밀스러운 공간과 아름다운 정자를 기대했다면 예상은 빗나가고 만다.

 

 계정은 독립된 정자 형태가 아니라 ㄱ자 형의 평면구성으로, 남쪽으로 향한 온돌방( 양진암 )과

계곡 쪽으로 향한 대청마루( 계정 )로 이루어지고, 몸채는 담장 밖으로 삐져나가 있어 계정마당에서는 단지 담장의 일부로서만 인식되어지고,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게 되어있다.

 

 

 

 

 

 사랑채 독락당 전경 (2006. 10.)

 

 계정마당에서 바라본  계정.  계정은 정자가 아니라 담장의 일부로 인식된다. (2006. 10.)

 

 계곡에서 바라본  계정-1 (2006. 10.)

 

계곡에서 바라본  계정-2 (2006. 10.)

 

 

 

 

 

 독락당의 하이라이트는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 있다.

집 밖으로 나가 계곡으로 내려서면, 관어대에 다리를 걸치고 우아한 자태로 서있는 독락당의 그 유명한 정자, 계정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집에서는 뒷 모습만 살짝 보여 주고, 자연을 향해서는 속살까지도 감추려 하지 않는 당당한 자태로 다가 온다.

  주출입구가 있는 솟을대문으로부터, 먼지 자욱한 세상으로부터 꼭꼭 숨기고 감추어 온, 그의 삶과

정신을 자연을 향해서는 모두 다 열어 놓았다. 마치 물, 바람, 나무 그리고 바위가 이 독락당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듯이......

 독락당 미로의 끝에서 만난 것은 자연과 회재의 심오한 정신세계이다.

 

아울러, 그 정신세계를 헤아려 본 좋은 자료가 또 하나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속에 내려가서 이 집을 보면 맙소사 벽체의 일부만으로 보이던 계정이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이 집을 만든 이가 갖는 열린 시각의 출구가 되어  맑은 물과 함께 바깥으로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홀로 즐기는 집이 독락당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모두가 자유로운 세계라는 말이 정확한 번역이었다.

모든 만물이 다 주체가 되어 공존하고 존재의 사유를 즐기는 그런 집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가. "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씨의 탁월한 해석이다.

 

 

 

 

 

 계곡에서 바라본 독락당(좌측)과 계정 (2005.01.)

 

 계곡에서 바라본 독락당(좌측)과 계정 (2005.01.)

 

 

 

 

 얼마 전에 독락당에 경사가 있었다. 독락당과 옥산서원 그리고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우리는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지냈는데, 문화 선진국들이 먼저 우리에게 일깨워 준 셈이다.전통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고 하는데, 상업화와 도시화로 부터 마을을 지켜내기가 어렵고, 관광지화로 마을 주민의 불편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같은 맥락으로 안동 하회마을은 심사과정에서, 이미 지나친 상업화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탈락의 위기를 맞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쁨은 잠시, 앞으로, 보물을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책임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시기인 것 같다.
 

 

 회재 나이 47세 되던 해에, 독락당에서 품었던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갔으나, 선생은 결코 다시 독락당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이 완성한 이상향을 떠나서, 먼지바람 자욱한 현실세계로 돌아간 것은, 결코 그 자신만의 영화를 위한 길이 아니었겠지만, 천리타향 유배지에, 그의 이상과 꿈을 묻어야만 했었다.

 

 회재 사후, 수 십년이 흘러서 독락당을 방문한 노계 박인로는, 고인의 자취를 따라 둘러본 후 감격한 나머지 독락당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다.

 

 

 ......

 天高地候도 有時辰 하려니와

 獨樂堂 淸風은 가업실까 하노라


 독락당( 건축 )의 형체는 세상의 변모에 따라 사라지겠지만,

 회재( 인간 )가 부여한 독락당( 건축 )의 품격만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리라!


 

 

 


                                                                                          20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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