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재는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교옥 때 서학과 관련 혐의로 경상북도
장기현으로 유배 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되어 11월 22일에서 23일쯤(음력) 강진에
도착, 동문 주막집 여인의 허락으로 4년간 기거 했던 주막집의 한켠 방을 사의재라 이름 하였으나, 그 당시의 주막집은 없어지고(동학 이후로 추정됨) 민가가 들어서 있었으나 서기2006년 다산실학 성지 조성사업으로 강진군이 매입하여(강진읍 동성리 495-1번지 대지면적 350평) 전문가 및 인근 주민들의 고증을 받아
복원건립 하였으며 다산 유적지 복원 사업의 개념으로 전체의 시설을 ‘四宜齋’라 부르기로 했다.
사의재의 의미는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 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 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중후하게 해야 하니 중후하지 못 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고 다산은 쓰고 있다.
이는 생각, 용모, 언어, 동작 등 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올바르게 규제 하면서 학자적인 행동으로 돌아가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외부에 대한 선포인 것 같다.(박석무, 풀어 쓰는 다산이야기에서)
다산은 흑산도에서 유배 살이 중인 중형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여인과의 대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느 날 그 주인 노파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이니 답변 해 주시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 같고,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수고가 더 많은데 성인들이 교훈을 세워 아버지는 중하게 여기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기며,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고 복(服)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며,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이 이루고 어머니의 집안은 도외시하는 편파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는 고경(古經)을 인용 ‘부혜생아(父兮生我)’와 ‘부위시생기(父爲始生己)‘ 등의 예를 들어 아버지를 중히 여긴다고 답 하였더니, 그 노파는 나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풀이나 나무의 예를 들어 말 하겠소. 아버지는 풀이나 나무의 종자입니다.
어머니는 풀이나 나무의 토양입니다. 종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야 미미한 일이지만, 부드러운 자양분으로 길러내는 흙의 은공은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밤의 종자가 밤나무가 되고, 벼의 종자가 벼가 됩니다. 몸 전체를 이루는 것은 모두 땅의 기운이지만 결국은 나무나 풀의 종류가 본래의 씨를 따라 나뉘게 되니 성인이 예를 제정한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라고 대답 했다.
또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다산의 대표저서인 경세유표를 쓴 뜻 깊고 역사적인 장소이다.
사의재의 주요 시설로는 본채인 주막집과 사랑채, 화장실, 초가정자, 우물, 장독대, 연못, 목교, 정원, 주차장이 있으며, 주막집은 다산선생 강진유배 당시 있었던 건물을 3칸 돌담초가 12평으로 강진읍성 동문 밖
샘 거리에 위치했던 주막으로 복원 하였고, 다산이 거처 했던 주막채 동쪽 방한 칸이 사의재이다.
사의재 현판은 다산 친필을 集字하여 화방사 아랫마을 금강선원(金剛禪院)의 春岡 赫印스님이 조각 하였다.
사랑채는 다산선생 기거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로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휴식시설로 목조초가 14평 규모로 지었다.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 한 칸, 여자 화장실 한 칸, 총5평으로 외형은 돌담초가로 지었으나, 내부시설은 이용 편의를 위해 현대식으로 시설 하였다.
초가정자는 사의재의 맨 동편에 있으며, 이것 또한 관광객의 휴게시설로 동천정(東泉亭)이라 이름 하였는데(양광식 문화재 연구소장), 그 의미는 다산 선생께서 기거 하시던 방을 사의재라 이름 하기 전에, 동천여사(東泉旅舍)라 한데서 동천정이라 하고, 판액은 다산의 제자 황상의 친필을 集字하여 赫印 스님이 조각하여 현판을 걸었다.
사의재 복원공사는 2006년3월28일에 착공, 2007년5월30일에 완공하였는데 순천에 소재한 은하건축이
설계하고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추천한 건축가 주병도(비쥬얼스토리)감독의 기술자문을 받아 200 여 년
전의 주막으로 복원하였다.
시공에 참여한 협진개발, 가람전기, 그리고 문화관광과 .여러분들의 정성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사의재는 다산선생의 강진유배의 첫 번째 유적으로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다산초당 못지않게 중요한 다산의 숨결이 스며있는 유적지이므로 우리 모두가 문화재(사적지)로 등록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다산정신을 길이 이어 가기를 기대한다.
김 상 수〈강진군 조직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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