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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전통건축-10416. 함안 고려동 유적지 — 육백 년을 이어온 고려 유민들의 붉은 백일홍 마을 (20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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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고려동 유적지와 종택

 

1. 재령이씨 문중의 육백 년 삶터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야트막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골짜기 안쪽에는 고려가 망한 지 육백 년이 넘도록 스스로를 고려의 유민이라 칭하며 살아온 한 문중의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밖은 조선의 땅이요 안은 고려의 땅이라 여겼던 이 마을이 바로 함안 고려동 유적지다.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를 지낸 모은공 이오가 고려의 멸망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은둔한 이래, 그 후손인 재령이씨 문중이 열아홉 대, 육백여 년에 이르도록 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온 이 유적은 1983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가 폐지된 이후로는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오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게 된 내력과 그 정신, 고려동학표비와 담장이 지닌 상징적 의미, 종택의 구성과 변천, 그리고 자미단과 자미정을 비롯한 여러 유적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한 문중이 왜 이토록 오랜 세월 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올 수 있었는지 그 정신적 뿌리를 함께 헤아려 보고자 한다.

 

 

 

 

 

 

 

 

 

 

 

 

2. 모은공 이오와 은거의 내력

모은공 이오는 재령이씨 사재령공 이일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 말 성균관 진사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그는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이오는 당대의 명유였던 야은 길재로부터 아직 나이가 젊으니 벼슬길에 남아 있으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고 은둔의 길을 택하였다고 전한다.

한강 정구가 편찬한 『함주지』에는 이오가 고려 말기에 밀양에서 의령을 오가던 중 함안군 모곡에 이르러 무성한 수풀 사이로 자미화, 곧 배롱나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마침내 이곳을 평생 살 곳으로 정하였다는 은거의 내력이 전한다. 이오는 재령이씨의 함안 입향조가 되었으며, 『함주지』는 이 자미화가 재령이씨 문중과 더불어 성쇠를 같이 한다고까지 기록하고 있어, 한 그루의 꽃나무가 한 가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준다.

 

고려동 유적지가 지닌 역사적 가치는 비단 한 인물의 절의에만 그치지 않는다.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는 시기, 벼슬을 버리고 은거의 길을 택한 이들은 이오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만은공 홍재와 금은공 조열 역시 고려의 관료로서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는데, 세 사람은 합천 해인사 아래 마을에 자주 모여 회포를 나누었다고 전한다. 이들의 뜻을 기려 그 마을은 훗날 삼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조선 태종 14년인 1414년에는 아예 삼가현이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까지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정조 10년인 1786년 무렵부터는 운구서원이 세워져 이 세 사람을 함께 향사하였으니, 고려동 유적지는 단순히 한 문중의 은거지에 그치지 않고, 왕조 교체기 고려 유신들의 집단적 절의 의식과 그 정신사적 맥락 속에서 함께 조망되어야 할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오와 뜻을 함께한 벗들의 이야기는 고려동 유적지가 조선 초기 사대부 사회 전반에 흐르던 절의 사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료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3. 고려동학표비와 담장, 그리고 동족 마을의 형성

이오는 이곳에 터를 잡은 뒤, 은거지 주위에 담장을 둘러쌓고 그 담 밖은 비록 조선의 영토일지라도 담 안만큼은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명시하는 뜻에서 고려동학이라 새긴 표비를 세웠다. 고려동학이란 고려동이 자리한 골짜기라는 뜻으로, 이 비석의 건립으로부터 오늘날 고려동 유적지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담을 쌓아 세상과 자신을 갈라놓는다는 발상은 언뜻 소극적인 도피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벼슬을 버리고 산속 깊이 자취를 감추는 은일과 달리, 이오는 굳이 담장이라는 뚜렷한 경계를 세워 고려 유민이라는 정체성을 만천하에 공표하였으니, 이는 침묵의 은둔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사 표명에 가까운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담장 안쪽 마을을 담안 또는 장내라 불렀는데, 이는 담장이라는 물리적 경계가 곧 고려와 조선,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정신적 경계로 인식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오는 담 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우물을 파며 논밭을 일구어 후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 왕조에 벼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 출사하지 말 것과 자신이 죽은 뒤에도 신주를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다. 후손들은 이 유언을 받들어 열아홉 대, 육백여 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도 재령이씨 후손 서른여 호가 이곳에 모여 살며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다. 하나의 가문이 이처럼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흔치 않아, 고려동 유적지는 한국의 동족 마을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동 유적지가 지닌 문화재적 가치는 조선 시대 동족 마을이 형성되고 유지되어 온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각별하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특정 성씨가 대대로 모여 살아온 동성 마을이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입향조가 관직이나 혼인, 낙향 등 비교적 통상적인 계기로 정착한 경우가 많다. 이에 견주어 고려동 유적지는 왕조 교체라는 극히 예외적인 정치적 격변을 계기로 형성되었으며, 그 형성의 동기가 처음부터 은거와 절의라는 명확한 이념적 지향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른 동족 마을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담장을 경계로 삼아 스스로 왕조의 신민이기를 거부했던 이오의 결단은, 이후 후손들에게 단순한 혈연 공동체를 넘어선 정신적 유대의 근거로 작용하였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재령이씨 후손들이 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고려종택의 구성과 한국전쟁의 시련

마을 안쪽에 자리한 고려종택은 이오 선생이 처음 지은 집으로, 오늘날까지 후손들의 살림집이자 문중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종택은 크게 주거 공간과 사당, 휴식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거 공간은 안채와 계모당, 행랑채, 그리고 복정이라 불리는 우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채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구조로 지어져 있으며 방문객들은 대청마루까지 올라가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안채와 떨어진 자리에 위치한 계모당은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였던 건물이며, 사당은 안채 뒤편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독립된 영역으로 구분해 놓았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은 고려동 유적지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고려동학표비와 담장을 제외한 자미정, 율간정 등 대부분의 목조 건물이 전화 속에 불타 사라졌고, 오랜 세월 이 마을을 지켜온 옛 건축물들의 원형은 이때 상당 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 후손들은 흩어진 주춧돌과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종택과 정자들을 차근차근 복원해 나갔으나, 조선 초기 창건 당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되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전쟁의 화마를 피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호상공의 생가는 그 존재만으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집 한 채가 조선 후기 반가 건축의 원형을 오늘에 전해 주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인 셈이며, 문화재로서 고려동 유적지가 지니는 가치 역시 이 생가를 빼놓고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5. 자미단·자미정과 고려동·퇴계선생길

종택의 솟을대문 옆으로 난 작은 문을 지나면 자미단과 자미정을 만날 수 있다. 자미단은 이오 선생을 기리는 제단이며, 그 곁에는 수령 백오십여 년에 이르는 배롱나무가 해마다 여름이면 붉은 자미화를 흐드러지게 피워 올린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 하여 백일홍나무라고도 불리는데, 껍질이 늘 매끄럽고 깨끗하여 예로부터 선비의 청렴함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져 서원이나 향교, 사대부 묘역 등에 즐겨 심겨져 왔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오가 이 땅에 터를 정한 계기 자체가 무성한 수풀 사이로 피어난 자미화의 아름다움에 있었던 만큼, 오늘날에도 자미단 주변의 배롱나무는 단순한 관상수를 넘어 이오 선생의 은거와 절의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휴식 공간인 자미정은 바로 이 배롱나무의 자미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진 정자로, 한국전쟁 당시 불타 주춧돌만 남았던 것을 후대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 밖에도 마을 안팎에는 율간정과 삼천여 평에 이르는 고려전 등이 남아 있어, 담장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던 옛 은둔 마을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고려전은 지금도 문중에 의해 경작되고 있어, 단순히 옛 유적을 눈으로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옛사람들의 자급자족 방식을 오늘날까지 이어가는 살아 있는 농경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편 고려동 옆 언덕에 자리한 삼우대는 1533년 퇴계 이황이 이곳을 방문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함안군은 이러한 내력을 바탕으로 고려동 유적지에서 삼우대와 자양산 임도를 거쳐 삼절각과 경도단비에 이르는 약 3.8킬로미터의 탐방로를 고려동과 퇴계선생길이라 이름 붙여 조성하였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이라는 조선 성리학의 두 거목이 남긴 발자취까지 함께 만날 수 있어, 고려동 유적지가 품고 있는 역사의 층위가 결코 한 시대에 그치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봄과 가을이면 이 길을 걷는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굽이굽이 이어지는 시골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려 유민의 절의와 조선 성리학자의 학문적 발자취가 한 폭의 풍경 속에 겹쳐지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된다.

 

 

 

 

 

 

 

 

 

 

 

 

 

 

 

 

 

 

 

 

6. 고려동 유적지ㅡ 역사관광지로 이어가는 절의의 기억

함안군은 고려동 유적지를 역사관광지로 조성하여, 이 길의 시작을 알리는 종합안내판과 삼우대를 비롯한 각 유적의 설명 안내판, 그리고 방향 안내판을 갖추어 놓았다. 방문객들은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을 둘러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문가 고증을 거쳐 마련된 고려시대 의복 체험, 고려전답에서 생산된 연으로 지은 연잎밥 체험, 고려인의 호연지기를 배우는 무사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 프로그램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과 비석을 눈으로 보는 관람을 넘어, 방문객이 고려 유민의 절의와 은둔의 정신을 몸으로 느껴 볼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담장 하나로 왕조의 교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맞서고자 했던 한 선비의 결기, 그리고 그 뜻을 육백 년이 넘도록 저버리지 않고 지켜온 후손들의 신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울림을 준다. 왕조가 바뀌고 국가 체제가 여러 차례 뒤바뀌는 격변의 세월 속에서도, 고려동 유적지는 한 가문이 지켜온 신념과 의리가 얼마나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 유적지가 후손들의 정성과 지역 사회의 관심 속에서 잘 보존되어, 고려 유민의 절의와 조선 시대 동족 마을의 생활상을 함께 전하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한 선비의 결단에서 비롯된 담장 하나가 육백여 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질기고도 오래도록 후대에 전해질 수 있는지를 새삼 되새기게 해 준다.

 

 

 

 

 

 

 

 

 

 

 

 

 

 

 

 

 

 

 

 

 


☆  백일 동안 붉은, 배롱나무

 

 여름을 물들이는 나무

장마가 물러가고 볕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칠월 말, 서원의 담장 곁이나 오래된 사찰의 마당 한켠에서 문득 붉은 기운이 번지는 것을 보게 된다. 다른 꽃들이 며칠을 못 버티고 스러지는 무더위 속에서 유독 이 나무만은 진분홍의 꽃송이를 가지 끝마다 매달고 여름 내내 물러서지 않는다. 배롱나무다. 부처꽃과에 속하는 이 낙엽활엽소교목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오히려 제철로 삼아, 다른 초록들이 지쳐갈 때 비로소 절정에 이르는 나무다.

 

사람들은 흔히 이 나무를 백일 동안 꽃이 안 진다 하여 백일홍나무, 줄여서 배롱나무라 부른다. 실제로는 하나의 꽃이 백일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원추꽃차례에 촘촘히 맺힌 꽃송이들이 차례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칠월 말부터 시월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그 모습이 마치 하나의 붉음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옛말에 화무십일홍이라 하여 세상의 꽃이란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하였으니, 백 일을 견디는 이 나무의 붉음은 그 자체로 예사롭지 않은 상징이 되었다.

 이름에 새겨진 내력

배롱나무라는 이름은 백일홍나무가 소리 나는 대로 변하여 배기롱나무를 거쳐 오늘의 형태로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이 나무를 부르는 이름은 유난히 많다. 나무껍질이 얇고 매끄러워 손끝으로 가볍게 문지르면 잔가지 끝까지 파르르 떨리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하여 간지럼나무, 혹은 한자로는 파양수라 불렀고, 꽃이 질 무렵이면 논에서 새 쌀을 수확할 수 있었다 하여 농가에서는 쌀밥나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도 불렀다. 선비들이 사랑채나 서원 마당에 즐겨 심었다 하여 양반나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이 나무를 자미화라 일컫는데, 그 유래는 당나라 황실과 맞닿아 있다. 자미는 본디 황제를 상징하는 별자리인 자미원에서 온 말로, 당 현종이 조정의 중서성을 자미성으로 고쳐 부르고 그 안에 이 나무를 가득 심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양귀비를 그토록 아꼈다는 현종이 실은 이 붉은 꽃을 양귀비보다 더 사랑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배롱나무는 오래전부터 동아시아 궁정과 사대부의 정원을 대표하는 나무였다. 온 집안이 붉은빛으로 가득하다 하여 만당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니, 그 화려함이 한 시대를 풍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무가 품은 결

배롱나무의 학명은 라거스트로에미아 인디카이며, 원산지는 중국 남부로 알려져 있다. 높이 삼 미터에서 칠 미터에 이르는 작은 나무로, 줄기는 연한 베이지빛을 띠며 매끈하게 벗겨져 마치 살갗을 드러낸 듯한 인상을 준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가지 끝마다 여섯 장의 꽃잎을 지닌 꽃이 원추꽃차례로 무리 지어 피는데, 꽃잎의 가장자리가 잘게 주름져 있어 멀리서 보면 한 덩이의 불꽃처럼 보인다. 수술은 서른에서 마흔 개에 이르지만 그중 여섯 개만이 유난히 길게 뻗어 나와 있고, 암술대는 하나로 길게 밖으로 나온다. 열매는 십월 무렵 삭과로 여물고, 잎은 자미엽, 뿌리는 자미근이라 하여 예로부터 아이들의 백일해나 부인병을 다스리는 약재로도 쓰였다.

이 나무의 진짜 매력은 꽃보다 오히려 줄기에 있다는 평이 많다. 두꺼운 껍질을 이루지 못하고 얇게 벗겨지는 매끄러운 수피는 언뜻 헐벗은 듯 보이지만, 그 벗겨짐이야말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정직함의 표상으로 읽혔다. 제주도에서는 이 매끄러운 껍질을 뼈가 드러난 것으로, 붉은 꽃을 핏빛으로 여겨 죽음을 연상시킨다 하여 집안에는 절대로 심지 않고 무덤가에만 심는 풍습이 있었다니, 같은 나무를 두고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덧씌워졌던 셈이다.

 서원과 정자에 심긴 뜻

그러나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배롱나무는 오랫동안 청렴과 지조의 상징으로 사랑받아 왔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산사와 선비들이 학문을 닦던 서원, 정자에 유난히 이 나무를 즐겨 심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다시 피었다가 지기를 백 일 동안 쉼 없이 반복하는 모습은 학문에 정진하는 이의 끈기를 은유했고, 껍질이 없는 듯 매끈하게 속을 드러낸 줄기는 감출 것 없는 마음가짐을, 붉은 꽃은 단심, 곧 한번 정한 뜻을 쉬이 꺾지 않는 절개를 뜻한다고 여겨졌다. 고려 때 최자가 남긴 보한집에 이미 이 나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조선 세조 때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에서도 백일홍을 홍철쭉과 함께 꽃나무의 등급 가운데 하나로 꼽았을 만큼, 그 내력은 뿌리가 깊다.

 

전라남도 담양의 명옥헌원림은 이러한 정취를 오늘날까지 가장 선명하게 간직한 곳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 오희도가 은거하던 터에 그 아들 오이정이 정자를 세우고 연못가에 배롱나무와 소나무를 심었는데, 수령 백 년이 넘는 나무 스무여 그루가 여름이면 연못 물빛까지 진분홍으로 물들인다. 경상북도 안동의 병산서원이나 체화정 같은 옛 정자와 서원의 연못가에도 배롱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물에 비친 붉은 꽃 그림자가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부산 양정동에는 수령 팔백 년에 이르는 배롱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자라고 있으며, 경상남도 창녕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심었다고 전하는 배롱나무 서른다섯 그루가 여전히 무리를 이루어 서 있다. 이처럼 오래된 배롱나무는 단순한 조경수를 넘어 한 지역의 역사와 인물, 정신을 함께 품고 있는 살아 있는 기록이 된다.

 

 견딤이 남기는 아름다움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은 화려함보다는 견딤에서 온다. 한 송이 한 송이는 며칠을 못 넘기고 지지만, 그 자리를 다음 꽃송이가 곧바로 이어받아 백 일이라는 긴 시간을 붉게 채워낸다. 이는 화려하게 한순간 피었다 스러지는 벚꽃이나 매화와는 결이 다른 미학이다. 오히려 무더위와 장마와 태풍을 다 견뎌내면서도 꾸준히, 조용히 다시 피어나는 끈기에 가깝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에서 학문의 자세를 배우고, 죽은 이를 기리며 넋을 위로하고, 때로는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하나의 나무가 이토록 다양한 의미의 그릇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배롱나무가 오랜 세월 한반도의 정원과 마당을 지켜온 이유를 말해준다.

 다시, 여름의 문턱에서

올여름에도 서원의 마당과 오래된 정자의 연못가에는 어김없이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매끄러운 줄기를 한 번 쓸어보고, 주름진 붉은 꽃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여름꽃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백 일을 견디는 붉음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무더위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피어나는 이 나무를 통해, 우리는 짧은 아름다움보다 오래 지속되는 견딤의 가치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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