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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전통건축-10408. 진주성(晉州城) — 남강이 지켜온 호국의 성지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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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晉州城)

 

1. 개관과 연혁

 

진주성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일대, 남강(南江)을 끼고 자리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읍성이다.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곽 둘레는 약 1,760m에 이른다. 이 성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본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다. 『대동지지』에는 촉석산성이 본래 진주의 성으로, 고려 신우(우왕) 3년인 1377년에 토축성을 돌로 개축하여 둘레 800보에 3개의 문을 설치하고 촉석성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다만 하륜이 지은 진주성 성문기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미 성터가 허물어져 있었다는 언급과, 1377년 가을 조정이 변방 방비를 위해 여러 도에 관리를 보내 주현의 성을 수리하며 옛터에 흙으로 다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기록도 함께 남아 있어, 고려 말 진주성이 토성에서 석성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여러번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진주성은 고려 말에 이미 흙으로 쌓인 형태로 존재하다가, 왜구의 잦은 침입에 대비하여 1379년(우왕 5) 무렵 진주목사 김중광의 주도로 석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정리된다. 이후 고려 공민왕 대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몇 차례 더 고쳐 지어졌다. 조선 선조 24년(1591) 7월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외성(外城)까지 새로 쌓았는데, 공교롭게도 이는 이듬해 발발한 임진왜란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진주성은 축성 기법의 시대별 변천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으로서, 한국 성곽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공북문 ]

 

 

 

 

[ 김시민 장군상 ]

 

2. 지리적 조건과 방어상의 가치

 

진주성이 영남 우도의 요충지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지형적 이점 덕분이었다. 성의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로 남강이 흐르고 있어 적이 공성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세였으며, 서쪽 또한 절벽에 의지하고 있었다. 북쪽에는 대사지라는 세 곳의 못이 형성한 깊은 늪이 가로놓여 있어 이 방면 역시 공략이 쉽지 않았다. 즉 진주성은 삼면이 자연 지형으로 보호되는 천혜의 요새였고, 오직 동쪽 평지 방면만이 인위적 방비가 필요한 지점이었다. 이러한 지형은 훗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막아내는 결정적 배경이 된다.

 

전략적 측면에서도 진주는 경상우도의 대읍이자 전라도로 통하는 관문에 해당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경상우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곡창지대인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로 인식하여 그 공략을 명령했을 정도로, 이 성은 임진왜란 전체 전황을 좌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로 평가받았다.

 

[ 영남포정사 망미루 ]

 

 

 

 

 

 

 

3. 제1차 진주성 전투 — 진주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로 진주성을 지목하고 공략을 명령했다. 6월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왜군의 수륙병진 계획이 좌절되면서 조선이 방어전에 돌입하자,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경상우도를 꺾으려 했으나 진주성만은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이에 7월 하순 왜군은 육로로만 서진하여 진해와 고성을 점령하고 8월 초 진주를 위협했다. 김시민은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며 방어태세를 강화했고, 왜군은 남강 남안까지 진출했으나 강을 건너 성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해 일단 사천으로 물러났다.

 

연이어 고전하던 왜군은 김해에서 작전회의를 열어 경상도 병마의 주력이 진주성에 있으니 이 뿌리를 먼저 뽑으면 다른 방면의 조선군도 스스로 흩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대부대를 동원해 진주성을 먼저 함락시키는 것을 최선의 방책으로 결론지었다. 이렇게 하여 1592년 음력 10월 4일(양력 11월 7일), 왜군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성내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군사 100여 명, 즉 관군 3,800여 명이 백성과 합세하여 결전을 준비했으며, 성 밖에서는 곽재우가 이끄는 경상도 의병들이 왜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전투는 1592년 10월(음력) 벌어져 제1차진주성전투로 불리며, 곧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으로 꼽힌다. 하루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왜군은 끝내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을 물렸으며, 이로써 조선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 승리는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후대에 기억되며, 소수의 병력이 지형과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대군을 격퇴한 상징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 청계서원 ]

 

 

 

 

4. 제2차 진주성 전투와 성의 함락

제1차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왜군의 시도는 이듬해 재현되었다.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이 전투는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진행하던 시점에 벌어졌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조선 연합군에 밀려 퇴각하며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강화 교섭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다시 진주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이때 명나라는 회담을 이유로 전투를 회피했고,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 등이 조정의 명으로 의령에 이르렀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창의사 김천일이 분연히 일어섰고,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등이 힘을 합쳐 성을 사수하고자 했다. 외부의 원군이 사실상 끊긴 상황에서 성내 군민만으로 열흘간 항전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 내에 남아 있던 군·관·민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학살되는 비극을 맞았으며, 이 과정에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의암에서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다는 이야기가 형성되었다. 1593년 7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이 일화는 오늘날까지 진주성을 대표하는 이야기로 전해지며, 진주 지역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대첩으로 기린다.

 

 

[ 촉석문 ]

 

 

[ 촉석루 ]

 

 

 

5. 촉석루 — 진주성의 상징

 

촉석루는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한 단층 팔작지붕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에 해당한다. 1241년(고종 28) 창건되었다는 설과 1365년(공민왕 14) 창건되었다는 설이 함께 전하며, 이후 일곱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진주성의 남장대로서 장원루라고도 불렸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촉석루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남강 가에 뾰족뾰족한 돌들이 솟아 있는 모습을 따서 지었다는 설과, 촉석산에서 돌을 캐어다 누각을 지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함께 전한다. 2012년에는 미국 CNN이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선'을 선정하며 이곳을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 의암 ]

 

 

 

 

 

 

 

 

6. 소실과 근대 이후의 훼손

 

진주성의 수난은 임진왜란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 후기를 거치며 여러 건물이 화재와 노후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는데, 특히 진주성의 상징인 촉석루의 경우 1379년(우왕 5) 왜구에 의해 불탄 뒤 1413년(태종 13) 진주 출신 영의정 하륜의 제안으로 고을 사람들이 비용을 모아 진주목사 권충과 판관 박시결의 주선으로 세 번째로 재건되었고, 1491년(성종 22) 목사 경임에 의해 네 번째로, 1583년(선조 16) 목사 신점에 의해 다섯 번째로 재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다시 파괴된 촉석루는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1725년(영조 원년) 병사 이태망에 의해 일곱 번째로 중수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정치적 격변이 진주성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 1895년(고종 32) 13도제가 실시되며 경상도가 남·북도로 분리되자 진주는 경상남도 감영 소재지가 되어, 감영이 진주성 내 경상우병영 자리에 들어섰다. 오늘날 남아 있는 영남포정사 망미루는 바로 이 감영의 정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진주가 1925년까지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 기능하는 동안,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진주성은 본격적으로 헐리기 시작했다. 성 북쪽의 연못인 대사지를 매립하여 진주공립보통학교와 진주경찰서를 짓고, 본성동로 일대의 성곽은 일본인 거주지 조성을 위해 대부분 해체되었으며, 촉석루 뒤쪽 언덕은 공원화되어 그 한가운데 일본 신사까지 세워졌다. 내성보다 규모가 컸던 외성 역시 이 시기에 스러지고, 오늘날에는 내성만이 남게 되었다.

 

곧이어 닥친 6·25전쟁은 또 한 번 치명타를 안겼다. 1725년 마지막으로 중수되었던 촉석루는 6·25전쟁 때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국보로까지 지정되었던 건물이 전화 속에 사라진 것이다. 1948년 국보 제276호로 지정된 바 있던 촉석루가 6·25전쟁 중 다시 불타버리자, 시민들이 힘을 모아 진주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1960년 여덟 번째로 중건하였다.

 

 

 

 

 

 

 

 

 

 

7. 복원 사업과 문화재 지정을 둘러싼 논의

일제강점기의 훼철과 전쟁의 참화로 만신창이가 된 진주성은 1969년부터 제1차 진주성 복원사업이 추진되면서 비로소 회복의 전기를 맞았다. 복원사업 이전 성내에는 민가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이를 모두 철거해야 하는 대규모 작업이 필연적이었다. 오늘날 공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서면 널찍하고 정비된 공간이 펼쳐지는데, 이는 근래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복원작업의 결과이다. 성내 지형은 평지와 경사지, 야트막한 언덕과 구릉지가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으며, 너른 잔디밭과 다양한 수목이 어우러진 공원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다만 진주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곳집이자,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친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재건된 촉석루의 문화재적 위상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촉석루의 재건이 근거 자료 없이 이루어져 엄밀한 의미의 '복원'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고, 전소 이후 재건된 건물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여겨져 보물 지정이 해제되기도 했다. 그 뒤 2025년 11월 21일 경남연구원은 '진주성 촉석루의 국가지정유산 보물 환원을 위한 제언'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발간하여, 원형 고증과 사료를 근거로 촉석루를 국가지정문화재로 환원해야 한다는 논의를 다시 촉발시켰다. 이는 진주성 복원이 단순한 외형 재현을 넘어, 역사적 진정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는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현재 촉석루는 1973년 재건된 건물이 2020년 6월 1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의기사 - 논개 사당 ]

 

 

 

 

 

 

 

 

 

 

8. 성내 주요 건물과 시설 개관

오늘날 진주성 내성 안에는 촉석루, 창렬사, 의기사,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촉석문, 공북문, 호국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각 시설의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정문과 성문 체계. 진주성의 정문은 촉석문이며, 후문은 공북문이다. 관람객은 대개 공북문을 통해 성내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는 근래 복원된 성문으로서 일제강점기에 헐렸던 것을 되살린 것이다.

  장대(將臺). 서장대와 북장대는 각각 성의 서쪽과 북쪽에서 지휘와 관측 기능을 담당하던 누각이다. 촉석루가 남장대로서 남쪽을 지켰던 것과 짝을 이루어, 진주성 전체가 사방을 아우르는 지휘 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사당과 제향 시설. 창렬사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 순의 신하들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의기사는 논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진주성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호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활약과 관련된 사찰로, 호국불교의 전통을 성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설이다.

  관아 유적. 영남포정사는 1895년 경상남도 감영이 설치되었을 때의 정문 건물인 망미루로, 오늘날 감영 관련 시설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구이다.

  추모 시설과 기념물.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은 계사년(1593) 제2차 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제단이다. 이 밖에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가 1619년(광해군 11) 음력 7월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진주전성각적비라고도 불리는 이 비는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나란히 서 있으며, 1987년에는 전사한 영현들을 위로하고자 비의 후편에 계사순의단이 건립되었다. 성내에는 이 밖에도 김시민 장군 동상, 포루, 우물, 진주 김해 김씨 비각 등이 자리하고 있어, 좁은 공간 안에 조선 전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의 기억이 중층적으로 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1984년 개관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상남도 최초의 국립박물관으로서,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던 진주성 안에 자리하고 있다. 전시실은 임진왜란실, 두암실, 기획전시길, 영상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자총통과 비격진천뢰, 그리고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는 대완구와 중완구를 비롯해 3,500여 점의 임진왜란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국내 최초의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의 존재는 진주성이 단순한 유람 공간을 넘어,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학술적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국립진주박물관 ]

 

 

 

 

 

 

 

9. 오늘의 진주성 — 공원이자 역사의 곳집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서,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 때 석성으로 수축한 유적이다. 430여 년 전 진주목사 김시민과 7만의 민군관이 순절했던 이 장소는, 오늘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남강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이자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동시에, 경상남도가 추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안심관광지로도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여가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삼국시대 이래의 토성에서 고려 말의 석성으로, 다시 임진왜란의 격전지에서 근대의 감영 소재지로,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훼철과 전쟁의 참화를 거쳐 오늘의 복원된 모습에 이르기까지, 진주성의 매 시대별 지층에는 한반도 남부 지역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특히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의 승리와, 이듬해 성이 함락되며 발생한 참혹한 희생은 이 성을 단순한 관방 유적이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진주성을 찾는 이들이 촉석루의 아름다움과 남강의 풍광을 감상하는 동시에, 창렬사와 의기사, 순의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주성은 그렇게, 평화로운 공원의 얼굴과 처절했던 항전의 기억을 함께 품은 채 오늘도 남강 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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