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사는 이야기 ■/영화 이야기

영화이야기 -020.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시 쓴 〈오디세이〉 ㅡ '신화(神話)' 를 '실화(實話)' 로, '신들의 장난' 을 '인간사의 아픔' 으로 노래하다 (2026.08.05.)

728x90
반응형
SMALL

 

 

 

 

 

(이하 사진출처 : 다음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시 쓴 〈오디세이〉

 

 

1. 신을 지우고 인간을 세우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가 택한 가장 대담한 연출적 선택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신들의 개입으로 가득 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신적 장치를 스크린 위에서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오디세우스의 10년 방랑은 포세이돈의 분노, 아테나의 가호, 제우스의 중재라는

신들의 변덕과 장난에 좌우된다.

그러나 놀란이 그려낸 화면에는 신과 여신, 마법이 존재하던 시대라는 문장으로 문을 열면서도,

그 초자연적 존재들의 개입을 서사의 표면에서 걷어내고

대신 인간의 선택과 죄의식을 전면에 세운다.

 

실제로 2017년판 오디세이아 번역자이자 놀란에게 영감을 준 에밀리 윌슨 교수조차

제우스와 포세이돈 같은 신들의 직접적 개입이 배제된 설정에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로,

이는 원작에 대한 파격적인 재배치였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각색의 편의가 아니라,

놀란이 신화를 다루는 태도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는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 이야기를,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빚어낸 고통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신의 저주가 아니라 인간의 기만과 오판이

오디세우스를 바다 위에서 10년간 떠돌게 만든 진짜 원인이 되는 셈이다.

 

이는 곧 '신화를 실화로' 읽어내려는 시도이며,

신들의 장난이라는 초월적 설명 장치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인간사의 구체적인 아픔을 채워 넣는 작업이다.

 

이러한 재배치는

원작이 지닌 세계관의 근본적 질서를 건드리는 일이기도 하다.

오디세이아에서 인간은 늘 신들의 시선 아래 놓인 존재였고,

시련은 신의 뜻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놀란의 화면에서 그 시선은 사라지고,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지켜보는 신 없이

오롯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로 남겨진다.

 

감독은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영화가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삼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인간의 연결과 유대감이라는 취지로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신의 개입 없이도 인간의 이야기가 스스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을 짐작하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놀란이 그동안 쌓아온 필모그래피 자체가

이미 '신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는 점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인물,

거대한 재난 앞에 홀로 선 인간,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개인의 여정은

비유로서의 신화를 반복적으로 다루어온 셈이다.

 

이번 작품은 그 비유의 대상이었던 신화를

직접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리고 그가 원전 앞에서 택한 태도는,

신화를 신화 그대로 경외하기보다

그것을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온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거대한 여정'이라는

익숙한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쪽이었다.

 

 

 

 

 

 

2. 승리 뒤에 남은 죄의식영웅서사에서 속죄의 서사로

 

이러한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이다.

놀란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에 영웅 서사가 아닌

전쟁의 책임과 속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이 신화를 소환한 것으로 보인다.

 

트로이 목마의 계략으로 성문을 열어젖힌 지략가 오디세우스는,

놀란의 화면 안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 내내 죄의식에 시달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승리를 위해 여신 아테나의 이름을 팔고,

아군 병사인 시논을 속였던 과거의 무게를 그는 그대로 떠안는다.

 

그 덕에 전쟁은 끝났지만 아군도 적군도 죽었고,

그 죽음의 무게는 신의 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몫으로 남는다.

여기서 신화 속 '장난'은 더 이상 신들의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인간의 폭력이 만들어낸 파장이며,

그 파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승리한 영웅조차 예외가 아니다.

놀란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개선이 아니라 참회의 여정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서사시가 본래 지녔던 모험담의 쾌감을 인간 존재의 무게로 되돌려 놓는다.

 

고전학자 에밀리 하우저는 이러한 재해석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원래 지녔던 복합적 성격을 단순화시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원작의 오디세우스는 지략가이자 기만자이며,

동시에 헌신적인 남편이자 잔혹한 복수자이기도 한 다층적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죄의식이라는 하나의 축으로 수렴시키는 일은

인물의 입체성을 다소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순화는

관객이 3천 년 전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밀착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다.

신의 시험이 아니라 스스로의 잘못을 마주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번역되었을 때,

오디세우스의 방황은 비로소 오늘날 전쟁을 겪은, 혹은 전쟁을 지켜본 이들의

죄책감과 포개어질 수 있게 된다.

 

 

 

 

 

 

3. 괴물에게도 얼굴을신화적 존재를 역사의 질감으로

 

신들의 장난을 걷어낸 자리에서 놀란이 택한 것은

역설적으로 극도의 물리적 사실성이다.

그는 전편을 IMAX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시도를 통해

신화적 세계를 허구가 아닌 실재했던 역사처럼 다루고자 했다.

 

사이클롭스를 연출하며

그는 괴물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는 원칙 아래 사이클롭스에게 인격을 부여했고,

오디세우스가 동굴에 들어갔던 것처럼

실제로 매일 진짜 동굴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전해진다.

트로이 목마 역시 높이 10.7미터에 달하는 실물로 제작되었으며,

실제 항해가 가능한 목재 전투함까지 만들어졌다.

 

이러한 방식은 신화적 존재들에게서 초월성을 걷어내고,

그들을 인간이 마주해야 했던 실제 위협과 고통의 얼굴로 바꾸어 놓는다.

외눈박이 거인도,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스킬라도,

더 이상 신이 내린 시련의 상징이 아니라 고대인이 실제로 기록해 둔 역사처럼

묵직하게 다가오는 생존의 무게로 다가온다.

 

'놀란이 신화를 현실로 끌어내리기보다 현실을 신화의 높이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화는 낮아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간의 고통이 신화만큼 무거운 무게로 격상된 것이다.

 

이 물리적 사실성의 추구는 캐스팅을 둘러싼 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백인으로 재현되어 온 헬레네 역에 흑인 배우가,

시논 역에 트랜스젠더 배우가 캐스팅되면서

일부에서는 역사적 고증을 문제 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놀란의 사실성은 애초에 인종적·시대적 고증의 문제가 아니라,

신화적 존재가 인간에게 가하는 위협과 감정의 질감을

물리적으로 실감 나게 구현하려는 지향에 가깝다.

 

그는 원전이 있는 창작물에서 이러한 논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신화를 다시 쓰는 작업 자체가 이미 해석의 영역임을 분명히 했다.

즉 그가 추구한 실화적 질감은 고증의 정확함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에게 남긴 상처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하려는

감각의 문제였던 셈이다.

 

 

 

 

 

4. 그러나 남는 균열장난을 지운 자리의 공백

 

 

물론 이러한 재해석이 모든 관객에게 온전히 설득력을 얻은 것은 아니다.

에밀리 윌슨 교수는 신들의 개입을 배제한 선택에 의문을 표하며,

영화가 전달하려는 반전 및 반비겁주의 메시지가 비일관적이라고 평가했다.

신의 장난이라는 서사적 원동력을 걷어냈을 때,

인간의 선택만으로 그 모든 시련의 무게를 설명하기에는 논리적 공백이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신화 속에서 신들이 수행했던 역할,

즉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우연성을 인간의 죄의식만으로 대체하려 할 때,

그 서사는 때로 과도하게 도덕적이거나

인과율에 갇힌 이야기로 좁아질 위험을 안는다.

 

또한 원작 속 여성 신격들의 위상이 축소된 점도 같은 맥락에서 아쉬움으로 지적된다.

헬레네, 칼립소, 키르케 등 주요 여성 인물들이 서사의 중심축에서 밀려나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기능적 존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은,

신들의 장난을 인간의 서사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신화가 원래 품고 있던

다성적 목소리 일부가 소거되었음을 암시한다.

 

원작에서 이들 여성 신격은 단순한 조력자나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는 독자적인 의지와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 그들이 오디세우스라는 한 인간의 내면적 성장을 비추는 거울로만 소환될 때,

신들의 장난이라는 원작의 다층적 세계는

한 남자의 죄의식이라는 단선적 구조로 수렴될 위험을 안는다.

 

언어의 층위에서도 비슷한 균열이 발견된다.

대사가 지나치게 짧고 현대적인 어조로 구성되어,

고전이 지녀야 할 품격 대신 가벼운 인상을 남긴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신들의 장난이라는 유장한 운문적 전통을 인간의 산문적 대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서사시 특유의 격조가 다소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 영화가 짊어진 근본적인 딜레마를 드러낸다.

신화를 실화로, 초월을 인간사로 끌어내리려 할수록,

그 신화가 본래 지녔던 언어의 무게와 신비 또한 함께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다.

 

 

 

 

 

 

5. 크리스토퍼 놀란이 부른 새로운 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이〉가 시도한 것은 분명하다.

신들의 변덕을 인간의 고통으로, 초월적 운명을 자기 책임의 문제로 옮겨 부르는 일이다.

이는 3천 년 된 서사시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노래하려는 시도이며,

그 노래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신의 총애를 받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죽음의 무게를 견디며 걸어가는 한 인간으로 남는다.

 

신화를 실화로 끌어내린 이 재해석이 성공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갈리지만,

적어도 놀란은 신들의 장난이라는 오래된 알리바이 뒤에 숨지 않고,

그 자리에 인간사의 아픔을 정면으로 세워 놓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태도는 뚜렷하다.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신화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신화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이다.

신들이 장난처럼 흩뿌려 놓은 시련을,

그것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인간의 자리에서 다시 노래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이 오래된 서사시 앞에서 택한 연출가로서의 대답이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