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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세계유산-008.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5) ㅡ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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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수원화성


Ⅰ.
서론

경기도 수원 한복판에는 팔달산을 감싸고 흐르는 5.7킬로미터 남짓한 성곽이 있다. 정식 명칭은 화성(華城)이지만 흔히 수원성이라 불리는 이 성곽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재위 18년인 1794 1월에 착공하여 불과 2 8개월 만인 1796 9월에 완성한 조선 후기 축성술의 결정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뒤주 속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화성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부근에 있던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운 계획도시를 세웠다. 그것이 오늘의 수원화성이다. 1963년 대한민국 사적 제3호로 지정된 이 성곽은 1997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원화성이 특별한 것은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성은 세계유산치고는 역사가 짧은 축에 속한다. 그럼에도 등재가 가능했던 것은, 성을 쌓을 당시의 설계도와 공사 기록을 낱낱이 남긴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한국전쟁 등으로 파괴된 부분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세계유산은 원형 그대로 남은 건축물을 원칙으로 삼지만, 수원화성은 기록에 힘입어 이례적으로 그 원칙의 예외를 인정받은 사례로 꼽힌다. 본론에서는 정조가 화성을 쌓은 배경, 축성에 담긴 기술과 철학, 그리고 성곽을 이루는 주요 시설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축성의 배경효심과 정치적 구상이 만나다

화성 축성의 표면적인 계기는 정조의 효심이었다. 정조는 당쟁에 휘말려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던 화산으로 옮기고, 그 일대에 있던 민가와 관아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새 고을을 조성했다. 그러나 화성의 축조에는 효심 이상의 정치적 포부가 담겨 있었다. 정조는 당파정치를 근절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새로운 정치적 거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수원을 경제적으로 부강한 신도시이자 수도 남쪽을 지키는 국방요새로 키우고자 했다. 이런 이유로 화성은 단순한 방어용 성곽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도시와 방어시설을 하나로 통합한 성곽도시로 설계되었다.

2. 축성의 기술실학정신이 빚어낸 결정체

화성 축성을 실무적으로 이끈 인물은 실학자 정약용이었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축성 방식을 두루 검토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무거운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인 유형거를 고안해 공사비와 인력을 절감했다. 총괄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맡고 실제 공사는 조심태가 지휘했으며, 축성에 쓰인 석재만 20만 개가 넘어 수원 시내 화강암 산지 곳곳에 채석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벽돌의 사용이다.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벽돌 건축 기법을 받아들인 북학파 실학자들의 영향으로, 화성은 돌과 벽돌을 함께 쌓는 석전교축(石塼交築) 방식을 채택하여 동서양의 건축 기술이 만나는 접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례적이었던 것은 노동의 방식이다. 당시 관례상 부역에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으나, 정조는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일반 노동자와 차별 없이 품삯을 지급하도록 했으며, 무더위에는 척서단 등의 약을 내리고 공사를 일시 중단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애민정신은 성벽 하나하나에 실명제로 기록된 축성 기록과 더불어, 화성이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통치철학의 실현이었음을 보여준다.

3. 지형을 살린 평산성나뭇잎을 닮은 성곽

화성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평산성의 형태를 띤다. 평지와 산지를 모두 아우르며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성곽은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살려 쌓았는데, 그 결과 화성의 평면은 한 장의 나뭇잎을 닮은 유려한 곡선을 이룬다. 이는 자원의 낭비를 줄이면서도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이자, 성 안의 백성을 한 명이라도 더 품으려 한 정조의 뜻이 반영되어 성의 경계를 여러 차례 넓힌 결과이기도 하다.

4. 성곽을 이루는 시설들

화성에는 성문, 옹성,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루, 봉수대 등 한국 성곽이 갖출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어시설이 집약되어 있어 조선 축성 기술의 집대성이라 평가받는다. 북문이자 정문 역할을 하는 장안문은 임금이 한양에서 수원으로 올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문이었기에 이례적으로 정문의 지위를 얻었다. 서문인 화서문과 그 옆의 서북공심돈은 내부가 비어 있는 망루로, 오늘날 수원시 휘장의 도안으로 쓰일 만큼 화성을 상징하는 시설이 되었다. 남수문과 북수문은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지점에 놓인 수문으로, 특히 북수문은 인근의 방화수류정과 어우러져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꼽힌다. 이 밖에도 국경과 해안의 정보를 전달하는 봉돈, 군사 지휘소인 서장대와 각루 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화성이 실전에 대비한 정교한 방어체계였음을 보여준다.

5. 『화성성역의궤』와 원형 복원의 가치

화성은 축성 이후 자연재해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그러나 1801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과 제도, 동원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와 용도, 예산과 임금 계산, 시공 기계와 재료 가공법, 나아가 공사 일지까지 낱낱이 수록되어 있어, 오늘날까지도 이 기록을 근거로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덕분에 화성은 원본 그대로 남은 유산이어야 한다는 세계유산의 일반 원칙에서 벗어나면서도, 기록에 기반한 진정성 있는 복원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세계유산 목록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화성성역의궤』 역시 조선왕조의궤의 일부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하나의 유산이 건축과 기록 두 방면에서 함께 인류의 자산으로 인정받는 드문 사례를 만들었다.

 

Ⅲ. 결론

수원화성은 왕의 효심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안에는 당쟁을 극복하려는 정치적 이상과 실학정신, 그리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까지 여러 층위의 의미가 겹겹이 쌓여 있다. 동서양의 축성 기술을 아우르면서도 지형을 거스르지 않은 설계, 임금을 제값에 지불한 공사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후대가 원형을 되살릴 수 있도록 남긴 정밀한 기록은 18세기 조선이 도달한 기술적·사회적 성취의 수준을 보여준다. 오늘날 수원화성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파괴된 유산도 충실한 기록만 있다면 진정성을 잃지 않고 후대에 전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사례로 남아 있다.

 

 

 

 

 

 

 

 

 

 

 

 

 

 

 

 

 

 

 

 

 

 

 

 

 

                                                                                                                                       (이상 모든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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