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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35.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ㅡ 백정과 마부, 비단장수가 천하를 떠받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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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제 35 편 —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서론 — 풍패(豐沛)의 저잣거리에서 나온 사람들

『사기』 열전 35편 번역등관열전은 한고조 유방의 휘하에서 평생을 군진(軍陣)에 바친 네 명의 무장—번쾌(樊噲), 역상(酈商), 하후영(夏侯嬰), 관영(灌嬰)—의 합전(合傳)이다. 제목의 네 글자 樊酈滕灌은 각 인물의 성씨나 봉호의 머릿자를 딴 것으로, 하후영은 등현(滕縣)의 현령을 지냈기에 등공(滕公)이라 불렸고, 그 별칭의 '등(滕)' 자가 열전 제목에 들어갔다.

이 네 사람의 출신을 살펴보면 이 열전의 성격이 또렷이 드러난다. 번쾌는 개백정이었고, 관영은 비단 행상이었으며, 하후영은 관아의 마부였다. 사마천 스스로 풍패(豐沛)에 가서 이들의 자료를 수집해 보니, 모두 칼부림을 하거나 개장수였거나 비단을 팔던 사람들이었다는 소회를 열전 말미에 남겼고, 이들이 고조를 만나 한 제국에 이름을 떨치고 자손까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을, 파리떼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듯 그리되었다고 비유했다.

 

이 한 마디 평어(評語)야말로 번역등관열전 전체를 꿰뚫는 사마천의 시각이다. 한신·팽월·경포처럼 독자적 세력을 거느렸다가 비참하게 숙청된 제후왕들과 달리, 번쾌·역상·하후영·관영은 끝까지 유방 개인에게 종속된 가신(家臣)이자 무장이었다. 이들은 천하를 다투지 않았고, 오직 유방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한신이나 팽월과는 다르게—천수를 누리거나 적어도 토사구팽의 비극은 피해갔다. 이 열전은 결국 평민 출신 무장들이 어떻게 제국의 기둥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 충성이 어떤 방식으로 보상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군상극(群像劇)이다.


본론 — 네 사람의 칼과 채찍

1. 번쾌(樊噲) — 홍문(鴻門)의 방패

번쾌는 본래 개를 잡아 파는 백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시정잡배가 아니라 유방과 동향(同鄕)이자 동서지간이었다. 번쾌는 유방과 같은 고향 출신이며, 여후의 여동생 여수(呂須)의 남편이었다. 이 혼인 관계는 번쾌가 단순한 부장이 아니라 유방의 친족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했다.

번쾌의 가장 극적인 활약은 홍문연(鴻門宴)에서 나타난다. 항우의 모사 범증(范增)이 유방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가운데, 위기를 감지한 번쾌는 칼과 방패를 들고 연회장으로 난입하여 항우 앞에 버티고 섰다. 그의 기세에 눌린 항우는 오히려 번쾌에게 술과 고기를 내렸고, 번쾌는 그것을 통째로 받아 씹어 삼키며 결연한 언사로 항우를 꾸짖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무용담이 아니라, 유방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순간 번쾌의 용맹과 충심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음을 보여준다. 일설에는 유방이 함양에서 미녀와 보물에 빠져 머뭇거릴 때도 번쾌가 그 옷자락을 끌어내다시피 하며 출진을 재촉했다고 전해진다.

 

번쾌는 이후 항우와의 전쟁에서, 그리고 한나라 건국 후 각지의 반란 진압에서 끊임없이 군공을 쌓았다. 고조 공신 서열에서 번쾌는 소하·조참·장오의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했으며, 하후영이나 관영보다도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유방이 임종을 앞둔 시점, 번쾌가 연(燕)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중 누군가 그를 모함하여 여씨(呂氏) 일족과 결탁해 변란을 도모한다고 참소했다. 유방은 진노하여 진평과 주발을 보내 번쾌를 그 자리에서 처형하라 명했다. 그러나 진평은 사태의 미묘함을 헤아려 번쾌를 죽이지 않고 함거(檻車)에 실어 압송하는 데 그쳤다. 도중 유방이 붕어하자 번쾌는 처형을 면하고 살아남았다. 이는 평생 충성을 다한 공신조차 권력의 의심 앞에서는 한순간에 사지로 내몰릴 수 있다는 한초(漢初) 정치의 냉혹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2. 역상(酈商) — 형의 죽음을 딛고 선 무장

역상은 세객(說客) 역이기(酈食其)의 동생이다. 역이기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동맹을 성사시켰으나, 한신의 독단적인 제나라 침공으로 인해 격노한 전횡에게 가마솥에 삶겨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형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음에도 동생 역상은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라, 공신 서열 6위에 4,800호의 식읍을 받았다.

역상의 공적은 형의 비극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쌓아올린 것이었다. 그는 유방의 군진에서 줄곧 전투의 최전선에 섰고, 그 군공은 후대에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도 받아들여졌다. 고조 공신후자연표를 보면, 논공행상 당시 이미 사망한 인물의 공로는 종종 그 가족에게 몰아서 주어졌는데, 역상의 높은 서열에도 형의 비극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역상이 가장 빛을 발한 순간은 유방이 죽은 직후였다. 여후가 권력을 독점하려 옛 공신들을 모조리 주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을 때, 역상은 여후의 측근 심이기(審食其)를 설득해, 만약 공신들을 멸족시킨다면 당시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주발과 관영이 회군하여 여씨 일족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고, 이로써 비밀에 부쳐졌던 유방의 죽음이 비로소 공표될 수 있었다. 이 한마디 진언으로 역상은 한나라 초기 정치적 격변을 막아낸 결정적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유방이 미리 역상에게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한신을 해치려 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훗날 한신이 역상의 손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부끄러움에 자결했다는 일화이다. 역상은 형의 원한을 사사로이 풀지 않고 국법과 대의를 우선시한 인물로 그려진다.

3. 하후영(夏侯嬰) — 마부에서 명문가의 시조로

하후영은 본래 패현(沛縣) 관아의 마부였다. 그는 명을 받들어 사람을 보내는 일로 사수(泗水)를 지나다니다, 종종 마차를 세워두고 유방과 이야기를 나누며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쌓았다. 이 우정의 일화 중 하나는 두 사람이 칼싸움 놀이를 하다가 유방이 실수로 하후영에게 상처를 입혔는데, 평소 유방을 시기하던 자가 이를 고발하자 하후영은 끝까지 유방이 한 짓이 아니라고 잡아떼었고, 거짓 증언이 드러나 수백 대의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유방을 발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하후영의 인물됨—생사를 가르는 형벌 앞에서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강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하후영의 진가는 그가 마부였을 때 익힌 뛰어난 기마술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전차를 몰며 전장에서 활약했고, 궁지에 몰린 유방을 여러 차례 구출해냈다. 팽성(彭城)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하여 유방이 도주할 때,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자녀들을 수레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마다 하후영은 묵묵히 아이들을 다시 끌어올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하후영이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유방 일가의 존속을 지킨 은인이었음을 보여준다.

 

하후영은 공신 서열 8위, 여음후(汝陰侯)에 봉해져 식읍 6,900호를 받았다. 후대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명문가인 하후씨의 시조가 바로 그였다. 한낱 마부에서 출발한 인물의 후예가 수백 년 뒤 위나라의 핵심 가문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한초 공신들의 입신이 단지 한 세대의 영화에 그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4. 관영(灌嬰) — 비단장수, 가장 치열한 기병장

관영은 다른 세 사람과 달리 패현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현재의 허난성 상추시 출신으로, 따로 군사를 거느리고 귀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처음의 대우는 낮았으나, 워낙 용맹하게 싸우면서 차근차근 지위를 올려 유방의 신임을 얻었다. 비단 행상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은 번쾌의 백정 출신과 더불어 한초 공신 집단의 출신 성분이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보여준다.

관영의 전공은 특히 기병전에서 두드러졌다. 팽성대전 패배 후 형양으로 쳐들어온 초나라 기병을 요격할 사령관을 뽑을 때, 측근들이 기마술에 뛰어난 관영을 추천하여 그가 기병부대를 창설했고, 이후 항적(項籍, 항우)과의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많은 공을 세웠다. 한신의 별동대에 배속되어 조나라와 제나라 정벌에 참여했고, 유수(濰水) 전투에서는 조참과 함께 항우 다음가는 맹장으로 평가받던 용저(龍且)를 격파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사마천의 서술에서 관영은 다른 세 사람과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 번역등관열전에서 관영의 기록에는 "치열하게 싸워", "온 힘을 다하여 격렬하게 싸워"와 같이 다른 세 장수의 열전에는 보이지 않는 표현이 쓰였고, 자신이 직접 적장을 사로잡거나 베었다는 기록도 유독 많아, 상당한 무력을 지닌 장수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한신 휘하 별동대에서의 활약이 한신의 전략적 명성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했던 측면도 있다. 관영 역시 역상과 함께 유방 사후 군권을 쥐고 있던 인물로, 여씨 척결과 문제(文帝) 옹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결론 — 준마의 꼬리에 붙은 파리떼, 그러나 천하를 만든 자들

번역등관열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천하를 평정하는 일은 한신과 같은 천재적 전략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묵묵히 전장을 누비고, 주군의 곁을 지키고, 위기의 순간 몸을 던지는 수많은 무장들의 누적된 헌신이 있어야 했다. 번쾌의 용맹, 역상의 충직함, 하후영의 신의, 관영의 치열함—이 네 가지 덕목이 합쳐져 한 제국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결정적으로 하나로 모인다. 한신이나 팽월처럼 독자적인 군사력과 영지를 거느리며 황제와 대등한 위치에 서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끝까지 유방 개인에게 충성하는 가신의 위치를 지켰다. 그 결과 한신과 팽월이 토사구팽의 비극으로 막을 내린 반면, 번쾌·역상·하후영·관영은—번쾌가 말년에 위기를 겪긴 했으나—대체로 그 자리를 보전하고 자손에게 부귀를 물려줄 수 있었다. 권력과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생사를 갈랐다는 것을, 이 네 사람의 삶은 한신노관열전과 대조적으로 증명한다.

 

사마천이 이 열전 말미에 남긴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간다"는 비유는 자칫 이들의 공적을 폄하하는 듯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유의 행간에는 오히려 따뜻한 시선이 깔려 있다. 보잘것없는 신분에서 시작한 자들이, 때를 만나고 사람을 알아본 안목으로 역사의 한복판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것이야말로 사마천이 풍패의 저잣거리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역사의 묘미였다. 칼을 갈던 백정도, 말을 몰던 마부도, 비단을 팔던 행상도, 시대가 그들을 부르자 망설임 없이 응답했다. 그리고 그 응답이 한 제국 사백 년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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