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 열전 제34 편 — 전담열전(田儋列傳)
서론 — 부활의 땅, 제(齊)
천하가 진(秦)의 통일로 묶인 지 불과 십여 년이 지났을 때, 제국의 강압적 질서는 도처에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에서 봉기하여 장초(張楚)를 세우자, 천하 각지의 구(舊) 왕국 후예들이 잇따라 깃발을 들었다. 산동(山東)의 대지, 옛 제(齊)나라의 땅에서도 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씨를 처음 지핀 자가 바로 전담(田儋)이었다.
전담은 옛 제나라 적현(狄縣) 출신으로, 전제(田齊) 왕족의 후손이었다. 그에게는 유능한 종제(從弟) 전영(田榮)과 전횡(田橫)이 있었고, 이 세 사람은 강성한 종족을 거느리며 지방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전담열전(田儋列傳)은 바로 이 전씨(田氏) 삼형제—더 정확히는 전담·전영·전횡이라는 세 세대에 걸친 인물들—의 흥망을 기록한 편이다.
전담이 진나라의 명장 장한과의 전투에서 일찍 전사한 관계로, 실제로 전담열전은 전영과 전횡을 다룬 부분이 더 많다. 이 점은 열전의 제목이 주는 인상과 실제 내용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는데, 사마천이 전담이라는 첫 번째 인물을 열전의 이름으로 내세운 것은 그가 제나라 부흥의 원점(原點)이자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무게 중심은 필연적으로 뒤를 이어 싸우고, 싸우다 죽고, 또 싸운 전영과 전횡에게로 옮겨간다.
이 열전의 본질은 한 가문의 투쟁기이면서 동시에 멸망한 나라의 부활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보여주는 비극이다. 제(齊)는 세 번 일어났고, 세 번 꺾였다. 사마천은 그 반복되는 좌절 속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전씨 삼인의 삶은 단순한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역사가 아니라, 절의(節義)와 자존(自尊)이 무엇인가를 묻는 인간학적 물음으로 수렴된다.
본론 — 세 번의 불꽃
1. 전담 — 스스로 왕이 된 자
이세황제 원년 10월, 옛 위(魏)나라 방면을 공격한 주불(周巿)이 적현을 공격하자, 전담은 계책으로 주불과 맞서 싸우는 현령(縣令)과의 접견 자리를 만들어 현령을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제나라 왕위에 올라, 적현의 군사를 이끌고 주불의 군사를 몰아내고 동쪽의 제나라 땅도 손에 넣었다.
이 대목은 전담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남의 부름을 기다리지 않았다. 혼란한 정세를 읽고, 먼저 행동했으며, 누군가의 추대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단으로 왕위에 올랐다. 전제(田齊)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로서 무너진 제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은 그가 짊어진 사명이었고, 그는 주저 없이 그것을 택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세황제 2년 6월, 장한이 위나라 왕 위구를 공격해 임제(臨濟)에서 포위하자 위나라를 구원하러 출진했으나, 장한의 야습에 패배해 임제에서 죽었다. 위(魏)를 구하러 나섰다가 장한의 기습에 쓰러진 것이다. 전담의 죽음은 전격적이었다. 그가 왕으로서 제나라를 다스린 시간은 불과 수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이후 전씨 일족이 걸어갈 긴 투쟁의 불씨를 당겼다.
2. 전영 — 항우의 분봉에 맞선 자
전담이 쓰러진 뒤 제나라의 주도권은 그의 종제 전영에게로 넘어갔다. 전영은 전담의 아들 전시(田市)를 제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相)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전횡은 장수로서 제나라를 평정했다. 세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제나라를 재건한 것이다.
그러나 항우(項羽)가 진(秦)을 멸하고 천하를 재편하는 분봉(分封) 과정에서 전영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항우는 제나라를 셋으로 나눠 전도를 제나라 왕에, 전시는 교동(膠東)왕에, 전안은 제북(濟北)왕에 봉했는데, 전영은 이 분봉에 불만을 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었다. 전영의 눈에 항우의 분봉은 명백한 불의(不義)였다. 전담·전영·전횡이 피를 흘리며 회복한 제나라 땅을, 항우에게 붙어 공을 세운 자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전영은 전도를 내쫓고, 전불은 항우가 두려워 교동으로 도망치자 추격하여 죽였으며, 제북왕 전안까지 공격해 죽여 세 제나라를 아울러 자신이 제왕이 되었다. 이로써 전영은 항우의 분봉 체제 전체를 정면으로 뒤흔든 셈이 되었다. 그는 팽월(彭越)에게 군사를 주어 초(楚)의 배후를 교란하게 하고, 조(趙)의 진여(陳餘)와 손을 잡아 항우에 맞서는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하고자 했다.
한왕 2년 항우가 제나라를 치자 성양에서 회전을 벌이다 패해 평원현으로 달아났고, 그곳의 백성에게 살해되었으니 재위 8달 만이었다. 전영의 죽음도 전담의 죽음처럼 허망했다. 적의 칼이 아니라 백성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그가 제대로 민심을 얻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전영은 결기와 독기는 충분했으나, 사람을 포용하고 아우르는 덕량이 부족했다. 탁월한 투사였으나 천하를 품을 그릇은 아니었다.
3. 전횡 — 오백 빈객과 함께 선택한 죽음
전횡의 이야기는 전씨 삼인의 서사 중 가장 길고 가장 깊다. 전영이 죽자 전횡이 초나라에 맞서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항우가 제나라에서 자행한 무자비한 학살—성곽을 불사르고, 항복한 병졸을 생매장하고, 노약자와 부녀를 포로로 잡은 만행—이 오히려 제나라 사람들을 결집시켰고, 전횡은 그 분노를 기반으로 제나라를 재건했다.
3년 후, 유방의 부하 한신에 의한 제나라 정벌이 개시되었다. 유방의 부하 역이기(酈食其)가 제와의 동맹을 맺는 사자로 방문하여 유방과 제는 동맹한다. 그러나 한신은 그것을 무시하고 제를 공격해 왔다. 역이기의 외교적 설득을 믿고 국경의 수비를 풀었던 전광과 전횡은 한신의 기습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배신에 격분한 전횡은 역이기를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했으나, 그것이 역이기를 보낸 유방에게 영원한 적이 되는 길임을 알았을 것이다.
전광은 패하여 도망가다 처형되었고, 뒤를 이어 전횡이 왕위에 오르나 한나라 장군 관영의 공격을 받아 위나라 팽월에 귀순한다. 그러나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팽월마저 제거되자 전횡은 마지막 도피처를 잃었다. 그는 오백여 명의 빈객(賓客)들을 이끌고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 은신했다.
유방이 사자를 보내 전횡을 회유했다. 항복하면 목숨을 보전해 주겠다고, 심지어 제후나 왕으로도 봉할 수 있다고 했다. 전횡은 수도 낙양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그러나 낙양을 이십리 남겨둔 지점에서 전횡은 멈추었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끊었다. 그는 사자에게 말했다. "일찍이 역이기를 삶아 죽인 내가, 그의 형제를 신하로 부리는 한왕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뒤에 그를 따르던 오백여 명의 수하도 뒤따라 자결했다고 한다.
이 장면이 전담열전의 정점이다. 전횡이 자결한 것은 단순한 패배자의 절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온몸으로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역이기를 죽인 것은 전횡의 결정이었다. 그 결정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고, 그 무게가 허락하지 않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오 백 명의 빈객들이 함께 죽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강요받지 않았다. 전횡을 따르기로 선택했고, 전횡이 선택한 죽음에도 함께했다.
이 사건에 대해 후세의 많은 시인묵객들은 전횡을 '고절(高節)', '충의(忠義)', '강개(慷慨)'로 칭양하며, 그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심리적 정황을 수치 때문으로 보았고, 그렇기에 그의 자결은 '의사(義死)'라고 하였다. 반면 일부는 더 일찍 죽었어야 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쟁 자체가 전횡이라는 인물이 후세에 던진 울림의 깊이를 증명한다.
전횡 고사의 문학적 형상화에는 『사기』 전담열전이 그 원전 텍스트로서 역할이 컸다. 더 나아가 이 이야기는 한반도에까지 뻗어 나갔다. 한국의 충청남도 보령시 외연도와 전라북도 군산시 어청도 일대에는 전횡을 당신(堂神)으로 숭배하는 풍습과 함께 전설이 전해지며, 음력 4월과 동지에 당제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 역사적 패배자가 이역(異域)의 신(神)으로 모셔진다는 것은 그 죽음이 단순한 패배로 기억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론 — 제(齊)의 비극, 사마천의 시선
전담열전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죽음이 의미 있는가'이다. 전담은 천하를 경략하는 도중 전사했다. 전영은 자신이 세운 대의(大義)를 미처 이루지 못하고 백성의 손에 죽었다. 전횡은 천하를 잃고 섬으로 숨었다가 마지막 순간 스스로 목을 쳤다. 셋 모두 패자(敗者)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결코 그들을 실패자로 폄하하지 않는다.
특히 전횡의 서사는 사마천이 이 열전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오백 빈객의 집단 자결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을 사마천은 담담하고도 정확하게 기록한다. 과장도 없고, 감상도 없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 깃든 경이와 애도가 행간에서 느껴진다. 사마천은 역이기를 삶아 죽인 전횡의 행위가 잔인한 복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굴복을 거부한 전횡의 마지막을 숭고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전담열전이 놓인 위치도 의미심장하다. 앞의 열전 32와 33이 각각 한신과 노관—제국에 흡수되었다가 제거된 공신들의 이야기—이라면, 열전 34의 전씨 일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국에 흡수되기를 거부한 자들의 이야기다. 전횡은 유방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후로 봉해질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택하지 않았다. 그 선택의 이유가 단지 역이기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아니면 더 깊은 자존의 신념이었는지는 사마천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전횡의 오백 빈객이 강요도 없이, 명령도 없이, 주군의 죽음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이 인물이 단순한 패배한 군주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을 만큼의 무언가가 전횡에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사마천은 독자에게 묻는다.
권력의 시대에 굴하지 않는 것,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회피하지 않는 것, 그리고 따르는 자들에게 죽음으로써 응답하는 것—전담열전은 진(秦) 말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그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절조(節操)와 명분(名分)을 이야기한다. 제(齊)는 결국 한나라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전씨 일족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다 건너 이역의 섬에서도, 조선의 시인들이 읊는 한시에서도, 그 이름은 오래도록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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