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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1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 의리와 지략의 두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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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제16 편 ㅡ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서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인간 군상의 본질을 꿰뚫는 거대한 문학적 기획이다. 그 가운데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은 전국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조나라()의 두 걸출한 인물, 즉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과 책사(策士) 우경(虞卿)의 삶과 행적을 함께 묶어 다룬 열전이다. 이 두 인물이 한 편에 배치된 것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사마천은 이들을 통해 '인재를 알아보는 눈[知人]' '의리를 지키는 삶[守義]'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조명하고, 동시에 그 한계와 좌절을 냉정하게 기술한다.

 

평원군은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천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린 조나라 공자(公子)이자 재상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의 붓끝은 그를 단순한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판단 착오와 아집이 조나라에 얼마나 큰 화를 불렀는지를 직시하게 만든다. 반면 우경은 뛰어난 변론과 예리한 전략적 식견으로 조나라를 구하려 했으나, 결국 유랑하며 저술로 생을 마감한 불우한 지식인이었다. 이 열전은 그러한 두 인물의 명암(明暗)을 교차시키며, 시대와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다.

본론

1. 평원군(平原君) 조승명성과 실책 사이

 

평원군 조승은 조 혜문왕(惠文王)과 효성왕(孝成王) 두 군주를 섬기며 세 차례 재상을 지낸 실력자였다. 그가 거느린 식객은 한때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인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바 '모수자천(毛遂自薦)'의 고사가 탄생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초나라와의 합종(合從) 동맹을 맺으러 갈 때, 평원군이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식객 모수(毛遂)가 스스로 나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그 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인재를 알아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마천이 평원군을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히 칭찬 일변도가 아니다. 장평(長平) 전투를 둘러싼 평원군의 행보는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한()나라의 상당(上黨) 지역이 문제가 되었을 때, 평원군은 그 땅을 받아들이도록 조왕을 설득했다. 상당을 차지하면 이익이 크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진나라와의 전면전을 불러왔고, 결국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병사 사십만이 생매장당하는 미증유의 참화로 이어졌다. 사마천은 이 대목에서 평원군을 '이익 앞에 큰 해악을 보지 못한 인물'로 간결하게 평한다.

더욱이 한단(邯鄲) 포위전에서도 평원군의 한계는 드러난다. 진나라 군대가 한단을 포위하자, 평원군은 초나라와 위나라에 구원을 요청해야 했다. 초나라에는 앞서 합종으로 동맹이 맺어졌지만, 원군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위나라의 공자 신릉군(信陵君)이 노력하여 마침내 구원군이 당도했지만, 이 과정에서 평원군이 취한 조치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다. 그는 자신의 식객들을 설득하여 결사대를 만들고, 재산을 풀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전략적 주도권은 이미 그에게 없었다. 사마천이 그를 '당시의 현인(賢人)'이라 부르면서도 '오로지 이익을 좇아 대의를 잃었다'고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원군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그의 뛰어난 식견이나 결단력보다는, 인재를 모으고 그들의 기개를 존중했던 포용력에 있었다. 모수자천의 일화에서 그는 모수가 맹활약하자 즉시 자신의 판단 착오를 인정하고 그를 상빈(上賓)으로 대우했다. 이러한 솔직함과 너그러움은 분명 군자의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전국시대의 냉혹한 현실을 헤쳐나가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평원군은 식객 문화의 화려한 상징이었지만, 진정한 전략가로서의 통찰은 부족했던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2. 우경(虞卿) — 불우한 책사의 뛰어난 식견

우경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러 온 책사로, 짚신 한 켤레와 황금 백 냥을 예물로 가지고 조 혜문왕을 만난 인물이다. 그의 언변과 통찰은 단번에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는 즉시 상경(上卿)에 봉해졌다. 그 이름 '우경'도 이때부터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이처럼 화려한 출발을 한 우경이었지만, 그의 생애는 점차 좌절과 유랑으로 점철되어 간다.

우경의 탁월함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장평 전투 이후의 외교 국면이었다. 진나라가 장평 대승 이후 기세를 몰아 조나라를 압박하자, 진나라에 땅을 할양하고 강화(講和)를 맺어야 한다는 주화론(主和論)이 대두되었다. 당시 재상 우경(虞卿)은 이에 강하게 반대하며 독창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조나라가 진나라에게 땅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제()나라에게 땅을 주어 제나라와 연합하고, 그 힘으로 진나라에 맞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나라가 다른 나라와 연합하는 것이므로, 연합의 기색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진나라가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 주장은 탁월한 외교적 혜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나라 왕과 신하들은 단기적인 안위를 위해 진나라와의 강화를 선택했고, 우경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나라는 영토를 할양했음에도 진나라의 침공을 막지 못해 한단 포위라는 더 큰 위기를 맞이했다. 우경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또 한 번 우경의 의리가 빛난 것은 위제(魏齊) 사건에서다. 위제는 조나라에 망명해 있던 위나라 재상 출신의 인물로,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그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조나라를 압박했다. 평원군이 위제를 보호해주다가 결국 곤경에 처하자, 우경은 자신의 봉지(封地)와 재상 자리를 포기하고 위제를 데리고 도망쳤다. 공명과 부귀를 모두 버리고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려 한 것이다. 비록 위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우경도 도주 과정에서 대량(大梁)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지만, 이 일화는 우경이 단순한 책략가가 아니라 깊은 의리를 지닌 인격자였음을 보여준다.

 

이후 우경은 제후국에 유세할 처지가 못 되어 대량에서 빈곤하게 살면서, 자신의 울분과 사상을 담아 『우씨춘추(虞氏春秋)』를 저술했다. 사마천은 이 책이 당시에 전해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입신출세의 길이 막힌 지식인이 저술로써 자신의 뜻을 남기는 전통은,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쓴 것과도 닮아 있다. 사마천 자신도 치욕을 당한 뒤 『사기』를 완성했으니, 그가 우경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3. 두 인물의 대비사마천의 시각

사마천은 왜 평원군과 우경을 한 편의 열전에 묶었는가.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이 같은 시대 조나라에서 활약했기 때문이지만, 더 깊은 의도가 있다. 평원군은 권세와 재물을 가진 공자(公子)로서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렸지만, 정작 진정한 인재를 알아보는 데 실패했고 이익 앞에 대의를 잃었다. 반면 우경은 변변한 배경도 없이 오직 지략과 의리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유랑과 저술로 생을 마쳤다.

이 대비는 단순한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마천은 평원군을 통해 '식객을 많이 모으는 것' '진정한 인재를 얻는 것'은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평원군에게는 모수라는 걸출한 인재가 있었지만, 그는 3년 동안이나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반면 우경은 단 한 번의 면담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고, 그의 외교 전략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그러나 우경의 탁견도 군주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사마천이 두 인물을 함께 다룸으로써 제기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좋은 인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그리고 인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평원군은 인재를 모았으나 듣지 못했고, 우경은 말했으나 들려지지 않았다. 그 결과 조나라는 결국 진나라에 의해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울러 사마천은 우경이 위제를 구하려 한 행동을 통해 '의리(義理)'의 가치를 강조한다. 세속적 관점에서 우경의 선택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재상 자리와 봉지를 버리고 곤경에 빠진 친구를 위해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를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행동 속에서 선비의 본분과 인간적 진정성을 발견한다. 이는 사마천이 자신의 역사 서술 전반에서 견지하는 인간관, '이름보다 실질을, 성공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태도와 맥을 같이한다.

결론

「평원군우경열전」은 전국시대의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인간적 비극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평원군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지만 그의 실책은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우경은 비범한 지략과 의리를 겸비했지만 끝내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쓸쓸히 저술로 삶을 마감했다. 사마천은 이 두 인물을 통해 인재와 의리, 권세와 한계, 지략과 운명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사마천이 이 열전을 쓰면서 자신의 처지를 투영했을 가능성이다.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을 당한 뒤에도 붓을 놓지 않고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저술로써 세상에 남은 우경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열전의 마지막에 사마천이 남긴 짧은 평어(評語)는 그래서 더욱 함축적이고 깊은 울림을 지닌다.

 

평원군우경열전은 『사기』 열전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 즉 역사는 승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부대끼며 살다 간 모든 인간의 기록이라는 사마천의 신념을 잘 보여주는 편이다. 두 인물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인재를 알아보고 있는가. 그리고 의리와 이익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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