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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03. 노·장·신·한 열전(老莊申韓列傳) —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를 세상에 관철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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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제3편 — 노·장·신·한 열전(老莊申韓列傳)


서론 — 사마천은 왜 이 네 사람을 한 편에 묶었는가

기원전 91년경,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궁형(宮刑)의 치욕을 감내하면서 필생의 역작 『사기(史記)』를 완성했다.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 가운데 열전(列傳) 70편은 제왕과 재상을 위해 일한 인물들, 때로는 계급을 초월한 기상천외의 인물들의 전기를 담고 있다. 각양각층의 인물들의 삶이나 그들과 관련된 사건들을 서술하고 평가하였기에 사마천의 역사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던져 준다.

그 열전의 제3편은 얼핏 이상한 조합처럼 보인다. 제3편은 '노자·한비 열전(老子韓非列傳)'으로, 도가의 노자와 장자, 형명학의 신불해, 법가의 한비자를 다룬 열전이다. 그래서 '노·장·신·한 열전'이라고도 한다. 도가와 법가는 흔히 대척점에 있는 사상으로 분류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창하며 인위적 통치를 거부한 노자·장자와, 법(法)·술(術)·세(勢)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주의자 신불해·한비자가 같은 편에 실린다는 것은 의외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사마천의 탁월한 역사적 통찰이다. 최초로 한비자를 노자의 학파로 본 것은 사마천이었다. 그는 노자, 장자, 신불해, 한비를 한꺼번에 다루는데, 이는 황로학적(黃老學的) 관점이었다. 황로학이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사상을 결합한 것으로, 군주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철학이다. 법가의 통치술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드러내지 않고 다스린다'는 도가의 무위(無爲)에 닿는다는 것이 사마천의 시각이었다.

이 글은 노·장·신·한 열전에 등장하는 네 인물을 차례로 살펴보고, 사마천이 이 열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더 깊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본론 — 네 인물의 생애와 사상

1. 노자(老子) — 소를 타고 사라진 도서관장

 

노자는 초나라 고현(苦縣) 여향(勵鄕) 곡인리 사람이고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라고 한다. 그는 주나라에서 수장실(守藏室)의 관리, 즉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는 벼슬을 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도서관장이다. 천하의 모든 문헌이 모이는 자리에서 수십 년을 앉아 있었으니, 그가 쌓은 지식과 통찰의 깊이는 헤아리기 어렵다.

사마천이 기록한 노자 열전의 백미는 공자(孔子)와의 만남이다. 공자가 주에서 잠깐 머무를 때 노자에게 배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노자와 공자는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남겼는데 이게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난다. 노자는 공자에 대해 사기꾼이자 위선자와 같다고 비판한 반면, 공자는 노자를 가리켜 용처럼 변화무쌍하고 감히 접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극찬했다. 이 역설적인 엇갈림 속에 두 사상의 본질적 차이가 담겨 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인위적 규범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한 공자와, 모든 인위가 이미 타락의 시작이라고 본 노자는 애초에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없었다.

주나라가 쇠락하자 노자는 관직을 버리고 서쪽으로 떠난다. 노자는 이후 소를 타고 함곡관 밖으로 가 종적이 묘연해졌는데, 출관하기 전에 문지기인 윤희(尹喜)에게 5000자로 된 책을 전수하니, 이것이 '도덕경'이라고도 불리는 《노자》이다. 사마천은 그의 수명에 대해 "160세 혹은 200세 이상을 살았다는 설이 있으니 도를 닦아 양생했기 때문"이라며 확언을 피했다.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노자가 남게 된 이유다.

2. 장자(莊子) — 나비의 꿈을 꾼 자유의 철학자

사마천은 장자에 대해 이름은 주(周)이고 전국시대 송나라 몽(蒙) 땅 출신이며, 한때 칠원(漆園)의 관리를 지냈다고 기록했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되 그것을 무한히 확장하고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펼쳐 놓은 인물이다.

유가 사상에서는 인(仁)과 의(義)를 대전제로 두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반면, 이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인위(人爲)에 지나지 않고, 인의와 같은 것은 오히려 사람의 본성을 기만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장자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제도와 규범이 자연의 흐름을 억누르는 억지다. '호접지몽(胡蝶之夢)', 즉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모른다는 역설은 고정된 자아와 경계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사마천이 소개한 일화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초나라 왕이 장자를 재상으로 초빙한 장면이다. 장자는 사신에게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사는 거북이와 제사상에 올려진 거북이 중 어느 쪽이 행복하겠느냐"고 반문하며 돌려보냈다. 권력과 명예라는 황금 새장보다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선언이었다. 사마천은 장자가 10만 자 이상의 저술을 남겼으며 대부분이 우언(寓言), 즉 비유와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3. 신불해(申不害) — 술(術)로 나라를 경영한 재상

신불해는 정나라 출신으로 한(韓)나라 소후(昭侯)를 섬기며 재상이 된 인물이다. 사마천은 그의 학문이 황로사상(黃老思想)을 근본으로 하고 형명(刑名)을 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그가 주창한 '술(術)'이란 군주가 신하를 다루는 기술로, 신하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지 않으면서도 군주가 직접 나서지 않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의 기예였다.

한비는 선진 법가철학의 집대성자로서 법령을 중시한 상앙(商鞅), 신하를 통솔하는 용인술을 중시한 신불해(申不害), 통치 권력을 의미하는 세(勢)를 중시한 신도의 주요 이론을 받아들여 법(法), 술(術), 세(勢)가 서로 결합하는 법치사상체계를 건립하였다. 즉 신불해의 '술'은 한비자에 의해 더 큰 체계 속에 흡수되어 법가사상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신불해가 재상으로 있는 15년 동안 한나라가 강성해졌다는 기록은 그의 통치술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했음을 증명한다.

4. 한비(韓非) — 설득의 대가가 설득하지 못하고 죽다

한비는 한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형명과 법술의 학설을 좋아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황로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한비는 날 때부터 말을 더듬어 유세는 잘못하였으나 글을 잘 지었다. 한비는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순자)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신이 한비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말을 더듬는 사람이 설득의 어려움에 관한 가장 탁월한 논문 '세난(說難)'을 썼다는 것은 역사의 잔인한 아이러니다. 그는 한나라의 쇠락을 안타까워하며 왕에게 수차례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사악하고 바르지 않은 신하들 때문에 등용되지 않는 사태를 슬퍼하고, 지나간 옛날의 성패득실을 살펴보면서 그는 고분(孤憤), 오두(五蠹), 내저설, 외저설, 설림, 세난 등 십여만 언의 글을 지었다.

그런데 그 글의 독자가 뜻밖의 인물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한비자가 쓴 고분과 오두를 본 진시황이 크게 감명을 받아 "이 사람과 교유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한나라를 공격해 한비를 사신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사는 동창 한비가 중용될 것을 두려워해 진시황에게 모함했다. 이사는 옥에 갇힌 한비에게 독약을 보내 자살을 종용했다. 한비는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해 진시황을 만나길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진시황은 한비를 투옥시킨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석방을 명령했을 때 이미 한비는 유명을 달리한 후였다.

설득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깊이 꿰뚫어 본 사람이, 정작 자신의 무고함을 설득하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국의 감옥에서 홀로 죽어 갔다. 한비는 유세의 어려움을 알고 세난 편을 매우 자세하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진나라에서 죽어 자신은 정작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사마천은 이 사실을 기록하며 탄식을 숨기지 않았다.


결론 — 올바른 말은 왜 세상에 닿지 못하는가

노·장·신·한 열전에 등장하는 네 인물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그것은 '올바른 것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다. 노자는 진리를 깨달았지만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자 소를 타고 떠났다. 장자는 세상의 부귀를 거부하고 자유를 택했다. 신불해는 능력을 발휘했으나 후대에 그 이름이 흐릿하게 남았다. 한비는 가장 탁월한 사상을 가졌으면서도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은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이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의인(義人) 백이·숙제가 굶어 죽고, 탁월한 한비가 독살당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도는 과연 공정한가. 사마천 자신이 이릉(李陵)을 변호하는 올바른 발언을 했다가 궁형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은 체험이 이 질문 뒤에 무겁게 깔려 있다.

 

노·장·신·한 열전은 단순한 사상가들의 전기가 아니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았으나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파멸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록한 사마천 자신 역시 그 긴 비극의 행렬 속에 서 있었다. 사마천이 한비의 죽음을 서술하며 "세난 편을 지었음에도 결국 자신은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적을 때, 독자는 그 글 속에서 사마천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열전이 읽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를 세상에 관철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노자의 도덕경 5,000자도, 한비자의 10만 언도, 끝내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붓 끝에서 그들은 불멸이 됐다. 그것이 역사 기록의 힘이며,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붓을 꺾지 않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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