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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주

전통건축-10393. 경주 서악동 헌안왕릉, 문성왕릉, 진지왕릉, 진흥왕릉 - 신라 왕실 묘제와 위상을 함께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 (202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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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동의 헌안왕릉·문성왕릉·진지왕릉·진흥왕릉

 

경주 서악동의 헌안왕릉·문성왕릉·진지왕릉·진흥왕릉은 선도산 남쪽 구릉과 서악동 고분군 일대에 모여 있는 신라 왕릉들로, 신라 왕실 묘제와 서악 권역의 위상을 함께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네 왕릉은 재위 시기와 정치적 성격이 다르지만, 모두 경주 서악동 일대에 자리하면서 신라 왕릉 공간의 연속성을 형성합니다.heritage+4

- 서악동 왕릉의 의미

서악동은 경주 시내 서쪽의 선도산 자락에 해당하며, 신라 왕릉이 특정 공간에 집중되는 경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곳의 능들은 대체로 원형 봉토분의 형식을 띠고 있고, 외형은 화려하지 않지만 신라 왕실 묘역의 위계를 드러냅니다. 서악동 고분군 자체가 왕릉 후보군과 함께 왕실 관련 고분이 집적된 지역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개별 능뿐 아니라 묘역 전체의 역사적 맥락이 중요합니다.gb+3

- 비교 포인트

이 네 능을 함께 보면, 신라 왕릉은 단순히 “누가 묻혔는가”보다 “어떤 시기의 왕인가”를 보여줍니다. 진흥왕릉은 전성기 신라의 힘을, 진지왕릉은 전환기와 불안정을,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은 하대 신라의 약화된 왕권을 각각 드러냅니다. 또한 서악동이라는 공간 안에서 왕릉들이 서로 가까이 배치된 점은, 신라 왕실의 장례 공간이 경주 분지 서쪽 능선에 체계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gyeongju+5

- 답사할 때 볼 점

현장에서 보면 네 왕릉 모두 형태는 비슷해 보여도, 봉분 크기와 입지, 주변 구릉과의 관계에서 차이가 납니다. 특히 선도산 남사면과 능선의 흐름, 서악동 고분군의 위계, 각 왕의 재위 시기와 연결해 보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라 왕릉은 개별 능만 보는 것보다 주변 왕릉과 함께 묶어서 볼 때 역사성이 선명해집니다.encykorea.aks+3

 

 

 

 

 

 

 

 

 

 

 

 

 

경주 헌안왕릉

 

경주 헌안왕릉은 신라 제47대 헌안왕(재위 857~861년, 본명 김의정)의 무덤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번지 일대에 위치한 사적(사적 제179호)이다. 헌안왕은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형의 사후 권력투쟁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기간이 4년 정도에 불과해 특출난 치적은 적은 편이다. 다만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등 생활 안정과 백성 편의에 관심을 보인 군주로 기록되며, 이후 신라 중후기의 난세를 이어받은 왕 권력의 불안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로 평가된다. 이 왕릉은 바로 그 헌안왕의 장지를 물리적 공간으로 특정한 국가지정문화재로, 신라 중후기 왕릉의 양식과 지형배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다.

 

형태상 헌안왕릉은 선도산 남쪽 구릉 말단부의 능선상에 자리한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15m 전후, 높이 약 4m 내외의 비교적 소박한 규모를 가진다. 봉분 주변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둘레돌(호석)을 둘렀던 흔적이 있는데,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외부 장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신라 후기 왕릉에서 화려한 조형보다는 간결한 봉토분을 중심으로 한 장례관이 강화된 양상을 보여 주며, 진흥왕·문성왕릉 등과 마찬가지로 봉토 자체의 비례와 위치, 주변 고분군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읽히는 유형이다. 매장시설은 아직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서악동 일대 고분군의 일반적 사례와 형태를 고려할 때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능은 1969년에 ‘신라헌안왕릉’ 이름으로 사적 제179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자로 ‘경주 헌안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악동 일대는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등과 함께 통일신라 중후기 왕릉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헌안왕릉은 그 안에서 가장 단순한 원형봉토분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능선상에 배치된 다른 왕릉들과 함께, 선도산 자락의 풍수지리적 선정과 왕족 묘역의 집단적 배치를 읽어낼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적 단서 역할을 한다. 즉, 헌안왕릉은 규모나 외관상 화려하지 않지만, 신라 왕권의 쇠퇴기와 왕릉 양식의 절제된 추세, 그리고 서악동 고분군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지표적 유적이다.

 

 

 

 

 

 

 

 

 

 

경주 문성왕릉

신라 제46대 문성왕(재위 839년~857년, 향명 김경응)의 무덤으로, 지금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일대에 자리한 사적(사적 제518호)이다. 이 능은 선도산 남쪽 구릉 말단부의 능선에 위치해 있어, 진흥왕릉·진지왕릉과 함께 서악동 일대 왕릉군의 중심에 들어 있다. 문성왕은 신라 중기 이후 쇠퇴하던 국력을 회복하고 불교를 중심으로 한 국가 통치를 강화한 왕으로 평가되며, 이 능은 그의 역사적 지위를 물리적 공간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능의 형식은 지름 약 18.9m, 높이 약 4.5m의 원형 봉토분으로, 능선을 따라 만든 평탄한 대지 위에 둥근 봉분을 올린 전형적인 봉토분 왕릉 양식을 보인다. 봉분 밑둘레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둘레돌(호석)을 붙였던 흔적이 있지만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전체적으로는 외부 장식이 거의 없는 매우 소박한 외형을 지닌다. 이는 신라 후기 왕릉의 추상적·기능적 성향을 보여 주며, 조선후기 이후 안내석과 능표석이 추가된 점 이외에는 원래의 단순한 형태가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다.

이 능은 조선 후기 경주 김씨 일족이 1730년경 문성왕의 장지를 비정해 시작한 비정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삼국사기』에 “공작지”에 장례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김씨 일족이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문성왕릉으로 정하게 되었고, 이후 1969년에는 진지왕릉과 함께 ‘신라진지문성왕릉’으로 사적 제178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두 왕 사이에 278년의 시대차와 9대의 계보 차이가 있어 합장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2011년에 분리·재지정되어 지금의 사적 ‘경주 문성왕릉’이 되었다.

 

현재 문성왕릉은 선도산 남쪽 구릉 말단부에 형성된 서악동 고분군 5기 중 가장 동쪽에 있는 분으로, 그 주변에 다른 고분들과 함께 왕릉군의 집단적 배치를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신라 문성왕릉”이라 새긴 능표석만 서 있어, 외관상으로는 단순하지만, 신라 중후기 왕권과 장례문화, 지형·풍수·혈통 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축이 된다. 이처럼 서악동 일대는 진흥왕·진지왕·문성왕 등 여러 왕의릉이 함께 모여 있는 한국 고대 왕릉의 대표적 공간으로, 문성왕릉은 그 속에서 신라 중후기 군주와 귀족세력의 관계성을 읽어내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경주 진지왕릉

 

경주 진지왕릉은 신라 제25대 진지왕이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왕릉으로,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사적이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576년부터 579년까지 약 3년여 재위한 왕으로 『삼국사기』에서는 4년 만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국정을 문란하게 다스리고 폐위되어 서거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도 있어, 귀족세력 갈등 속에서 정치적 난관을 겪은 군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진골의 일원으로 왕위에 오른 후계자이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무열왕의 할아버지로, 신라 중기 왕권 계보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현재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진지왕릉은 선도산 남쪽 구릉을 따라 형성된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로, 2011년 고분군의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해 별도의 사적(사적 제517호)로 재지정되었다. 무덤은 지름 약 20m, 높이 약 5m 내외의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돌로 둘러 호석(호석렬)을 둔 흔적이 보이며, 봉분과 주변에는 잔디를 식재해 토사 유실을 막도록 정비되어 있다. 봉분은 비교적 소박한 편으로, 외부에 별다른 장식석이나 조형물은 없고, 둥근 형태의 봉토분만이 남아 있어 신라 왕릉의 초기·중기 양식을 잘 보여 주는 형식이다.

 

이 능은 원래 1969년 사적 신라진지문성왕릉(구 사적 제178호)으로 지정되었던 유적의 일부로, 진지왕과 후대 문성왕의 합장묘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두 왕 사이에 약 278년의 시간 격차가 있고, 왕족 대계상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있어, 고분군을 분리하여 2011년 이후 경주 진지왕릉·경주 문성왕릉으로 각각 재지정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악동 고분군 3(서악동 750번지 일대) 아래에서 두 번째로 위치한 높이 5.5m, 지름 20.6m의 원형 봉분을 진지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정립되었다. 이는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서 진지왕의 장지를 ‘영경사(애공사) 북쪽’으로 기록한 점과, 선도산 서악동 일대의 고분군 위치가 일치하는 데 기인한다.

조형적으로 보면, 진지왕릉은 봉분 자체가 중심인 전형적인 봉토분 왕릉 양식이며, 매장주체부는 인근 서악동 고분군과 유사한 횡혈식 석실묘(굴식돌방무덤)로 추정된다. 내부는 아직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확정된 구조는 없지만, 신라 왕·귀족의 석실묘 형식을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봉분 주변은 소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 속에 묻힌 왕릉의 정취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신라 진지왕릉’이라 새긴 능표석과 문화재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답사객들이 위치와 역사적 의미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결국 경주 진지왕릉은 규모와 장식 면에서는 화려하지 않지만, 진흥왕의 아들이자 무열왕의 조부인 진지왕의 사인지도를 담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지표다. 서악동 일대의 왕릉군과 함께 신라 왕권의 성장과 쇠퇴, 그리고 왕족 장례 양식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로 평가되며, 남산 선도산 자락의 불교·왕실·귀족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 공간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축이 된다.

 

 

 



 

 

 

경주 진흥왕릉

 

경주 진흥왕릉은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의 능으로,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대표적인 왕릉 유적이다. 1969년 사적 제177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국가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봉분은 지름 약 20m, 높이 약 5.8m의 단순한 원형 봉토분이며, 겉모습은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한 편이다.encykorea.aks.ac+2

이 무덤이 중요한 이유는 진흥왕이 신라의 전성기를 연 왕이기 때문이다. 진흥왕은 540년부터 576년까지 재위하면서 영토 확장과 국가 체제 정비를 이끌었고, 한강 유역 진출과 대가야 정복 등으로 신라의 기반을 크게 넓혔다. 또한 황룡사 창건과 순수비 건립 등으로 왕권과 불교 문화를 강화한 인물로 평가된다.heritage.go+1

진흥왕릉의 외형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봉분 바깥에는 자연석을 둘러 호석을 만들었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을 뿐, 별다른 석물이나 장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되며, 이런 형태는 신라 왕릉과 귀족 무덤에서 확인되는 전형적인 축조 방식이다.gyeongju.go+2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위치이다. 진흥왕릉은 선도산 서쪽 기슭의 서악동 일대에 있으며, 태종무열왕릉과도 가까운 곳에 있다. 이 주변에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 분묘들이 함께 분포해 있어, 서악동이 신라 왕실 무덤군의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보여 준다.blog.naver+2

 

진흥왕릉은 규모만 보면 위세가 강한 왕의 무덤치고는 다소 소박하지만, 바로 그 단정함 때문에 오히려 신라 왕릉의 초기 양식과 장묘 문화를 잘 보여 준다. 화려한 장식보다 봉토와 입지, 주변 왕릉군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읽히는 유적이며, 신라의 정치적 중심과 장례 문화를 함께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장소다.digital.khs.go+1

 

 

 

 

 

 

 

 

 

신라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돌방무덤)의 구조적 변화와 시대적특징

 

신라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돌방무덤)은 6세기 전후부터 등장해 통일신라 초기까지 지배층의 주요 무덤 양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시대를 따라 구조와 장례관이 뚜렷하게 변화한다. 일반적으로는 “지하에 묘광을 파고, 돌을 쌓아 석실(방)을 만들고 측면에 입구를 내어 봉토로 덮은 무덤”을 말하며, 이 방식은 고구려·백제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 도입된 뒤 독자적인 경향을 보인다.naver+2

구조적 변화 과정

초기 굴식돌방무덤은 단실(한 방) 구조가 중심이다. 지표면 아래에 직사각형 묘광을 파고, 네 벽을 돌을 쌓아 올려 한 개의 방을 만들고, 한쪽 벽에 출입구를 뚫어 시신과 부장품을 넣은 뒤 막아 봉분을 형성한다. 이 방식은 6세기 전후 통일 직전 신라 지배층에서 일반화되며, 진흥왕릉·무열왕릉·김유신묘·원성왕릉 등이 대표적 예에 속한다. 이 시기에는 방 안에 시신·관을 올리는 높은 석단(시상대)을 만들고, 바닥에 벽돌을 깔거나 동·서 양편에 별도의 널받침을 둘 때도 있다.nrich+1

이후 7세기 전후로는 출입구·방 구성의 세부적 변화가 나타난다. 출입구를 짧은 복도(이음길)로 길게 둘러, 본 방(널방)은 안쪽에 두는 형식이 보이며, 때로는 벽을 단순히 돌로 쌓은 것에서 벽돌로 벽을 보강하거나, 모서리를 더 정교하게 다듬는 방식이 등장한다. 특히 통일신라 이후에는 규모가 작아지는 한편, 방의 벽을 더 단단히 다듬고, 둘레돌(호석)에 십이지신상이나 단순 문양을 새긴 사례가 나타나기도 한다.koreastory5000.tistory+1

시대적 특징과 배경

신라의 굴식돌방무덤은 이전의 돌무지덧널무덤·목곽무덤에서 벗어나, 고구려·백제에서 이미 정착된 “굴식 돌방” 형식을 받아들인 결과로 이해된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6세기를 전후한 신라의 사회·종교적 전환이 큰 역할을 한다. 전통적인 계세사상(죽은 뒤에도 지상의 신분과 생활을 그대로 이어 간다는 관념)이 약해지고, 528년 불교 공인 이후 윤회사상이 확산되면서, 방대한 부장과 대규모 봉분을 강조하는 전통이 쇠퇴하고, 보다 간소한 구조의 굴식 돌방이 주류가 된 것이다.jangane.tistory+2

또한 6세기 이후 영토 확장과 전쟁이 빈발해 국가 재정과 인력이 무덤에 과도하게 투입되기 어려워졌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굳이 “무덤의 크기”로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신라 후기·통일신라기에는 소규모 굴식돌방무덤이 일반화되고, 왕·귀족의 봉분도 이전 시기의 대형 덧널무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굴식돌방무덤의 구조 변화는 단순한 건축적 진화가 아니라, 신라의 왕권 성격·불교 수용·내세관 변화와 맞물려 읽어야 하는 시대적 신호로 평가된다.jangane.tistory+1

 

 

 

 

 

 

 

돌무지덧널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의 구조적 차이점

 

돌무지덧널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은 신라 고분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구조적 특징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적석목곽분이라고도 하며, 신라 초기인 4세기 전부터 6세기 전반까지 주로 사용된 무덤 양식입니다. 이 무덤의 가장 기본 구조는 나무로 만든 관을 가장 안쪽에 두고, 그 주변에 부장품을 넣은 궤를 배치한 뒤 돌로 채워 고정합니다. 이후 이 전체를 감싸는 나무 덧널을 세우고, 덧널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둥근 봉분을 만듭니다. 봉분 주변에는 깬돌로 둘레돌을 두르기도 합니다. 나무 덧널이 썩으면서 무덤 윗부분이 내려앉는 특징이 있으며, 주로 경주 분지 일원에 분포합니다. 천마총, 황남대총, 서봉총, 금관총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이 무덤은 지상식, 반지하식, 지하식으로 구분되며 대개 지하식입니다.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닫힌 구조라 입구가 없어 도굴이 매우 어렵고, 부장품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굴식돌방무덤은 횡혈식석실분이라고도 하며, 6세기 중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전파된 무덤 양식입니다. 이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돌로 만든 널방을 조성하고, 널방 옆에 굴처럼 긴 널길을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널방은 천장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모줄임 천장 방식으로 지어지며, 관을 안치하고 문을 완전히 닫을 수 있어 부부 합장 등을 위해 추가 안치가 가능합니다. 널방과 널길의 벽에는 두터운 석회 칠을 하고 사신도나 생활풍속도 같은 벽화를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돌무지덧널무덤에는 벽화가 없습니다.

 

두 무덤의 가장 큰 차이는 입구 유무입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닫힌 구조라 입구가 없으나, 굴식돌방무덤은 널길과 문이 있어 사람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이 입구 때문에 굴식돌방무덤은 도굴이 매우 쉬워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돌무지덧널무덤은 귀중한 부장품이 온전하게 발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돌무지덧널무덤은 목곽이 썩으며 무덤 윗부분이 내려앉는 함몰 현상이 나타나지만, 굴식돌방무덤은 돌로 튼튼하게 지어 함몰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반영하며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유적입니다. 반면 굴식돌방무덤은 삼국 간 교류와 문화 수용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통일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의 왕릉까지 이어지는 한국 고분사의 주요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서악동 고분군의 대형 무덤들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으나 돌무지덧널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며, 서악동 일원의 작은 고분들은 모두 굴식돌방무덤입니다.

 

 

 

 

 

굴식돌방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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