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도 용장산성 (용장성)
진도 용장성은 고려 후기 삼별초가 몽골·고려 연합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거점 산성이자, 짧은 기간이나마 ‘또 하나의 조정’이 펼쳐졌던 장소입니다.
1. 위치와 역사적 배경
진도 용장성(珍島 龍藏城, 용장산성)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일대의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고려시대 산성입니다. 북쪽으로는 진도 북안의 관문인 벽파진(벽파항)을 끼고 있으며, 울돌목으로 이어지는 조운로의 길목을 감싸는 지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은 육상·해상 교통이 만나고, 서해·남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고려 후기에 대몽 항쟁을 수행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탁월한 입지였습니다.hh2953.tistory+2
용장성 축성 시기 자체는 정확히 확정되어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고려 고종 30년(1243) 전후 또는 원종 초(1260년 무렵)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삼별초 세력이 이곳을 본격적인 항몽 기지로 삼으면서 성곽과 궁궐 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개축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특히 이미 존재하던 사찰 ‘용장사’를 중심 시설로 활용하여 궁궐 기능을 부여하고, 그 외곽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잇는 방식으로 군사·정치의 중심 공간을 구성한 것이 특징입니다.blog.naver+3




2. 삼별초와 진도 입성, 항몽 활동
삼별초는 원래 고려 왕실을 호위하던 특수 군사 조직이었으나, 무신 정권 아래에서 독자적인 군사력이 되었다가, 이후 대몽 전쟁 과정에서 강화도에 설치된 최후의 방어 전력 중 하나로 기능했습니다. 1270년(원종 11) 고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하여 개경으로 환도하고, 강화도에서의 장기 항쟁을 사실상 종결하자,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킵니다.bosar.tistory+1
삼별초 세력은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새 왕으로 추대하여 독자 정권을 구성하고, 약 1,000여 척에 달하는 선박에 사람과 재물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 벽파진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진도에 도착한 뒤 용장성을 군사·정치의 중심 기지로 삼고, 용장사 일대를 궁궐로 개조하며 각종 관청 건물을 배치함으로써 사실상 ‘제2의 조정’을 꾸립니다. 이 시기 용장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왕을 옹립하고 관료 조직과 행정 체계를 운영하던 임시 수도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badaon.or+2
삼별초의 항몽 투쟁은 진도를 근거로 한 시기(1270~1271)에 절정을 이루지만, 몽골·고려 연합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됩니다. 원종 12년(1271) 5월, 고려 정부는 김방경 등을 파견해 몽골군과 연합군을 형성하고 진도 용장성을 공격하였고, 결국 용장성 방어선은 무너져 삼별초 주력은 패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세력은 지도자 김통정을 중심으로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이동해 항쟁을 이어갔으나, 제주에서도 1273년 정부군의 공격으로 패망하면서 삼별초 항몽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wikipedia+1
이처럼 진도 용장성 시기는 삼별초 항몽 운동의 한가운데이자, 강화도-진도-제주로 이어지는 ‘이동하는 저항 정권’의 핵심 고리로 평가됩니다.bosar.tistory+1



3. 용장성의 규모와 구조
현재 조사된 바에 따르면 진도 용장성의 성벽 총 연장 길이는 약 12.85~13km에 이르며, 성내 면적은 약 258만 평(대략 8.5㎢ 수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방대한 규모의 산성으로, 고려시대 산성 가운데서도 매우 큰 편에 속합니다. 이러한 규모는 단순한 피난 성곽이 아니라, 항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장기 거점이자 정치·행정 중심지를 수용할 만한 공간 구성이 의도 되었음을 보여줍니다.tripinfo.co+2
성벽 축조 방식도 지형과 용도에 따라 차이를 보입니다.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서는 내벽과 외벽을 따로 쌓고 그 사이를 흙과 자갈로 채우는 협축 방식이 사용되었고, 급경사지 구간에서는 바깥쪽만 돌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성토하는 방식으로 축성하였습니다. 이는 재료와 지형 조건을 고려한 합리적인 축성술로, 당시 고려 산성 축조 기술의 특징을 잘 반영합니다.[hh2953.tistory]


4. 궁궐·사찰 유적과 발굴 조사
용장성 내부에는 삼별초 정권의 궁궐 기능을 담당하였던 용장사 터와 행궁지, 그리고 각종 관청 건물 터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분포합니다. 2009~2010년 진행된 궁궐터 전면 조사 결과, 20여 동이 넘는 건물 터가 치밀하게 배치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건물 배치 방식과 공간 구성에서 개경 만월대 궁궐을 연상시키는 계획성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는 삼별초 정권이 단기간이라도 스스로를 ‘정통 왕조’로 표상하고자, 기존 고려 왕궁 체제를 모방한 도시·궁궐 계획을 구사했음을 의미합니다.tripinfo.co+1
용장사는 원래 고려 시대의 사찰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별초가 진도에 입성한 이후 사찰 건물을 개조하거나 확장하여 궁궐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과 지역 전승에 따르면 용장사의 창건 시기를 고려 태조 때 후진국 고왕 시기나 고려 고종 대 등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명확한 사료는 부족하여 추정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다만, 삼별초 이전부터 이미 종교적·지리적 중심성이 있었던 공간을 ‘궁성’의 핵심으로 활용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blog.naver+1
오늘날 성곽은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성벽의 원형을 온전히 보기 어렵지만, 성지의 일부 구간과 성내 용장사지·행궁지 등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용장성 홍보관과 고려항몽충혼탑, 그리고 삼별초 지도자 배중손을 모신 정충사 등이 조성되어 있어, 항몽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공간으로 함께 활용되고 있습니다.blog.naver+3



5. 문화재 지정과 역사적 의의
진도 용장성은 ‘사적 제126호’로 지정된 국가 사적이며, 분류상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곽에 속합니다. 면적은 47만㎡ 이상으로 지정되어 있고, 지정 이후 학술 조사와 정비 사업을 통해 산성의 구조와 삼별초 항몽 활동에 대한 이해가 크게 넓어졌습니다.heritage.go+1
역사적으로 용장성이 갖는 의미는 여러 층위에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 첫째, 대몽 항쟁의 최전선이자 삼별초 정권의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한 산성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한반도 중세사에서 흔치 않은 ‘반(反)조정’ 성격의 정치 권력이 공간적으로 구체화된 사례로서 중요합니다.encykorea.aks.ac+3
- 둘째, 고려 후기 해양 방어 체계와 조운로 통제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용장성은 울돌목으로 이어지는 조운 항로를 감제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해상 교통로와 군사적 요충지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이었습니다.hh2953.tistory+1
- 셋째, 산성 내부에서 확인된 궁궐·사찰·행궁 유적은 고려 후기 건축 및 궁궐 계획 연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특히 개경 만월대와의 구조적 유사성은, 삼별초 정권이 단순한 반란 세력이 아니라 왕조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려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encykorea.aks.ac+2
오늘날 진도 용장성 일대는 역사 교육과 문화 관광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삼별초에 깃든 항몽 정신과 지역 정체성을 함께 체험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곽 일부와 유적지는 산책로·전시 시설과 연결되어 있어, 현장을 직접 걸으며 고려 후기 격동기의 흔적을 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blog.naver+2



6. 결론
요약하면 진도 용장성은
- 고려 후기 삼별초가 승화후 왕온을 옹립하고 항몽 정권을 세웠던 ‘진도 정권’의 중심지이자,wikipedia+2
- 울돌목 조운로를 감제하는 전략적 산성,tripinfo.co+1
- 궁궐·사찰·행궁 유적을 통해 고려 궁궐 도시 계획과 항몽 운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대규모 군사·정치 유적입니다.bosar.tistory+2
실제 답사 시에는 용장성 성벽 일부 구간, 용장사지·행궁지, 홍보관과 충혼탑, 정충사 등을 연계해 보면 공간 구조와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badaon.or+2



용장성 홍보관
용장성 홍보관은 삼별초 항쟁과 용장성 유적을 소개하는 교육·전시 시설입니다.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길 92(용장리 106)에 위치하며, 용장성 입구에 있어 탐방의 첫 관문 역할을 합니다.live112.tistory+2
홍보관은 영상실과 전시실로 나뉘어 있으며, 3D 영상과 패널로 삼별초 탄생부터 진도 항쟁 과정을 재현합니다. 주요 전시 콘텐츠는 '13세기로의 여행', '삼별초 대몽항쟁 의의', '여몽연합군 공세 상상도', 용장성 조감도, 남도석성·온왕릉 유적 소개입니다. 발굴 유물 복제품(귀면와 기와 등)과 배중손·김통정 관련 기록이 전시되어 역사 이해를 돕습니다.blog.naver+3
홍보관 관람 후 성곽 산책로로 이어지며, 주변 정충사에서 배중손 장군을 기리는 체험이 가능합니다. 진도 역사 탐방의 출발점으로 추천되며, 영상 자료가 풍부해 학생·역사 애호가에게 적합합니다.visit.pluconnect+2


















삼별초 배중손을 모신 정충사
정충사(精忠祠)는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길 79-6에 위치하며, 용장성 입구 부근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배중손(裴仲孫, ?~1271)은 고려 원종 11년(1270) 삼별초가 진도에 입성한 후 주요 장군으로 활동하다 남도석성 전투 패배 후 굴포 해안에서 전사한 인물입니다. 사당은 그의 최후 장소 전승을 반영해 세워졌으며, 향사일은 6월 15일입니다.visit.pluconnect+4
원래 진도군 임회면 진도대로 4212(굴포리 백동리)에 있었으나, 1959년 태풍 '사라호' 피해 후 1998~1999년 재건축되어 전라남도 지방문화재(사당·동상)로 지정되었습니다. 2021년 2월 용장성으로 신축 이전하며 규모를 확대하고, 배중손 동상·항몽순의비·숭의문과 연계 배치했습니다. 이전 사당은 고산 윤선도 사당으로 재활용 중입니다.tripinfo+3
정면 3칸·측면 2칸 맞배지붕 사당으로, 뜰에 배씨대종회 기증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용장성 성곽·홍보관과 인접해 삼별초 항쟁 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배중손의 남도석성(사적 127호) 항쟁을 상징합니다. 무료 관람 가능하며, 주차장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choews1019.tistory+3



고려항몽충혼탑
고려항몽충혼탑은 삼별초의 용장성 항쟁을 기리는 현대적 추모 시설로, 진도군내면 용장성 입구에 위치합니다. 2010년 9억 5천만 원을 투입해 건립된 이 탑은 삼별초 용사들의 충혼을 영예롭게 기리며, 매년 5월 항몽 순의제를 통해 그 정신을 계승합니다.donga+2
탑은 용장성 왕궁지(행궁터) 입구 광장에 세워져 있으며, 높이 9.8m, 길이 20.5m, 너비 7.3m 규모입니다. 주변에 배중손 장군 동상, 정충사(2021년 이전), 항몽순의비, 숭의문이 배치되어 삼별초 유적과 자연스럽게 연계됩니다. 용장성 홍보관과 용장사 바로 인접해 있어 1시간 내 탐방이 가능합니다.loh4624.tistory+4
고려 원종 12년(1271) 용장성 전투에서 전사한 삼별초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진도군이 주도한 사업입니다. 740년간 잊힌 항몽 정신을 되살리고, 배중손·김통정 등 지도자들의 저항을 후세에 전하는 상징적 역할을 합니다. 광장 돌책자에 삼별초 활동 기록이 새겨져 교육적 기능도 갖췄습니다.leeesann.tistory+2






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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