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경주 독락당 獨樂堂
- 건축물은 사라져도 그 뜻은 영원하리라 -
신라 천 년의 고도 경주시내에서 포항 쪽으로 20km쯤 올라가면
드넓은 안강널을 만난다.
‘편안하고 건강함’을 기원하는 여망이 지명에 담긴
안강읍安康邑의 중앙을 관통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칠평천이 형산강과 합류하고
서쪽으로 반달모양의 산릉들이 둘러싸고 있는 비옥한 땅에 안강널이 펼쳐진다.
기름진 안강평야를 기반으로 6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양반 마을인 양동마을이 설창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고,
화개산과 자옥산이 만나는 수려한 계곡에는,
조선시대 동방오현 중의 한 분인 회재 이언적 선생을 모신 옥산서원과
회재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하였던 독락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양동마을의 <서백당>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대사상가 회재 선생의 이상과 좌절 그리고 초월과 꿈이,
고스란히 이 자옥산 계곡과 독락당 곳곳에 스며있다.
회재 선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서,
그의 학문은 퇴계 이황 선생에게로 이어져서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자가 된 분이다.
선생은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계로 진출하여 학자적 명성을 떨쳤으나,
41세가 되던 해에 외척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당하고 낙향하여,
양동마을의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안강 옥산리에 별서 사랑채인 독락당을 신축하고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련의 시기에 성리학을 넘어서
도교, 불교 등과 교류하고 학문과 인격 수양에 전념하여
독자적인 사상세계를 완성하였다.
약 7년간의 은거가 끝나고 중앙으로 복귀한 후는,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종1품 좌찬성에까지 이르렀고,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는, 노모가 계시는 양동마을에,
여주이씨 종갓집 무첨당과 향단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다 끝나지 않았던지,
57세 때 무고한 사건에 또 연루되어서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6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1553년에 63세를 일기로
유배지 타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고,
후학들에 의하여 독락당 입구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회재 선생의 성리설(性理說)은 누구에게 특별히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립한 독창적인 이론으로,
퇴계 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 성리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영웅은 시기하는 무리가 많은 법인지
불우한 시대를 살다 간 대학자 회재 선생은 그 암울했던 시절의 고뇌와 희망을,
별서건축이라는 그 만의 방식으로 자옥산 자락의 맑은 바람과 물이 흐르는 계곡에
독락당獨樂當을 지어 사산오대四山五臺 위에 펼쳐놓았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이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부친의 초옥 정자가 있었던 풍광이 수려한 자옥산 계곡에 건축된,
자연과 건축물의 일체화 내지는 자연에 순응하고 동화되는
뛰어난 친환경건축물이다.
하지만 쉬고 즐기는 별장형 건물과는 성격을 달리하며,
속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던
주거용 별서건축물로서,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이상형 정치가의 고뇌와 회환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꿈이
자옥산 계곡과 독락당 곳곳에 녹아있는 건축물이다.
그래서 독락당은 세상으로부터 담을 쌓기 위함인지,
모든 건물들은 기단을 낮추어 철저하게 몸을 숨기고,
폐쇄적이고 미로와 같은 은밀한 공간 구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담장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종가집'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는
어색한 솟을대문을 넘어서 집 안으로 들어서면,
무표정하고 길다란 행랑채와 용도를 가늠하기 쉽지 않는 담장과
작은 문들이 앞을 턱 가로막는다.
이 곳의 분위기는 전혀 집 안 같지가 않고 바깥 같은 느낌이 드는데,
기껏 대문을 통해 들어왔는데 건물에 가로막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랑채 방향도 인지가 어렵고
모든 건물들은 담 뒤에 모습을 숨기고 좀처럼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속세에 담을 쌓은 집, 은둔자의 거처라는 것이
독락당의 첫 인상으로 다가온다.
독락당은 크게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랑채 영역은 독락당 사랑채와 사당 그리고 별채인 계정으로 이루어지고
안채영역은 행랑채와 어서각으로 구성되고
그리고 대문 입구에 별채인 공수간(솔거노비의 거처)영역이
따로 있다.
각각의 공간은 담으로 구획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고,
그 입구를 쉽게 드러내 놓지 않는다.
그래서 바깥마당 오른쪽의 공수간 벽을 끼고 전면으로 곧장 나아가면,
정면의 벽은 막히고 좌우로 출입구가 있고,
계곡으로 열린 좁고 긴 담장이 있는 작은 진입공간인 중문을 만나게 된다.
좌측 문을 밀고 들어서면,
숨방채(청지기들의 거처 및 마굿간)와 안채가 마주보고 있는 기다란 샛마당이 나오고
안채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시 오른 쪽의 중문을 거쳐야 한다.
'ㅁ' 자형의 안채는 비교적 넓은 마당과 몸채, 바깥채, 날개채
그리고 독락당이 신축되기 전에 사랑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안사랑채인 역락재로 이루어져 있다.
안사랑대청 옆으로는 사랑채로 갈 수 있는는 문간과 도장방이 있다.
그리고 안채 뒤쪽 깊숙한 곳에는
인종 임금이 회재 선생에게 보낸 수필답서를 보관하기 위한
어서각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일명 옥산정사라고도 하는 독락당은
안채에 이어서 붙여지은 사랑채의 이름이다.
독락당獨樂當을 직역하면, '세상을 등지고 홀로 즐기는 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독락이란 자신 혼자만이 즐기겠다는 유아독존적이고
폐쇄적인 닫힌 마음의 독락이 아니라,
남과 같이 즐기려 해도 남들이 동의하지 않을 정도의 보잘 것 없는 집이라서
혼자서 즐거움을 누린다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아름다운 해석이 있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이 거처하던 곳으로 보물 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형태상의 특징은,
주택에서는 보기 힘든 초익공 형식의 공포구성과 솟을합장이 사용되었고,
사랑채 전면이 4칸으로서 홀수가 아닌 짝수 간살이를 채택하여
관습을 따르지 않는 파격을 기하였다.
지붕의 형태 또한 동쪽은 팔작지붕, 서쪽 안채 쪽은 맞배지붕으로 달리하여,
기존의 틀에 구태여 얽매이지 않는 천재적이고도 자유분방한
선생의 기질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랑채 공간의 구성방식에서도
선생 만의 생각이 묻어난다.
일반적으로 사대부들의 살림집이 안채는 폐쇄적이고 내밀하게,
사랑채는 개방적이고 호방한 성격을 띠게 되는데
독락당은 별당과 같은 고립적이고 은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반면에, 자연과 이상을 향해서 한없이 열린 마음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도,
독락당과 계정 곳곳에 스며있다.
독락당 동쪽 대청마루에 앉아서, 계곡의 흐르는 물과 물고기를 볼 수 있도록
외곽 담장에 구멍을 뚫고 살창을 끼워 넣었다.
시냇가의 푸른 물결은 담장을 넘어 와서 사랑채 곁을
스치듯 희롱하며 지나간다.
몸은 집 안에 있으되, 눈과 마음은 물결을 따라 한없이
자유롭게 흘러만 갔으리라!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회재 선생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약초를 키웠던 독락당 뒷마당을 지나면 계정마당으로 들어서는
작은 문이 나타난다.
미로 찾기와 같은 중첩된 공간들을 여럿 통과하여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계정마당은 무척이나 담담하고 수수한 감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뭔가 비밀스러운 공간과 아름다운 정자를 기대했던 예상은 빗나가고 만다.
계정溪亭은 독립된 정자 형태가 아니라 ㄱ자 형의 평면구성으로,
남쪽으로 향한 온돌방(양진암)과 계곡 쪽으로 향한 대청마루(溪亭)로 이루어지고,
몸채는 담장 밖으로 삐져나가 있어
계정마당에서는 단지 담장의 일부로서만 인식되어지고,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게 되어있다.
독락당의 하이라이트는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 있다.
집 밖으로 나가 계곡으로 내려서면,
관어대에 다리를 걸치고 우아하고 고졸한 자태로 서있는
독락당의 그 유명한 정자, 계정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집에서는 뒷모습만 살짝 보여 주었지만,
자연을 향해서는 속살까지도 감추려 하지 않는 당당한 자태로 다가온다.
“정자는 솔숲 사이 너럭바위 위에 있는데 고요하고 깨끗하며
그윽하고 빼어나 거의 티끌 세상에 있지 않은 듯하다.
정자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계곡을 바라보니 못물은 맑고 깊으며
소나무·대나무가 주위를 감쌌다.
관어대觀魚臺·영귀대詠歸臺 등은 편평하고 널찍하며
반듯반듯 층을 이루어 하늘의 조화로 이루어졌건만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집과 방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아 계곡과 산에 잘 어울린다.”
순수하고 진정한 선비로 평가받는 정시한 선생이
1688년 계정에 올라서 남긴 감상평이다.
주출입구가 있는 솟을대문으로부터,
먼지 자욱한 세상으로부터 꼭꼭 숨기고 감추어 온,
그의 삶과 정신을 자연을 향해서는 모두 다 열어 놓았다.
마치 물, 바람, 나무 그리고 바위가 이 독락당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듯이......
독락당 미로의 끝에서 만난 것은
자연과 회재 선생의 심오한 정신세계이다.
그 헤아리기 쉽지 않은 정신세계를 간파한 좋은 자료가 하나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속에 내려가서 이 집을 보면 맙소사
벽체의 일부만으로 보이던 계정이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이 집을 만든 이가 갖는 열린 시각의 출구가 되어
맑은 물과 함께 바깥으로 구비 구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홀로 즐기는 집이 독락당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모두가 자유로운 세계라는 말이 정확한 번역이었다.
모든 만물이 다 주체가 되어 공존하고 존재의 사유를 즐기는
그런 집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씨의 예리하고
탁월한 해석이다.
지난 2010년에 독락당에 큰 경사가 있었다.
독락당과 옥산서원 그리고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 정사(精舍 : 학문과 휴식의 공간), 서원 등의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지냈는데,
문화 선진국들이 먼저 우리에게 일깨워 준 셈이다.
전통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하는데,
상업화와 도시화로 부터 마을을 지켜내기가 어렵고,
관광지화로 인하여 마을 주민의 불편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맥락으로 안동 하회마을은 심사과정에서,
이미 지나친 상업화로 인하여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탈락 위기를 맞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독락당!
앞으로 우리의 보물을 우리 스스로 잘 지켜서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체계적이고도 과학적인 노력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과 이해를 한층 더
고양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래서 아끼고 즐기고 사랑하는 민족.
그것이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필수 조건이 될 것이다.
회재 선생의 나이 47세가 되던 해에,
7년 동안 독락당에서 은거하며 품었던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갔으나,
선생은 결코 다시 독락당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이 완성한 이상향을 떠나서 먼지바람 자욱한 현실세계로 나아간 것은,
결코 그 자신만의 영화를 위한 길이 아니었겠지만
천리타향 유배지에 그의 이상과 꿈을 묻어야만 했었다.
회재 선생이 유배지에서 돌아가신 뒤 수 십 년이 흘러서
노계 박인로 선생이 독락당을 방문하여 <독락당>이라는 가사를 썼다.
이 가사문학 <독락당>은 해마다 대학수능시험에 단골로 출제가 될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작품이고,
노계 선생은 조선 후기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가사시인이자
정철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로서,
독락당과 회재 선생의 자취를 둘러본 후 감격한 나머지
독락당과 회재 선생을 추모하고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 “...... 天高地候도 有時辰 하려니와 獨樂堂 淸風은 가업실까 하노라“
독락당(건축)의 형체는 세상의 변모에 따라 사라지겠지만,
회재(인간)가 부여한 독락당(건축)의 품격만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리라!
출처 - 16. 경주 독락당 - 건축물은 사라져도 그 뜻은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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