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흥덕왕릉
경주 안강읍의 흥덕왕릉은
신라 역대 왕릉 가운데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갖추어진
대표적인 왕릉 가운데 하나로서 사적 제30호인 왕릉 앞에는
이끼가 가득한 한쌍의 문인석과 무인석, 돌사자 등
몇가지 석물이 놓여있다
소나무숲을 거느리고 서있는 듯한 무인석은
곱슬머리에 눈이 깊숙하고 코가 우뚝한 서역인 모습으로
괘릉과 함께 당시 신라가 당나라뿐만 아니라 먼 서역과도
활발하게 문물교류를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이 입고 있는 옷의 조각도 생동감이 넘치고
각기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는 네마리의 돌사자는 힘이 넘친다
봉분의 밑둘레에 세운 호석에 돋을새김한 십이지신상의
조각솜씨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데,
원래 능을 따라 돌난간을 세웠으나 난간기둥은
이제는 많이 없어졌다
신라 42대 왕인 흥덕왕은 성은 김씨, 이름은 수종으로
826년 왕이 되어 836년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재위했다
그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이 죽었는데,
이를 안타까이 여긴 군신들이 재혼할 것을 청했으나,
"앵무새가 짝을 잃어도 슬퍼하는데,
어찌 사람이 곧 다시 아내를 맞겠느냐"면서 거절하고
아내를 잊지 못하고 평생 홀로 지냈다 하며
죽어서는 유언대로 이곳에 장화부인과 합장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온다
■나무로 읽는 역사이야기- 신라 흥덕왕릉과 '안강형' 소나무
우리나라의 왕릉은 생태의 보고다.
신라왕릉 대부분은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됐고
조선시대의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신라왕릉은 조선왕릉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지 않지만
자연생태 차원에서 아주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신라의 왕은 혁거세거서간에서 경순왕까지 56명이지만
현재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왕릉은 8기에 불과하고
주인을 추정한 왕릉까지 포함해도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위치한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능은
신라왕릉 중 주인을 알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신라왕릉은 대부분 현재 경주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지만
흥덕왕릉은 경주 중심지에서 27㎞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신라왕릉은 권력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문화재다.
그러나 현재 신라왕릉의 가치는 단순히 정치권력을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태문화’ 대상이어야 한다.
생태문화는 문화를 생태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문화를 생태학적으로 이해하면
흥덕왕릉을 다양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흥덕왕릉은
신라왕릉 중에서 자연생태의 가치가 아주 높은 문화재다.
흥덕왕릉 입구의 소나무숲은 우리나라 의소나무 모델 중 하나인
‘안강형(安康型)’의 현장이다.
안강형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소나무를
‘동북형’ ‘중남부고지형’ ‘중남부평지형’ ‘위봉형(威鳳型)’ ‘금강형(金剛型)’ 등 6개로
나눈 사람은 일본 산림학자 우에키 호미키 교수였다.
흥덕왕릉 앞의 안강형 소나무는
줄기가 곧게 자란 ‘금강형’ 소나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흥덕왕릉 앞의 소나무는 줄기가 굽어서 마치
뱀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다.
이곳의 소나무가 이렇게 굽은 것은
나무가 자라는 데 아주 좋지 않은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나뭇과의 늘푸른큰키나무소나무는
모두 같은 종이다.
그런데도 모습이 다른 것은 토양과 기후의 차이 때문이다.
안강형은 여름철 강우량이 적을 뿐 아니라 온도 격차가 심해
소나무가 살기에 아주 좋지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
아울러 안강형이 서식하는 지역은
신라 수도 경주 인근이라 소나무 수탈 때문에 산림생태계 파괴가
아주 심했다.
그러나 얄궂게도 흥덕왕릉 앞의 소나무숲은
경주 배리삼릉 주변의 소나무숲과 더불어
소나무 사진작가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다.
안강형 소나무의 모습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흥덕왕릉은 입구에 소나무숲이 빽빽해
한참 숲을 걸어 들어가 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재선충으로 죽은 소나무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재선충 때문에 죽은 소나무 그루터기의 나이테를 보면
나이를 알 수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흥덕왕릉의 안강형 소나무도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
이곳 소나무 중 왕릉 옆에 있는 것일수록 나이가 많다.
왕릉 덕분에 보호를 잘 받았기 때문이다.
흥덕왕릉에는 그가 즉위할 때 죽은 장화부인도 함께 묻혀 있다.
흥덕왕은 자신과 함께 왕후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부인을 잊지 못해
합장할 것을 유언했다.
12지신까지 갖춘 흥덕왕릉은 규모도 크지만
소나무 덕에 정말 아름답다.
- 강판권 계명대 교수
Copyright © 서울경제 송영규 기자
경주 흥덕왕릉
慶州 興德王陵
요약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능. 왕릉. 사적.
내용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6만 1,983㎡. 무덤의 지름은 20.8m, 높이는 6m이다.
흥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수종(秀宗)이라 하였다.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며,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826년에 왕이 되어 836년에 승하할 때까지 10년간 재위하였다.
승하 뒤 먼저 죽은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고 하는 기록에 따라
이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비교적 큰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를 따라 병풍처럼 다듬은 판석(板石)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을 마련하였고,
판석 사이사이에 탱석(撐石)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판석과 탱석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보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 밑둘레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띄워 방사형으로 깐돌[敷石]을 깔았고
주변을 따라 돌난간을 세웠으나 난간기둥은 많이 없어졌다.
난간기둥에는 위아래에 둥글게 구멍을 뚫어 기둥돌을 끼웠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전방의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각 1쌍씩 배치하였으며
무덤의 전방좌측에는 능에 관한 돌비[石碑]를 세웠던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고
비신(碑身)과 그 위에 얹어놓은 이수(螭首)는 없어졌다.
표식물의 양식 및 배치로 보아 신라 제33대 성덕왕릉과
제38대 원성왕릉을 많이 모방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경주지역문화유적보존개발계획』(경상북도·동국대학교신라문화연구소, 1986)
・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5)
・ 「신라십이지상의 분석과 해석」(강우방, 『불교미술』1, 197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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