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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2024.09.08.)

 



 

 

 

국보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East Three-story Stone Pagoda in Suljeong-ri, Changnyeong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수량/면적 1

지정(등록) 1962.12.20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장237 (술정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결구(結構) 수법과 각 부분의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안정적인 비율을 보이는 전형적인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이다.

 

1965년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유리잔 모양의 사리 용기, 유리로 만든 황색 사리병,

사리 7, 향편, 작은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석탑이 자리한 사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인근의 인양사비에 언급된 인양사(仁陽寺) 혹은 대곡사(大谷寺)로 추정되었으나

200810월부터 20097월까지 국립가양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송림사(松林寺)’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송림사의 옛터로 밝혀졌다.

 

이 석탑은 당시 수도인 경주 왕경에 세워진 석탑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안정감이 있어

왕경 내 장인을 직접 파견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무렵 경주를 벗어나 왕경 외곽 지역으로 석탑 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군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이 탑은 원래 노변에 있었고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기단의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년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보존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해서 수리하였다.

 

이때 3층 탑신상면(塔身上面)의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에서

청동향로형용기(靑銅香爐形容器), 황색(黃色)유리제(), 사리병(舍利甁), 사리(舍利) 7(),

향편(香片), 유리소주(小珠) 등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었다.

 

본탑(本塔)을 동탑이라 함은 한 사찰내에 쌍탑이 건립된 때문이 아니라

술정리에 2()의 석탑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3층석탑은 본탑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은 이중 4개의 면석과 4개의 갑석으로 조립되었고,

상하기단의 면석에는 모두 탱주 2주식이 각출되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이며 옥개석 받침은 각 층 5단이고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세부양식에서 신라석탑의 통식을 따르고

작풍에 있어 장중명쾌한 기풍이 있는 석탑이다.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각부의 수법도 신라 중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견되는 작품이다

출처 - 위키백과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621220일 지정)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장237 (술정리)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조 불탑.

 

개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창녕읍 도심에 위치한 탑으로,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모습이다.

석탑이 위치한 곳은 오랜 시간 도심화가 진행되어 다른 유구는 찾아 볼 수 없다.

기단부의 결구수법이나 탑신부의 구성은

경주 왕경에 건립된 석탑과 비교될 정도의 안정감과 정교한 조각 수법을 지니고 있어

왕경내 장인이 직접 파견되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변천

석탑이 위치한 사찰에 대하여 확실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인근 창녕읍 교동에 위치한 창녕 인양사 조성비(보물, 1963년 지정)에 기록된

인양사(仁陽寺) 혹은 대곡사(大谷寺)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절터는 2004년 탑 일대에 대한 시굴조사와

200810월부터 20096월까지 전면조사가 이루어졌다.

2008년 조사에서는 송림사(松林寺)’명 기와가 출토되어

해당 사찰의 원래 이름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가람배치에 있어서 탑과 금당의 배치가 남북 축선보다는

동서축선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석탑은 1965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청)에서 전면 해체수리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3층 탑신석 상면 방형사리공에서 동제잔형사리기와 황색유리사리병,

향편 및 소형 구슬 등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내용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이다.

현재 탑 지대석 외곽으로 1열로 구획한 석렬이 남아 있는데,

한쪽 모서리에 탑구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 있다.

따라서 원래 외곽에 판석으로 탑구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상하층 2중으로 되어 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한 돌로 하여 5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하대갑석도 5매로 구성되었는데 갑석 상면은 끝 부분 쪽으로 약한 경사가 있으며

갑석 중앙에는 호각형(弧角形)2단 괴임으로 상대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11매의 판석으로 엇물림하여 결구되었다.

상대갑석은 4매로 하단에는 1단의 부연을 두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괴임을 두어 초층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구성되었는데,

탑신부는 모두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고 표면의 문비 등의 장식은 생략되었다.

옥개석은 3층이 모두 처마 아래로 5단의 층급받침을 가지고 있으며

상면에 2단의 각형 괴임을 두어 위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모서리에서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각 옥개석 모서리에는 양쪽 전각부에 1개씩의 풍경공이 뚫려 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고 3층 옥개석 중앙에 원형의 찰주공이 남아 있다.

 

특징

석탑을 구성하는 부재는 기단부에 18, 탑신부 6매로,

상하층 기단 탱주숫자 2:2의 석탑과 거의 유사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8세기 경주지역 석탑들이 하층기단 면석을 구성할 때 자형 귀틀석을 쓰는 것과는 달리

판석만으로 결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단부 외곽에 나타나는 탑구의 흔적이라든가 탑의 외관상 보이는 비례는

전성기 신라석탑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의의와 평가

창녕 지역은 신라 진흥왕대에 정치 ·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져

일찍부터 신라 왕경의 문화가 전파된 곳이다.

특히 8세기에 이르러 왕실의 적극적 후원으로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는데,

술정리 동삼층석탑이 위치한 사찰 역시 그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이 석탑은 결구 수법과 각 부분의 조각 수법이 매우 치밀하고 정교할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체감률과 적당한 비율로 8세기 전성기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왕경중심의 석탑문화가 8세기 무렵 경주를 벗어나

왕경 외곽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석탑으로 평가되어

신라탑파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집필자

신용철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창녕군 (昌寧郡)

 

 

경상남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상남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창녕군은 동쪽으로는 밀양시, 서쪽으로는 합천군과 의령군, 남쪽으로는 함안군과 창원시, 북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청도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8°21′∼128°39, 북위 35°22′∼35°41에 위치한다. 면적은 537.87이고,

인구는 63817(2015년 기준)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12개 면, 285개 행정리(139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에 있다.

 

자연환경

지형은 북동쪽이 대체로 높고 남서쪽이 낮은 편이다. 동북부는 군립공원 화왕산을 중심으로 천왕산 · 관룡산 등 연봉이 솟아있는 산악지대이다. 서남부는 낙동강 연변의 구릉지와 평야지대로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의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경상남도의 서부 및 동부에서 말단부를 형성하는 중간지점에

산지부를 형성한다. 저산성 산릉이 북동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북동부의 군계에 비슬산맥(琵瑟山脈)이 남쪽으로 뻗어 수봉산(秀峰山, 593m) · 화왕산(火旺山, 757m) · 관룡산(觀龍山, 740m) · 영취산(靈鷲山, 737m) · 영축산(靈蹙山, 682m) 등이 있다.

 

서부에는 구룡산(九龍山, 208m) · 성지산(聖智山, 200m) · 고운봉(高雲峰,241m) 등 표고 200m 내외의 구릉이 북부와

동부의 산지와 계속 연결되고 있다.

 

하천으로는 낙동강이 군 서쪽의 북부에서 남으로 남류하다가 남지읍 부근에서 서부에서 동류해 온 남강과 합수하며,

유로를 동쪽으로 변경하여 군의 남부를 동류한다. 북동부의 산지에서 발원하는 토평천(土坪川) · 운봉천(雲峰川) · 계성천(桂城川) · 청도천(淸道川) 등이 계곡을 형성하면서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 연안에 평야부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군의 남서부 남지 일대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여 비옥한 충적평야가

비교적 넓게 형성되고 있다. 이 지역은 늪[]과 못[]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며 관개용 저수지를 포함하여 상당수가

분포되어 있다. 장척늪[丈尺湖 또는 長者湖] · 번개늪[電澤] · 우포(牛浦) 등이 있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습윤한 난대성기후대에 속하나 내륙의 산간지역은 대륙성 기후의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연평균기온은 13.1, 1월 평균기온은 -1.3, 8월 평균기온은 26.3, 연강수량은 약 1,2001,300이다.

 

중앙부의 일부 화강암지역을 제외하고는 중생대 경상계의 신라통 지층이 널리 분포한다. 식생은 온대남동부 삼림대에

속하며, 편백 · 리기다소나무 · 버지니아소나무 · 오동나무 · 호도나무 등이 있다.

 

역사

이 지방은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곡창지대로서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싹튼 곳으로,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각종

유물들이 군내 여러 곳에서 많이 발견된다. 따라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는데, 삼한시대의 불사국(不斯國)이 이 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비정되고 있다.

 

이것이 뒤에 비화가야(非火伽倻)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비화가야에 대한 문헌자료는 거의 없으나, 창녕읍 송현리 · 교리와 계성면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이 다른 가야지역에서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유물들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비화가야가 김해의 금관가야나 고령의 대가야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창녕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교통상의 요충이었으므로 555(진흥왕 16)에 신라가 비사벌을 병합하고 이곳에 하주(下州)를 설치하여 군사상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561년에는 왕이 이곳을 순수(巡狩)하고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를 세웠다. 그 뒤 565년에 하주가 합천으로 옮겨져

대야주(大耶州)가 되면서, 이곳은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火郡)이라 불리게 되었다.

 

757(경덕왕 16)에 화왕군(火王郡)으로 다시 개칭되었고 현효현(玄驍縣)이 영현(領縣)으로 되었으니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역이다. 또한, 같은 해에 지금의 영산면 지역이 본래 서화현(西火縣)에서 상약현(尙藥縣)으로 개칭되어

밀성군(密城郡: 지금의 밀양시)의 영현이 되었다.

 

940(태조 23)에 화왕군이 창녕군(昌寧郡)으로, 현효현이 현풍현(玄豊縣, 또는 玄風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상약현은 영산현(靈山縣)으로 고쳐져 밀성군의 속현으로 남았다.

 

1018(현종 9)에는 창녕군과 현풍현이 밀성군의 속현으로 되었고, 같은 해에 지금의 계성면 지역인 계성현(桂城縣)

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그 뒤 1172(명종 2)에 창녕군에, 1274(원종 15)에 영산현에 각각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1366(공민왕 15)에는 계성현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1390(공양왕 2) 다시 밀성군으로 이속되었다.

 

한편, 고려 말에 왜구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산현을 침구하니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며, 공민왕 때 정권을 잡고

개혁을 실시하려다 실패한 신돈(辛旽)은 바로 이 지역의 옥천사(玉泉寺: 지금의 창녕읍 옥천리 소재) 출신 승려였다.

 

1394(태조 3)에 계성현이 다시 영산현에 합쳐졌으며, 1414(태종 14)에는 창녕군이 창녕현으로 강등되면서 감무를

현감으로 고치는 규례에 따라 창녕현과 영산현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수는

창녕현이 8254,352, 영산현이 2571,134, 계성현이 214972명이었다.

 

1592(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가 이끄는 의병들이 남강과 낙동강의 왜군 수송로를 공격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 해 8월에는 의병장 성천희(成天禧)가 창녕을 탈환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이 지방의 의병들이

산성을 수축하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1631(인조 9)에 성지도(成至道)의 역모사건으로 창녕현이 폐현되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1637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영조 35)의 호구수는 창녕현이 6,19228163, 영산현이 4,26419848명이었다.

 

1895(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대구부에 속하여 창녕현과 영산현이 모두 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남도 창녕군 · 영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산군이 창녕군에 편입되었다.

 

19193·1운동 때에는 영산에서 구중회(具中會) 24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창녕군 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1956년 영산면민들이 남산에 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삼일민속문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1922년에는 일본 육군이 대합면 일대를 군용지로 징발하여 군사시설을 설치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은 낙동강 교두보의 마지막 저지선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한 달 동안 계속한 끝에 공산군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창녕과 영산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5571일에 창락면이 창녕면에 편입되었다.

 

196011일에는 창녕면이, 196311일에는 남지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1213일 남지읍에

고곡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부곡면에 유황온천이 개발되었고, 1977년에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76년 이래 소택지역(沼澤地域)인 창녕읍 · 유어면 · 대지면 · 대합면 · 성산면 등을 포함하는 창녕지구 농업종합 개발사업이 시행되어 광대한 수해 상습지역이 옥토가 됨으로써 창녕군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84년에 창녕읍 교리로

신군청사를 이전하였고 19989월 행정조직 개편으로 고곡출장소가 폐지되었다.

 

유물 · 유적

불교 유산으로는 창녕읍의 술정리 동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술정리 서 삼층석탑(보물, 1970년 지정), 송현리의

송현동 마애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교리의 인양사 조성비(보물, 1963년 지정)가 있다.

 

또한 옥천리의 관룡사 약사전(보물, 1963년 지정) · 관룡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 ·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보물, 1963년 지정) · 관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1970년 지정) ·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 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관룡사 사적기 ·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관룡사 부도 · 관룡사 석장승(경상남도 기념물, 1983년 지정) ·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관룡사 원음각가 있다.

 

그 밖에 말흘리의 석불사 석조보살입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직교리의 당간지주(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교상리의 퇴천리삼층석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72년 지정), 도천면 송진리 관음사 미륵불비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 관음사 석등(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 도천 삼층석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계성면 사리의 석조광배(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고암면 감리의 마애여래입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영산면 구계리의 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 영산 법화사 다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성산면 성산초등학교 내의 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창녕읍 교리의 창녕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술정리의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영산면 교리의 영산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대합면 대동리의 금헌묘 석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 · 금호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유어면 진창리의 경모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광산리에 광산서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등이 있다. 창녕읍 송현리 · 옥천리 · 하리, 영산면

성내리, 성산면 대견리, 계성면 사리에서는 석기 ·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장마면 유리의 창녕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를 비롯하여 영산면 죽사리 ·

신제리, 도천면 도천리, 계성면 사리 · 광계리, 부곡면 부곡리 · 청암리 등에 지석묘가 있다. 고분으로는 창녕읍의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사적, 2011년 지정), 계성면 계성리의 계성고분군(사적, 2019년 지정), 영산면의 동리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이방면 · 대합면 · 성산면 등지에도 크고 작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창녕읍의 고분군은 1918년에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마차 20대 분의 막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 청동제무기 · 장신구 등 출토품들은 경주지역에 비해 손색이 없는 유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