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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전 북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와 삼청전 (2024.08.07.)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

[ 金堤甑山法宗敎本部靈臺-三淸殿 ]

 

분야

종교/신종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434-2[모악로 260]

문화재 지정 일시

2005618, 20211119

출처

디지털김제문화대전-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증산교 성지.

 

건립경위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은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로 증산도 교주 강일순(姜一淳) 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형성된 성지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949년 증산도 교주 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삼청전을 지었으며, 19522층 목조 묘각인 영대를 건립하였다.

 

위치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서 금산사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금평저수지의 남쪽인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434-2번지

[모악로 260]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묘각인 영대는 2층의 목조 건물로 강일순 부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삼청전도 2층 목조 건물로 내부는 통층이며

증산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이외에도 교당 안에는 태평전, 숭도묘, 천하전, 경춘대, 대령전 등 웅장한 건물이 즐비하다.

 

현황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은 2005618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었고, 20211119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사단법인 증산법종교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구한말 동학농민운동 이후 사회적 안식처를 구하던 모악산 일대의 사회 종교운동 등 토착신앙 연구와 더불어 근대

민족종교의 흐름을 보여주는 유적지로서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7)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http://www.aks.ac.kr

[네이버 지식백과]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 [金堤甑山法宗敎本部靈臺-三淸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광구천하(匡救天下) 해원(解寃), 상생(相生), 보은(報恩)

증산법종교의 이념을 비석에 새겨 놓았다

 

 

 

증산법종교본부에는 영대를 중심으로 해서

14채의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경춘대(景春臺)

1954년에 건립되었으며 영대로 진입하는 문 역할을 한다

 

 

 

 

 

 

 

 

 

 

 

삼청전(三淸殿)

1949년에 건축하고 증산미륵불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화은당
(華恩堂)

1985년에 서별당을 개축하였고 증산법종교 창교주 화은당 강순임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강순임(姜舜任,1904~1960)은 증산 강일순의 무남독녀로 1937년 증산법종교를 창교하였으며

강일순 사후 40년에 오리알터에 증산법종교의 터전을 마무리하였다

 

 

 

 

 

 

 

영대(靈臺, 등록문화재 제185),

1952년에 건립된 영대는 증산상제(甑山上帝) 강일순 부부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묘각으로,

증산법종교 본부 내에서 가장 중심에 있으며 정면 중앙 2칸에 상층이 있어

건물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성신사(誠信祠),

1974년에 건립하여 선배 도현들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태평전(太平殿),

1954년에 짓고 단군성조(檀君聖祖) 체상과 역대 창업군주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구룡사(龜龍祠)와 호국사(護國祠),

1954년에 건립하였으며 수운(水雲)선생 체상(體像)과 충의호국열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만고종각(萬古鍾閣),

1982년에 만고종을 주조하고 본 종각을 건립하였다

 

 

 

 

수양산 천하전 

유불선의 선을 상징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인 우물정자로 건축되었으며 주역 팔괘에 의해 건물이 지어졌고

각 방에 3-4명씩 공부를하며 겁기를 벗는 곳으로 대학공부자리이다 

 

 

 

 

 

 

 

 

 

 

 

 

공간으로 읽는 근대문화 역사유산 > 삶을 보듬은 종교 시설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 -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

 

 

증산법종교는 대한제국 시기에 태동한 증산교 계통의 종교다. 증산법종교는 상생 해원 보은을 통해 후천세계를 열어가자는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다. 증산법종교는 증산교의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과 정 씨 부인 사이 소생인 딸 화은당 강순임에 의해 교단의 모습을 갖추었다. 증산교 역시 강일순 생전에는 종단을 갖추지 못했고, 둘째 부인 고판례가 일제강점기에 시작했다. 증산법종교 본부는 삼국시대부터 미륵사상이 성했던 모악산의 한 봉우리인 제비산 밑에 있다.

 

모악산 서쪽은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이고, 동쪽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이다. 해발 795m 모악산 정상에서 보면 호남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모습이 시야를 채운다. 모악산 서쪽에는 금산사, 동쪽에는 대원사가 자리 잡고 있다. 둘 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고찰이다. 금산사는 백제 무왕 때인 서기 600년경, 대원사는 신라 문무왕 시기인 서기 670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은 형상이라 하여 엄뫼라고 불리는 모악산은 백제가 멸망한 후 숨어든 백제 유민들을 품었다고 한다. 모악산 곳곳에는 어지러운 현실이 어서 지나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비는 중생들의 소망이 서려 있다.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眞表律師) 이래 미륵불을 기다리는 절이다. 미륵불은 속세의 중생을 구할 미래의 부처님인데, 미륵불이 여는 새로운 세계를 용화세계라 한다.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에는 거대한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현세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기다리는 꿈은 조선 중기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정여립은 반상의 차별이

없고, 남녀의 차별이 없는 대동세상을 희구했다. 정여립의 집터가 모악산의 한 봉우리인 제비산(帝妃山) 아래에 있다.

정여립의 꿈은 여지없이 깨졌으나, 동학에서 개항, 일제강점, 해방,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에 종교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증산교 계통의 수많은 종파가 모악산에 근거지를 두고 명멸했다.

 

증산교 계열의 종단은 사라진 것까지 합쳐 13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모악산 자락을 근거지로 삼았다. 한국전쟁 후 어수선한 시기에는 50개가 넘는 종단이 모악산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까지 남은 종단은 20개가 채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인 증산법종교의 본부가 정여립의 집 근처인 금산면 금산리에 있다.

 

 

증산법종교는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과 정 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화은당 강순임(華恩堂 姜舜任, 1904~1959)이 창시했다. 사실 강증산은 교단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을 종교로 정립한 최초의 인물은 두 번째 부인 고판례(高判禮, 1880~1935). 고판례는 강증산 사후 자신이 법통을 이어받았다며 선도교(仙道敎)를 세웠다. 선도교는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어 증산교가 되었다. 강증산의 제자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저마다 종단을 세워나가면서 증산교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강화은당은 6살 때 부친을 여의고, 떠돌다가 34세에 아버지로부터 불덩어리를 치마에 받는 신비체험을 하고 직접 종단을 창시했다. 강화은당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김제 금산으로 왔고, 1949년 현재의 터를 본부로 삼았다.

 

금산리 증산법종교가 들어선 자리는 오리알터’[烏卵基]라고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청학(청둥오리)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고 풀이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올[]터가 변해 오리알터가 되었다고 본다. 올터란 미륵불이 올 자리라는 뜻이다. 증산법종교 본부는 깨달음에 이르른 강증산이 열었던 동곡약방(광제국)과 멀지 않은 곳이다. 본부 앞에는 금평저수지가 있는데,

1961년 이전에는 논밭이었다. 강증산이 생전에 이 동리에서는 대청에 앉아서 낚시를 할 것이라 한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신도들은 믿는다.

 

강화은당은 1949년 터를 잡자 가장 먼저 부모의 석관을 모시는 곳을 조성했다. 강증산은 스스로를 광대, 무당, 천지농사꾼이라고 칭했지만, 증산교 계통의 종단은 강증산이 현세에 왔던 미륵불이라고 숭앙한다. 강증산 부부의 묘를 지키기 위해

세운 누각이 영대(靈臺). 영대는 한국전쟁 때문에 1952년 세워졌고, 이보다 앞서 미륵불상을 모신 삼청전(三淸殿) 1949년 건립되었다. 삼청전은 살창(창살을 짜 넣어 만든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미륵불의 얼굴을 비추어 전체 불상이 빛을 발하도록 지어졌다. 정교하게 설계되고 시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청전과 영대의 배치 형태는 기역자 형태를 이룬다.

 

강화은당은 교리와 교단 체제를 정비하고, 본부 내에 여러 전각을 더 세운 뒤인 1959년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선언한 뒤 숨을 거뒀다. 증산법종교의 가르침은 강증산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상극(相克)의 선천시대가 저물었으니, 서로 돕고(상생), 원한을 풀어내며(해원), 은혜를 갚아 나가(보은) 후천세계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천지공사(天地公事)라 한다. 마음을 속이지 말라, 척 짓지 말라, 반 그릇 밥의 은혜도 반드시 보답하라 등 강화온당이 가슴에 새겨 실천하라고 당부한 계율도 진솔하다.

 

증산법종교가 창시될 때 첫 이름은 증산향원이었다. 이후 선불교, 증산선불교, 동도법종교회 등 여러 명칭을 거쳐

증산법종교라는 현재의 종단 이름을 확정지었다. 증산법종교의 신도는 가장 성했을 때 10만 명이 넘었으나, 현재는 1,000명 정도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증산계 종단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보천교, 용화교처럼 교세를 떨치고 포교에

열성적인 교단이 있고, 개인적 신비체험에 중점을 두고 조용히 종단을 지켜가는 교단이 있다. 증산법종교는 강증산의

법통을 이어받은 종단이라고 자부하면서도, 후자의 태도를 지켜나가는 종단으로 분류된다.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와 삼청각은 2005년 등록문화재 제185호가 되었다. 교세를 떠나, 멀리는 동학에 뿌리를 둔 민족종교의 일파로서 신앙 자세를 견지해온 종단인데다, 금평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지어진 영대와 삼청각의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증산법종교 뒤 제비산을 포함해 모악산 자락 곳곳에서 발견되는 미륵사상과 증산계 종파의

새 세상은 현실이 어지러울 때마다 되짚어볼 가치를 지닌 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참고자료

 

정기간행물

- 백경언이경원, “증산계 신종교의 의례와 상징에 관한 연구.”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70(2016)

웹페이지

-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와 삼청전", 디지털김제문화대전

- 안병기, “(감성 여행) 새로운 세상 꿈꾸며 걸었던 그 길대나무만 푸르름 뽐내다”, 한국경제, 2011.01.28.

- 홍지연, “빨간 벽돌에 기와 얹은 성당, 구한말 신부 숨겨준 송광사”, 중앙일보, 2013.01.04.

-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증산의 종교는 그가 죽어서야 시작됐다”, 뉴스메이커, 2008.03.18.

기타

- 김재일, “여행- 세상을 바꾸는 미륵의 땅 김제 모악산의 문화유산”, 함께걸음, 1996 2 1

 

집필자양훈도

출처 -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 -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세월의 흔적, 근대문화 역사유산<지역N문화 테마 (ncultur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