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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전 북

김제 금산사 (2024.08.07.)

 

(출처 - 금산사 홈페이지)

 

 

 

 

 

 

김제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이후 많은 문화재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1(599)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에게 출가했다는 기록과

통일신라 초에 활동한 의적義寂(681-?) 스님이

당나라 현장스님에게 유학하고 돌아와

금산사에 머물며 257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들을 통해

당시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주석하며 시작되었다.

진표율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후삼국시대에 금산사는 다시금 역사서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산사에는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과 석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전하고 있다.

 

 

 

 

 

 

 

 

 

 

 

 

 

 


백제 
: 이 세상의 도솔천 모악산 금산사

 

중관 해안中觀海眼이 쓴 금산사사적(1635) 에는

 백제 법왕 1(599)에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발표하고, 

이듬해(600)에 금산()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으며, 

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이나

통일신라시대 활동한 의적스님이 금산사에 주석했다는 기록을 보면

금산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음은 확실하다.

 

 

통일신라 : 진표율사, 미륵신앙의 토대를 세우다

 

진표율사는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사실상 금산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진표전간眞表傳簡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 법상종의 중심도량이 되다

 

법상종法相宗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로, 

고려시대 11세기 초 목종과 현종 이후 왕실과 관련을 맺으면서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금산사 또한 중흥하였다.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1038-1096)이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금산사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혜덕왕사가 금산사에 주석하는 동안

남아 있는 법당을 모두 보수·중축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석조물인 방등계단, 석련대, 노주 등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의 사역이

대사구大寺區, 봉천원구奉天院區, 광교원구廣敎院區의 세 구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모두 혜덕왕사의 중창에서 비롯된다.

 

 

 

 

 

 

 

 

 

 

 

 


조선 
: 자비심으로 나라를 지켜내다

 

조선시대 금산사는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대사 유정과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인조 13(1635)에 이르러서야 금산사는 낙성을 보게 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금산사 가람은 이때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사찰 중건과 함께 당시 주지였던 지훈 스님과 간고 천택스님, 용면 응지스님 등이 주선하여

중관 해안스님으로 하여금 1635 11 금산사사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현재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는 금산사사적

재건 공사와 함께 자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금산사에는

호남불교의 중심 사찰이라는 위상에 걸맞는 스님들이 주석하였다. 

대표적인 스님으로 백곡 처능 선사, 남악 태우 대사, 

환성 지안대사 등을 들 수 있다.

 

 

근현대 : 일제하 금산사의 수난과 극복

 

1935 3월 큰 화재로 미륵전 본존불이 전소되었다. 

당시 공모전이라는 파격적인 방식(불모 일섭스님 등 당대 유명 작가 5인 응모)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동경대에서 수학하고 갓 돌아온 김복진씨가 당선되어 복원불사가 시행되었다. 

김복진은 서양조각을 공부한 근대 조각가이다. 

그는 새로운 재료인 석고를 이용하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미륵대불을 완성하였다.

 

1961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태공 월주 스님은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사를 이루었고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만들어지면서 17교구의 본사로서

조계종의 종헌과 종지종풍을 따르고 있다.

(이상 글출처 - 금산사 홈페이지)

 

 

 

 

 

 

 

 

 

 

 

 

 

 

 

금산사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남서부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사실 한국 국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절인데,

고려시대 초반인 후삼국시대 최후반에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장남 신검에 의해 강제로 감금되었던 비운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산사 코앞에는 후백제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는

석성의 허물어진 홍예문이 남아 있었는데, 2010년대에 복원하였다.

또한, 후백제 시기에는 이곳에 행궁이 들어서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서, 드라마 태조 왕건 당시, 견훤의 말년 금산사 감금 생활-탈출 촬영을

이 곳에서 실제로 찍었다.

 

2008년 금산사 일대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었다.

 

1.1. 역사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고 8세기 때 승려 진표가 중창했다.

불교를 너무나 사랑했던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가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군이 호남 지역에서 노략질을 했던 당시 사찰을 방화하여

 사찰 전체가 불에 타 없어지는 바람에 그 이전의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 발발 1년 전인 인조 13(1635)에 중건되었고

1934년과 해방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일부 법전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 가람

주요 건물로 대표 법당인 미륵전, 대장전, 명부전, 나한전 등이 있으며,

정문 역할을 하는 거대한 일주문이 있다.

 

다만, 다들 착각하는 것이 금산사의 근본중당은 미륵전이 아니다.

물론 미륵전이 경내에 가장 크게 지어진 법당이고 국보로 지정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하기는 하나,

사실 금산사는 근처의 귀신사(국신사,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소재)와 함께

대표적인 화엄종 계열의 사찰이다.

따라서 금산사의 근본중당은 미륵전도 아니요,

일반적인 사찰처럼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하는 대웅전, 대웅보전이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본존불 대신 안치한 적멸보궁도 아닌,

화엄경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삼는 대적광전이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설명할 때에

큰 고요함(大寂)과 지혜의 큰 빛()을 지닌 부처라 가르치는데,

이것은 비로자나불이 석가모니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등

모든 부처의 본체이자 진리의 몸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여기에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종 계열의 사찰들은 모두 근본중당으로 '대적광전'이 들어서 있고,

금산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1.2.1. 김제 금산사 미륵전 金堤 金山寺 彌勒殿

 

대한민국 국보 제62

지정연도

1962 12 20

제작시기

조선 인조 13(1636)

 

인조 13(1635)에 지어진 금산사 미륵전은

상당히 특이한 건물로, 한국 사찰 중에서는 유일한 3층 법당이다.

, 내부는 누각 구조가 아닌 통층이라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복원물이 아닌 한국 고건축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3층 구조이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단순히 3층 중층 건조물일 뿐만 아니라 목탑 구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목탑은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고건축이다.

 

미륵전의 구조도 특이한데,

조각난 나무들을 철물로 엮어 만든 희귀한 형식의 긴 기둥 4개가

1층부터 3층까지 건물 전체를 떠 받치고 있다

이는 사실상 목탑에 더 가까운 모습이고,

단지 목탑의 심주를 4개로 분산된 것과 비슷하다.

최근에는 구조에 문제가 생겨서 철 기둥으로 보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륵전의 미륵보살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삼존불 중 가운데 미륵불상 높이가 11.82 m,

좌측(법화림보살) 우측(대묘상보살)의 상은 8.8 m이다.

본래 미륵전에 있던 불상이 일제강점기에 화재로 소실되자 미륵보살상을 새로 만든 것인데,

이는 조각가 김복진의 작품으로 석고로 만들어졌다.

본 미륵보살상은 김복진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며,

그 가치를 인정 받아 2014 10 2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19호로 지정됐다.

여담으로 증산 계열 종교의 교조인 증산 강일순이 생전에 중요하게 여겨

여러 번 금산사 미륵불상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증산교의 교인들이

참배하러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증산계열 경전에서는 육장금불(六丈金佛) 등으로 부른다

 

 

 

 

 

 

 

 

 

 

 

 

 

 

 

 


1.3. 
보물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 말고도 10개나 되는 보물이 있다.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22호부터 제29호까지는 1963 1 21일 처음 보물 지정 당시에 일괄 지정

(일제강점기에 최초로 지정.)되었으며,

나머지 두 문화재는 1985 1 9일에 지정되었다.

 

보물 제22호 김제 금산사 노주 

보물 제23호 김제 금산사 석련대 

보물 제24호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보물 제25호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보물 제26호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보물 제27호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보물 제28호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9호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보물 제827호 김제 금산사 대장전(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

보물 제828호 김제 금산사 석등 

 

이외에도 대적광전이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었었으나,

1986년 원인미상의 화재로 인한 불이 나서 없어지는 바람에(...)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대적광전은 화재 이후인 1990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참고로 방화로 소실된 옛 금산사 대적광전에는 벽면에

국내에 보기드문 고려시대의 탱화가 그려져 잘 보존되어 있었고,

조선중기에 만든 중형 범종도 있었는데

법당 자체가 소실되는 바람에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 글출처 -  나무위키)

 

 

 

 

 

 

 

 

 

 

 

 

 

 

 

 

 

금산사 오층석탑과 방등계단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1971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 중창기 母嶽山 金山寺 五層石塔 重創記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중창기에는 금산사 오층석탑의 조성시기와 중건 상황 및 관련 인물 등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이는 공백으로 남아 있던 조선 전기 금산사의 역사를 메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동제사리합과 작은 합 2, 청동오층탑과 엽전 7,

그리고 불상 8구와 동자상 1구 등의 금산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조선 초기 사리장엄구의 구성과 특징을 잘 보여준다.

금산사 경내 가장 높은 곳인 송대松臺에 오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계단戒壇이 있다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석종石鐘형의 탑이 세워졌다.

 

계단戒壇이란, 를 수여하는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방등方等은 위·아래 사방으로 평등하다는 뜻으로 방등계단은 스님과 재가신자를 가리지 않고

대심大心을 가진 이는 누구나 수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계단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마다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석종형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석종 주변으로 연꽃무늬를 둘렀다.

석종의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방등계단은 조각 수법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중창하고 해마다 단을 열어 법시法施

널리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어

방등계단의 원형은 진표율사까지 올라간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jyj9997/222979890578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은 원래 봉천원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인 대적광전 앞 왼쪽으로 옮겼다.

우리나라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 데 비해,

육각다층석탑은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들었다. 기단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위로 새겼고,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맨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몸돌 각 귀퉁이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坐佛像)을 새겨 넣었다.

 

지붕돌은 낙수 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 있다.

밑면에는 받침을 두었는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를 새겼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남은 것이 없었으나,

훗날 화강암으로 만든 장식을 얹었다.

 

벼루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정도가 온화하고 섬세하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황금의 땅에 지어진 절, 금산사

문화유산 지질학

 

by전영식Jan 01. 2023

 

 

나중에 알고 보니 금산사는 행정구역상 김제지만 전주서 가는 게 편했다. 시내버스가 김제에서 보다 전주에서 자주 다닌다. 그만큼 전주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김제서 가는 길은 넓은 만경평야를 지나고 주산인 모악산(금산)으로 들어가니 속세의 마음을 바로 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금산사(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는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반도 미륵신앙의 시조로 불리는 진표율사(眞表律師, 생몰년미상)를 창건주로 보고 있으나 삼국유사에 그가 금산사에서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어 맞지 않는 듯하다. 진표율사에 의해 장륙상이 완성된 시기가 7646월이라는 기록이 있어 대략적인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금산사사적>에는 백제 법왕 즉위년 인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래된 절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시발점이요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견훤은 미륵전에 유폐되었다가 3개월 만에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주변이 산이기는 하지만 평지에 있는 절이어서 폐쇄적이지 않다. 정말로 가둬 두려면 이런 곳 말고 더 좋은 장소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진표율사가 미륵보살에게 교화받은 뒤, 금산사는 법상종에 속하게 되었고 고려 후기까지 법상종의 중요 사찰로 존속했다. 임진왜란 때 의승의 중심지가 되어 사찰이 불태워진 후 중창되어 1725년 영조 1, 화엄대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법석을 맡았던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 스님은 역모에 몰려 제주도에서 입적하게 된다. 억불숭유 정책 당시의 어두운 기억이다.

 

육각 다층석탑

 

금산사는 보물이 많다. 미륵전, 노주, 석련대, 혜덕왕사진진응탑비, 오층석탑, 금강계단, 육각 다층탑, 당간지주, 석등, 북강삼층석탑 그리고 대장전이 그것이다. 유물에 대한 글이 여러 곳에 많기 때문에 이번 글은 육각 다층석탑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층석탑은 흔치 않고 게다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은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탑은 대적광전 앞뜰에 있다. 노주와 석련대가 1열에 위치한다면 석탑은 2열 좌측에 미륵전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원래 봉천원 구역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인데 봉천원은 절의 동북쪽 지역 어딘가로 전해진다. 높이 2.45m의 점판암을 재료로 다면의 입체로 조성된 고려시대 이형탑이다. 고려 초에는 통일신라의 석탑형식을 변형한 6각 내지 8각의 석탑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탑 중의 하나이다. 원나라에서 활동하던 원명대사가 귀국한 1328년 후에 금산사를 중창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 해체보수 및 보존처리가 되었다.

 

화강암으로 된 3층 기단부에 점판암으로 된 2층의 탑신 받침이 있고 11층의 지붕돌로 되어 있다. 맨 위에는 화강암 보주가 있다. 11층과 10층에만 탑신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

 

기단부 받침돌은 6각형이 아래로부터 비례를 이루어 좁아지며 2,3층의 각면에 사자를 돋을새김으로 장식해 놓았다. 탑이 점판암이지만 전체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압력에 강한 화강암으로 만든 듯하다. 탑신받침은 2층의 연화대인데 복련과 앙련의 형식으로 보이고 중간에 지금은 소실된 면석이 있었음을 일재강점기 때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탑신은 단면 6각의 몸돌과 지붕돌(옥계석)로 구성되었는데,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맨 위의 2개 층만 몸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몸돌에는 각 면마다 귀기둥이 조각되었고, 면석의 가운데에는 광배 안에 선각한 좌불이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의 추녀 밑은 수평이고 윗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지만 끝부분이 살짝 들려져 있고 종을 달았던 구멍이 나 있다. 밑면에는 받침이 있으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중앙부가 넓게 가공되어 사리구의 봉안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 보주는 화강암 돌 하나로 만들어져 있는데, 후대에 보충된 것으로 보인다.

 

각 층의 체감 비례가 적절하여 조형미가 뛰어나다. 몸돌 및 지붕돌 각면에 선각된 부처상이 세밀하고 우아하다. 현재는 11층까지 남아 있지만, 원래는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처럼 13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시기는 몸돌 굄대의 연꽃무늬나 몸돌과 지붕돌 각 면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10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정확한 사료는 없다.

 

청석탑은 현재까지 남한에 18개가 존재하며 문헌사료에서 파악된 12개까지 포함하면 30개 정도만이 알려진 진귀한 석탑이다(김선, 2020). 완전한 형태의 탑은 하나도 없고 탑신석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탑신석이 남아 있다면 전체비례가 좋아 아주 경쾌하고 아름다운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석이라고 불리는 점판암은 화강암에 비해 내구성이 약해 풍화에는 취약하지만 장엄장식을 세기기에 매우 유리하다. 대리석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세밀한 새김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암석이다. 청석탑은 주불전에서 벗어난 구역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찰의 구성이 완료된 후 장식적으로 유력자에 보시에 의해 세워졌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겠다.

 

전미숙(2016)은 점판암을 퇴적암으로 표시하여 산지를 잘못 추정하고 있다. 점판암(slate)은 셰일이 압력에 의한 광역변성작용을 받아 형성되는 변성암이다. 셰일보다 치밀도가 크고 편리가 잘 발달하여 편리면을 따라 쪼개지는 특성이 있다. 이 탑의 지붕돌 끝의 침식단면을 보면 점판암임을 알 수 있다. 박덕원 외(2004)에서 흑색 셰일을 청석이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암석의 통칭을 표시한 것으로 정확한 암석명은 아니다.

 

남한에서 점판암은 옥천변성대내 보은, 옥천 등에서 주로 발견된다. 옥천변성대는 태백, 삼척에서 목포에 이르는 길이 400km, 50~60km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북동부의 비변성대와 남서부의 변성대로 나뉜다. 점판암은 오천분지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래서 주변에서 많이 나타난다. 청석탑은 각 부재의 크기가 비교적 작아 운반이 용이했을 것이고 산지에서 제작 후 완제품을 운반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청석탑의 파편에 대해 지화학적 광물학적 조사를 하면 그 산지에 대한 추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다각탑은 8층이 대부분이고 한강 이북에서 많이 발견된다. 때문에 한강에서 멀리 떨어진 호남에 6각의 탑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점판암 청석탑의 존재가 점판암의 산지에서 이처럼 떨어져 있는 점도 특이하며 몸돌이 일부나마 남아 있어 전체적인 형태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귀신사(歸信寺)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절이다. 전주 시내버스 79번을 타고 청도리 마을회관 앞에서 내리면 되는데 기사도 잘 모르는 절이다. 하지만 그 이름 때문에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사찰이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0(678)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국신사(國信寺)에서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말(1873)에 귀신사로 바뀌었다. 통일신라 때에는 화엄 10찰 중 하나로 금산사가 이 절의 말사였다고 한다.

 

지금은 허망하게 대적광전, 명부전과 요사채만 있으며 대적광전 뒤편 축대 위에 삼층석탑과 석수가 있다. 보물 제826호였던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이 주불이며 앞면 5칸 측면 3칸인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앞면과 뒷면의 다포형식이 다르고, 앞칸의 양쪽 두 칸이 상대적으로 좁다.

 

단청을 안 한 대적광전에는 삼존불이 있는데 비로자나불 주위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있다. 1980년에 개금 했고 보물 제1516호이다. 상당히 큰 17세기 소조불상이다. 대적광전 뒤로 돌아가면 계단 위에 꼭대기 부위가 손상된 고려시대 석탑이 있고 사자인지 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석수가 하나 있는데 외설스러운 물건을 등에 지고 있다. 그 용도 또한 오리무중이다.

 

1992년 당시 유명했던 소설가 양귀자는 귀신사를 소재로 단편 <숨은 꽃>을 썼고 그 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활동에 슬럼프가 온 주인공은 별 뜻 없이 김제로 향한다. 뜻밖의 사람과의 만남은 고흥 거금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대단한 학력이나 직업이 없는 자유로운 김종구와 황녀는 귀신사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야성적이고 흥겹게 살아가고 있다. 저녁 자리에 이어진 단소연주에 작가는 스스로 갇힌 세계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김종구의 입을 빌려 작가는 이야기한다. “사는 일이 가장 먼저란 말이오 사는 일에 비하면 나머지는 다 하찮고 하찮은 것이라 이 말입니다.”, “머리속에 생각이 많으면 행동이 굼뜨고, 그러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하는 겁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의 해체 등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커다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주인공은 이를 통해 미로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이후 양귀자는 이전까지의 사회성 짙은 소설에서 벗어나 페미니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판타지 연애소설 <천년의 사랑>을 쓰게 된다. 믿음이 돌아왔는지 그리고 숨은 꽃의 꽃말이 무엇인지는 작가에게 물어보았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황금의 땅 김제

 

금산사 근처에는 유독 금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금평(金坪), 금산(金山), 금구(金溝), 김제(金堤) 등이 그 예이다. 신라 때부터 사금이 많이 산출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모악산의 지질은 중생대 화강암인데 화강암이 결정화되면서 남은 열수유체가 주변에 많은 금광을 만들어 놓았다. 지질도를 보면 금평 저수지에서부터 전주 용복동까지 금광표시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금맥은 강물에 침식되어 흘러내려갔으며 평야의 범람원에는 사금을 뿌려 놓았다. 모악산은 김제평야에 솟은 큰 산이고 평야와 만나면서 강물의 속도가 늦춰졌을 것이다. 전형적인 퇴적광산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금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광산업자와 절의 충돌은 스님의 목숨을 가져갔다. 미륵전 오른편에 금산사 용명당 각민대사 가람수호기라는 비석이 서있다. 내용을 보니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는 수십 년간 금산사에 머물며 수많은 불사를 진행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0년 절 남쪽에 대규모 금광이 채굴되면서 절에 피해가 생겼다고 한다. 대사는 관아의 결정을 받아내어 채광금지령을 얻었으나 채광꾼의 침입으로 그들에게 순교당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김제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금광 붐이 일어났다. 1906~1912년 동안 매년 3~9개씩 총 37곳의 사금광이 허가되었다. 1934년에는 무려 36건의 사금광이 허가되었다. 아마도 아래 사진(홍성)의 사금채굴선 같은 것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국내 생산량의 30%를 차지했으니 주변의 금호황은 대단해서 아마 동네개도 금목걸이를 하고 다녔으리라. 1952년 김제의 금 생산량이 10.5kg이었는데, 1940년대 생산량의 2%에 불과하다는 기록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년간 500kg의 금이 나왔다는 추정이 되니 엄청난 양이었다.

 

김제에는 1980년대에 다시 한번 골드러시가 불어 닥쳤다. 1983년 황산면과 금산면 평야에 1백여 개 소의 광산이 개설되었고 1987년까지 매년 70여 개 정도의 금광이 생겼다. 원인은 갑자기 금이 발견되서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었다. 1980년 중동의 건설 붐이 수그러들면서 대량의 건설장비가 국내로 반입되었다. 이 장비를 이용하면 경제성 있게 채광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광산업자가 사업을 일으킨 것이다. 중장비를 이용하여 논의 겉흙을 들어내고 모래층에서 사금을 털어낸 뒤 다시 겉흙을 덮는 방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박이 난 사람도 있고 쪽박을 찬 사람도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채광량 감소와 금수입자유화로 골드러시는 끝났다. 지금 간혹 나오는 김제 사금이야기는 개인이 즐기면서 하는 낚시 같은 사금 캐기다.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 근처에는 이런저런 종교의 아우라가 충만하다. 계룡산 보다도 많은 신흥종교가 있다고 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어린 날을 보냈고, 증산교의 강증산이 세운 구릿골 약방도 근처다.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정여립이 대동계를 만들고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미륵불을 기다리지 못하는 민중의 조바심의 반영일까?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운명에 종속된다. 그러면 이 모두가 땅의 영향이 아닐까?

 

미륵이 오는 것은 언제인가? 이제 사람들은 절집보다는 근처에 화려한 베이커리 카페로 가서 시주가 아닌 커피값을 내고 주일을 보낸다. 절집 앞 주차장은 한산하고 카페에는 차 댈 곳이 없다.

 

출처 - https://brunch.co.kr/@8133d3a5098c4e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