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통건축 갤러리 ■/전 북

남원 몽심재 - 5 (2023.12.23.)

 

 

 

 

 

 

 

남원 몽심재夢心齋

 

 

  지리산 주능선의 서부지역에 자리 잡은 도농복합도시로서

동쪽으로는 철쭉동산으로 유명한 팔량치를 넘어서 경남과 소통하고

남쪽으로는 전남지역의 관문으로서 예로부터 예향으로

이름 높은 곳이 남원이다

 

 노고단에서 발원하는 달궁계곡과,

반야봉에서 발원하는 뱀사골계곡은 동으로 흘러 남강의 상류가 되었고,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남원을 살짝 돌아서 남동쪽 구례방향으로 휘감아나간다 

남원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구례 방면으로 달리다 범재터널을 통과하면

오른 쪽으로 갈라지는 60번 지방도로를 만난다.

이 분기점으로 내려서서 낮은 고개를 넘으면 저수지가 보이고,

곧이어 수지면사무소가 나타나는데 길 건너편이 수지면 호곡리, 일명 홈실마을이다.

 죽산 박씨의 씨족공동체 마을인 홈실마을의 탄생 배경에는

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 송암 박문수 선생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뜻을 같이하는 72명의 고려 중신들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이때 부인에게는 고향으로 내려가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대가 끊기지 않게 하라고 당부를 했다.

그래서 박문수 선생의 부인이 낙향하여 살게 된 곳이 바로 남원 홈실마을이고,

                   이후 번창하여 죽산 박씨의 집성촌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다 

 

 

 

 

 

 

 

 

 

 

 

 

 

죽산 박씨 종가집 소슬대문에는

삼강문三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삼강에 해당하는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임을 나타내는

자랑스러운 현판이다.

 

종가의 오른쪽 가장 깊고 높은 곳에는

중시조인 박문수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 자리 잡고 있고,

왼편으로는 종가에서 분가한 16대손 연당 박동식 선생이 지은 고택,

몽심재夢心齋가 있는데,

이 집의 당호堂號가 몽심재로 된 것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사연이 있다.

 

종가집 박문수 선생의 불천위 사당에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주련이 2개가 걸려있는데,

박문수 선생이 포은 정몽주 선생에게 보낸 시로서,

이름 높은 시인 도연명과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백이와 숙제를 노래하고 있다.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와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란 내용인데,

 

이 시의 첫줄 끝 자인 몽자와 둘째 줄 끝 자인 심자를 따서

몽심재夢心齋가 되었다

 

죽음으로 지킨 옛 주군에 대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충절이

몇 백 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이어졌고

마침내 후손들의 자긍심과 명예로 다시 되살아나서

바로 몽심재의 어원이 된 것이다.

 

 

 

 

 

 

 

 

 

 

 

 

 

 

 

 

 

 

 

 

 

 

 

 

 

 

 

 

 

 

 

 

 

수지면 홈실마을은

견두산犬頭山 자락의 수지천이 시작되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에 터를 잡았지만

녹녹치 않은 지형조건 속에서 마을이 형성되고 성장해왔다.

 

마을이 앉은 뒷산은 경사가 비교적 심하고,

계곡을 따라서 남향한 마을 앞으로 낮은 구릉이 가로막고 있어서

마을 앞이 막히는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슬기롭게 적응하며 살아왔다

 

수지면사무소 건너편에서 홈실마을 입구로 들어서서

조그마한 개울을 끼고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갑자기 길이 넓어지면서 긴 돌담 위로 단아하게 자리 잡은 몽심재와

그 옆으로 죽산 박씨 충현공파 종가집이 나란히 나타난다

 

몽심재는 아래위로 길고 좌우로 좁은 700여 평의 대지에,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지반의 경사가 비교적 심하고,

남향한 집 앞으로 드리워진 구릉이 조망권을 가로막고 있는 답답한 형국의 집터에 속한다

 

이런 불리한 조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몽심재는

아래위로 경사가 심한 언덕에 3단의 축대를 쌓아서

사랑마당, 안마당, 그리고 텃밭으로 3개의 마당으로 나누어서

그 고저차를 분담하여 흡수시켰다.

그런 연후에 ㅡ자형 대문간채, ㅡ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를

축선에 앉혀서 중심을 잡고,

좌우 가장자리에 행랑채, 별당 등의 부속채를 덧붙여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