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귀신사
한자 歸信寺
영어의미역 Guisinsa Temple
이칭/별칭 국신사,구신사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청도6길 40]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서홍식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소속 사찰.
[건립경위 및 변천]
귀신사(歸信寺)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제 법왕 때 왕실의 내원사로 처음 세워졌다는 주장도 있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국신사(國信寺)였다고 한다.
그 후 통일신라 말기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1090~1141]가 중창하였다.
원명국사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대각국사 의천에게 출가하여
1122년(예종 17)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구순사(狗脣寺) 혹은 구순사(口脣寺)로 불렸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1601년(선조 34) 승려 염화(拈化)·신허(信虛)가 부분 중수를,
1624~1633년 승려 덕기(德奇)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승당·정문·미륵보전·시왕전과 천왕문을 건축하였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을 지었다.
1657년(효종 8)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680년(숙종 6) 전각을 중수하였으며,
1707년(숙종 33) 승려 두감이 대웅전을 중수,
1715년(숙종 41)에는 팔상전을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대적광전을,
1873년(고종 10)과 1884년(고종 21)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934년에는 대적광전 등을 중수한 뒤
다시 귀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황]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대적광전, 영산전,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다.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시로 넘어가는 길옆
청도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해 있으나 본래는
화엄종 소속이었다고 한다.
[관련문화재]
보물 제826호 귀신사 대적광전(歸信寺大寂光殿)과
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귀신사 석탑(歸信寺石塔), 제63호 귀신사 부도(歸信寺浮屠),
제64호 귀신사 석수(歸信寺石獸) 등이 있다.
(출처 - 디지털김제문화대전)
백제 속의 신라사찰 – 귀신사
집필일
2002.08.07.
출처
통도사 잡지
분류
건축문화유산
1600여년에 걸쳐 전개된 한국불교의 역사가 복잡한 만큼, 우리 땅에 있는 수많은 가람들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연과 건축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3면을 정면으로 하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건물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3노전제로 운영되는 통도사의 복잡한 배치형식을 어느 절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통도사는 통도사일 뿐이듯이, 다른 절들도 역시 다양한 건축적 개성들을 가지고 있다.
100채의 사찰이 있으면 100개의 건축형식이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의 연기설에서 말하듯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고, 건축의 형식들이 다르다면,
그 다른 이유와 필연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전북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유명한 모악산 금산사에서 불과 4km도 안 떨어져 있는 곳에
귀신사 혹은 국신사라 부르는 작은 가람이 있다.
금산사의 유명세에 가려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신라시대 ‘화엄십찰’의 하나로 창건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화엄교학의 터전을 연 이후 그의 제자들은 전국에 퍼져서
수많은 화엄사찰들을 건립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10개의 사찰을 ‘화엄십찰’이라 이름이 붙여졌고,
화엄사 부석사 해인사 갑사 범어사 불국사 등 지금도 대단한 가람들이며,
현재는 거대한 절터만 남아있는 서산의 보원사가 포함되어 있다.
귀신사가 이러한 쟁쟁한 사찰들과 함께 화엄십찰의 하나였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화엄십찰이라 이름붙은 사찰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두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그 지리적 위치들이다.
통일신라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는 물론 경주를 중심으로한 일대 지역이었다.
공통적으로 화엄십찰에 속하는 사찰들은 중심지역을 벗어난 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부석사는 옛 고구려와의 경계지역에, 해인사와 화엄사는 옛 백제와의 경계에,
불국사와 범어사는 왜(일본)과의 경계지에, 그리고 갑사 보원사 귀신사 등은
아예 백제 고토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명칭은 화엄십찰이지만, 실제로 수용한 신앙은 화엄이 아닌 아미타신앙(부석사),
정토신앙(불국사), 미륵신앙(범어사) 등으로 범종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통일 전쟁까지 신라사회를 이끌었던 신앙은 원광법사나 자장율사로 대표되는 계율학이었다.
통조사의 개산조인 자장율사는 계율을 세움으로써 신라사회를 강력한 왕실국가로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계율의 실천을 위해 통도사 계단을 설치하고,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일사불란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황룡사 9층탑을 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자장이 주창한 계율사상은 분단시대 신라의 중요한 국가적 신앙적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세나라의 통일이 된 이후에 국가적 과제는 분열되었던 민족문화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통합적 사상이었고,
모든 불교를 포용하는 화엄학이야 말로 통합의 불교로서 신라의 국가적 신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엄불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분열의 갈등이 가장 심했던 옛 고구려나 백제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포교활동을 벌였고, 그 가운데 지역적 핵심 가람들이 후일 화엄십찰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 백제 왜와의 경계에 중심 사찰들을 세움으로써 신라 정부의 보위에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통합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복속되었지만,
여전히 옛 백제민들은 정서적 사상적으로 신라를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모악산 일대에는 미래불 신앙이 신라정부에 대한 비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다분했다.
귀신사는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세워지게 되었다.
지역적 반발이 심했던 만큼, 귀신사 창건은 신라 정부나 의상계 화엄종에서 직접 간여하게 된다.
재원도 경주에서 조달하고, 건축가들도 경주신라의 승려들이었을 것이다.
사상적 배경 뿐 아니라, 건축과 기술마저도 신라의 문화를 고스란히 백제 땅에 재현한 결과가 되었다.
과거에는 신라계와 백제계 건축에 차이가 있었으니, 신라계 건축은 하늘로 솟는듯한 수직적인 형상이요,
백제계 건축은 대지에 밀착되는 것 같은 수평적인 모습이었다.
아마도 두 지방의 지형적 차이에서 기인한 결과일 것이다.
현재의 귀신사 건물들은 임진란 이후의 것들이지만, 가람배치법이나 건물의 칸살잡이에는
신라적인 속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을 뒷산의 경사지에 자리잡아 두 단의 높은 석축을 쌓아 터를 닦았다.
아랫단에는 대적광전이, 윗단에는 이른바 백제계 석탑의 모습이 다분한 석탑이 세워져 있다.
아마 윗단에도 가람의 한 영역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입구에서 대적광전이 있는 주영역으로 진입하려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경사지를 단계적으로 이용하는 진입법과 대지조성법은 철저하게 신라적인 양상을 보인다.
금산사에 보았던 평지성과는 대조적인 수직성이 강한 방법이다.
대적광전 (보물 826호)은 크지 않은 규모지만 5×3칸의 칸살을 갖는다.
내부에도 두줄의 고주를 세워서 내부공간이 수직적이며 답답한 감을 준다.
기둥 간격은 매우 좁아서 한칸에 문 2짝을 겨우 달 수 있는 크기에 불과하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불전이라면 전면 3칸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이를
5칸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따라서 전체 건물은 좁고 높은 수직적 형상을 가진다.
마치 경북의 송림사 대웅전을 축소한 것 같은 모습으로, 건물만 놓고 본다면,
영낙없는 신라계 건물이다.
그러나 귀신사를 창건했던 정치적 목적은 실패하고 말았다.
신라에 대한 이 지역의 반감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는 화엄신앙에 대한 미륵신앙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얼마 후에 중창된 진표율사의 금산사에 이 지역 사상계의 주도권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귀신사의 건축적 전통은 계속 이어져서,
조선 후기에 중창된 대적광전에서도 수직적 구성의 신라계 흔적이 반영되었다.
이미 조성된 가람의 틀과 입지와 터에 맞추어야 했던, 어쩔 수 없이 따라야했던 결과일 것이다.
귀신사 가람의 배치법에서, 남겨진 건물의 구성원리에서 천년전의 치열했던 사회적 갈등을 읽을 수 있으니,
건축은 시대의 흔적을 간직하는 증표요 그릇임에 분명하다.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 (金堤 歸信寺 大寂光殿)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귀신사는 신라 때인 678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이다.
귀신사는 고려 말에 왜구 300여 명이 이곳에 주둔했을 만큼 규모가 커서
주변 일대에 전각과 암자가 즐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을 양성한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 경내에는 대적광전, 명부전, 요사채가 남아있고 최근에 영산전을 신축했다.
이 중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경 조선시대에
다시 건립되었다.
내용
대적광전은 판석으로 면석을 이루고 그 위에 갑석을 놓은 고식 기단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외벌대를 돌렸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했고 기둥은 민흘림의 원기둥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평면의 구성이 독특하다.
규모로 볼 때 정면 3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5칸으로 계획하여
주간에는 겨우 문 두 짝만을 달 수 있는 크기이다.
어칸에서 협칸, 퇴칸으로 갈수록 1자 남짓씩 점차 주간이 줄어들며
기둥과 창방으로 구획되는 면들이 세로가 긴 직사각형을 이루어
건물 전체가 수직적 형상을 갖는다.
더욱이 측면의 풍판이 측벽에 붙을 정도로 우주에서 도리의 뺄목이 충분히 뻗지 못해
건물이 더욱 높게 느껴진다.
측면의 주간은 어칸을 길게 하고 전후 퇴칸의 길이를 짧게하는
보통의 평면구성과는 달리 오히려 퇴칸을 어칸보다 3자 이상 길게 하였다.
내부의 기둥열도 측면 평주열과 관계없이
앞뒤에 4개씩, 8개의 고주를 두 줄로 배치하여 마치 내진과 외진이 구별되는
중층 건물과 같이 평면을 구성했다.
『귀신사중수기』에는 법당이 2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중수하면서 중층에서 단층으로 건물이 개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도 측면 평주와 내진주의 배열로 볼 때 팔작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전면에 모두 빗살문을 달았는데
어칸을 제외하면 협칸과 퇴칸은 문 밑에 머름대를 설치하여
창으로 계획하였다.
측면은 양측 모두 전퇴칸에 외짝문을 시설하였고
배면은 어칸에만 두 짝 빗살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 구조이다.
맞배집이기 때문에 전 · 후면에만 공포를 배치하였다.
전면은 주간마다 1조씩의 간포를 배치했으나 배면에서는 퇴칸의 간포를 생략하였다.
내외 2출목 구조로 공포를 짜서 처마를 받치고 있는데
전면은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다.
공포는 전후면의 세부적 수법이 차이가 있다.
전면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살미 끝이 서로 이어지듯 뾰족한 앙서형의 모습이며,
살미 위의 연봉 조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에 배면은 살미 끝을 둥글게 운공형으로 초새김하였고,
특히 주상포의 초제공 살미 모습은 전면보다 후면이
고식의 수법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창된 건물을 중수하면서
뒤쪽에 옛 부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1873년(고종 10)에 춘봉스님이 중수하였다.
현재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모두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다.
김제 귀신사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일괄
(金堤 歸信寺 冥府殿 塑造地藏菩薩坐像과 十王像 一括)은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귀신사 명부전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과 불화이다.
2017년 3월 31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사유
귀신사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등은
영산전 불상발원문에 의해 조성연대도 알 수 있으며,
지장삼존상과 시왕상을 비롯하여 명부권속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후기 명부전의 존상배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아울러 본존인 지장보살이
흔치않은 두건지장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출처 - 위키백과)
귀신사 석탑 (歸信寺 石搭)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귀신사에 있는 고려시대 3층 석조 불탑.
내용
높이 5.5m. 1974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지대석 위에 단층기단을 쌓고 그 위에 4장의 돌로 이루어진 갑석을 얹은 다음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몇 개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1층탑신은 네 귀퉁이에 네모난 돌기둥을 별개의 석재로 세우고
그 사이에 판석을 4면에 끼웠고,
그 위에 판석 1면을 얹어 옥개석을 받치게 하여
8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2층과 3층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각의 옥개석 아래에는 굄돌 1매씩이 끼워져 있다.
탑신은 옥개석의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낮아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옥개석은 판석형으로 낙수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고
추녀 끝은 약간 반전된 듯하나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1층은 8개, 2층은 4개, 3층은 1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2층 이상도 거의 같은 수법으로 탑신과 옥개석을 구성하였는데
전체적인 체감비율은 1층탑신의 체감률에 비해 2층탑신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을 비롯한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석탑 계통을 따른
백제시대의 석탑양식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상륜부는 결실되어 현재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몇 차례에 걸쳐 도굴되거나 붕괴되어 보수되었는데
2층 탑신석 굄대와 옥개석이 바뀌어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석탑은 676년(문무왕 16) 귀신사 건립 당시의 석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옥개석이 탑신에 비하여 지나치게 넓고 여러 개의 별석(別石)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옥개석의 상하단에 굄대를 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후백제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던 백제 석탑양식을 반영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귀신사 석탑은 여느 석탑이 법당 앞에 있는 것과는 달리 뒤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고,
그 앞에 남근석(男根石)을 등에 업은 석수(石獸)가 배치된 것으로 보아
민속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귀신사 석수 (歸信寺 石獸)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고려시대 귀신사의 삼층석탑 관련 돌상.
석사자상.
내용
김제 귀신사의 삼층석탑 앞에 놓인 석사자상으로
등 위에는 대나무 마디 모양이 조각된 돌기둥이 있다.
불교 조각사에서 석조 동물, 특히 사자상의 전통은
일찍이 분황사 모전석탑 주변의 석사자나 불국사 다보탑에 봉안된 석사자,
혹은 법주사 쌍사자석등이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어
주로 탑이나 석등과 연관된 조형물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귀신사 석사자 역시 석탑 앞에 봉안되어 있는데
그 앞에 있던 석등을 받치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비록 대나무형 돌기둥 위의 구조물은 사라졌지만,
사자상 자체의 조각기법은 매우 뛰어나다.
특히 완전히 배를 땅에 대고 앉아있는 모습은
실제 사자가 편하게 쉬고 있는 모습과 유사한데,
이러한 사실적 표현은 다른 유물에서는 볼 수 없다.
발톱과 다리 근육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입을 약간 벌리고 앞을 주시하는 모습은 마치 충직한 동물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해학적이면서도 친근감이 든다.
마모가 심해 세부 묘사 파악에 제한이 있지만,
그 규모나 조각기법상 상당한 공력이 들어간 귀신사의 중요
석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는 귀신사 석사자상은
사자상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성을 갖는 작품이다.
이 사자상처럼 땅에 배를 대고 누워있는 형태의 유물로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고달사지 쌍사자석등과
조선 초기 유물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 앞의 사자석등을 들 수 있는데,
귀신사 사자상에 비해 형태가 추상적이고 해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자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점차 해태나 해치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이상 글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제 귀신사 영산전 소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 일괄
(金堤 歸信寺 靈山殿 塑造釋迦三尊像과 羅漢像 一括)
김제 귀신사 영산전 소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 일괄은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귀신사 영산전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이다.
2017년 3월 31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17세기의 대표적 조각승인 인균의 작품이며
작품의 상태 또한 양호할 뿐 아니라 사중에 전해오는 조성발원문에 언급된
25구의 불상이 한 구도 유실되지 않고 잘 남아있어
17세기 불상조각의 귀중한 작례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위키백과)
김제 청도리 귀신사
자강불식 2019. 12. 30. 01:35
누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숨이 가쁘게 헤쳐가다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 가 있을 것이다. 그런 때 불현듯 가고 싶고,
가서 보면 머물고 싶고, 그리고 머물다 보면 몇 해쯤 살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모악산 자락의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의 귀신사와 그 일대가 바로 그런 곳이다.
내가 귀신사를 처음 갔던 때가 아마도 전주에 정착한 다음해였으니,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지 않았는가 싶다.
가을이었고, 바람이 몹시 불던 저물녘이었을 것이다. 금산사를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문득 ‘귀신사(歸信寺)’ 라는
나무 간판이 눈에 띄었고, 무언가에 홀린 듯 무작정 내려 찾아가 한 눈에 반해 시도 때도 없이 가게 된 곳이 바로
귀신사였다.
귀신사 바로 아랫집을 우리 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할 뻔 했던 적이 있다. 외지고 한적한 곳에 있는 집을 사서 살고자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80년대 후반쯤이었다. 청도리에 집이 났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집이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아쉽게도 그 집이 며칠 전에 팔렸다는 것이었다. 아쉬워서 팔린 가격을 물었더니 600만 원이었다고
한다. ‘놓친 고기가 크다’는 말도 있지만 이미 늦은걸 어떻게 하겠는가?
불과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신라 때부터 명찰인 귀신사를 정원으로 두고서 산책을 하면서 신 새벽에 일어나 새벽예불에 동참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금세 마음을 바꿨다. 매일 새벽마다 그 새벽 종소리가 곤한 잠을 깨우게 한다면 매우
불편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귀신사 아래에 집을 장만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귀신사를 가고 올 때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때 그 순간이나 지금이나 매일반이다.
전주일대 관할 화엄십찰 중 하나
귀신사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 중에 한 곳이 전주에서 금산사로 가는 길이다.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삼천(三川)이라고 부르는 세내다리를 건넌다. 용산리-황소리-독배마을을 거쳐 청도재를 넘어 유각 마을을 지나서 좀 더
내려가면 청도리에 닿는다.
청도리는 본래 전주군 우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정리, 동곡리와 금구군 수류면의 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도리라고 한 뒤 다시 전주군에 편입 되었다가 1935년에 김제군 금산면에 편입 되었다.
청도리 마을회관 광장에 차를 세우고 귀신사로 들어가는 길은 무성한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길은 마치 어린 날에
외갓집 가는 길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은 개울을 건너면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담쟁이 넝쿨이 수북히 덮은 나무 창틀 사이로 조선소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면서 낯선 손님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소가 사라져 버린 외양간에는 담쟁이 넝쿨만 무성하고 돌계단을 올라가면 귀신사에 닿는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하여 회유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서 전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다. 의상의 명으로 세워진 화엄십찰은 소백산의 부석사와 중악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의 갑사, 삭주의 화산사,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상대사 혼자의 힘이라기 보다는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옛날 여덟 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금산사까지 말사로 거느렸다는, 귀신사의 위용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사기에 따르면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이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 고종 10년에 고쳐 지으며
귀신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절 이름을 발음이 ‘귀신’과 같다고 하여 국신사로 바꾸었다가 근래 다시 귀신사로
되돌아왔다. 고려 말에는 이 지역에 쳐들어왔던 왜구 300여명이 주둔했을 만큼 사세가 컸으나 지금은 대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 등의 건물, 대적광전(보물 826호)과 이 근래 들어 새로 지은 몇 채의 건물이 있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집으로 양옆에 풍판을 달은 귀신사 대적광전은 양쪽 처마는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홑처마로 된 것이 특징이다. 대적광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그 뒤에 복구했는데, 법당 안에는 삼신불 즉,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모두 소조불로 1980년대에 금물을 입혔는데 건물에 비해 불상이 너무 커 앉아서 바라보기가 거북스럽다. 완주 송광사에도 이와 같이 큰 불상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이 주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적광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귀산사의 또 하나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돌계단이 있고 그 옆에 야생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돌계단 오르며 또 다른 자연의 맛
듬성듬성한 돌계단을 올라가면 오랜 세월 동안 이 귀신사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 와 팽나무 사이에 돌계단이 있다.
금실좋은 부부나 의좋은 남매 같기도 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어느 땐 나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살게 된지가 한 이백년쯤 되었을까? 세월이라는 것이 하룻밤 꿈같기도 하고 허깨비 같기도 하다고 오가는 사람들이
말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랬을 것이다. 그 나무들이 침묵한 채로 지켜보는 세월 속에 귀신사 일대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다 녹아들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가장 편안한 곳, 내 마음의 자유, 내 마음의 평화가 있는 내 마음의 명당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돌계단에 앉아
언제나처럼 나는 귀신사 일대를 내려다본다.
몇 그루 자라난 차나무의 잎들은 아직도 짙푸르고 대적광전 지붕 너머로 백운동 마을은 평화롭다. 문득 한줄기 바람이
뺨을 스치듯 지나가고 그 바람결에〈파우스트〉속에서 린쎄우스의 말 한 구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내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다. 이 절은 모두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제 멋대로 내 던져진 듯 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질서정연하다. 나는 이 자리를 좋아해서 이 자리에 잠들고 싶다.
유령은 우주가 좁다고 여겼다. 항상 작은 수레를 타고 술 한 병을 몸에 지니고는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르게 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죽거든 그 자리에 묻어라”
허균의 한정록에 나오는 글이다. 이 나라 산천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 나라가 묘지 공화국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죽게 되면 산에다 묻고 그 위에 나무 한그루를 심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화장해서 바다나 강에 뿌려달라고 했다는데, 나는 오래 전에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게 되면 화장을 해서 세 곳에 나누어 뿌려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과,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뒤편, 그리고
귀신사 대적광전 뒤편에 뿌리고 제사는 지내지 말아라. 혹시 그곳에 갈 때만 나를 생각해라.”
내 얘기를 듣고 큰 애가 말했다. “아버지 납골당에라도 모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말했다.
“내가 평생을 길 위에서 떠돌았는데, 나를 납골함에 가두어 두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
“나를 자유롭게 해줘라. 죽어서도 영혼이 있다면 이 나라 산천을 떠돌고 싶으니” 이렇게 말했지만 사후의 일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 어찌될지 그 또한 나의 일이 아니다.
“온 우주를 집이라 여기고 어느 날 죽거든 그곳에 묻어라” 라는 유령의 말이나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고 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이라고 여겼던 용재 성현(成俔)의 말이 새삼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을 제시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뒤편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계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62호)은 그 높이가 4.5m이다. 바로 그 옆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석수는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곳의 지형이 구순혈(狗脣穴)
이므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알려져 온다. 그리고 청도리 입구 논 가운데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63호)가 있다.
고요한 쉼…한 번 찾은 이 잊지 못해
귀신사는 나처럼 조용함과 그윽함에 빠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절이지만, 한 번 찾은 이는 그 은근한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게 되는 절이다. 절 입구에는 당시 조병갑과 함께 악행으로 쌍벽을 이루었던 균전어사 김창석의 비가 세워져 있다. 왜 그의 비석이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를 알 길은 없다. 어쩌면 그가 이절에 사주를 많이 해서 세워진 것은 아닐까?
이 절에서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마력을 지닌 것은 삼층석탑이 서있는 그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의 마을 풍경일 것이다. 고즈넉한 혹은 그림처럼 보이는 백운동 마을에 증산 강일순의 제자였던 안내성이 세운 증산대도회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더러는 세상을 하직하였거나 더러는 떠나가서 스무 채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언젠가 올 그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 뿐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숨은 꽃〉의 작가인 양귀자의 표현대로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는
귀신사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다가 보면 이곳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 실려 올 것 같기도 하고
숨결이 살아서 달려 오는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고즈넉한 정취 백운동 마을
귀신사 대적광전 지붕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 백운동마을에서 뒤로 난 길을 따라가면 닿는 산이 위대한 어머니의
산인 모악산이다.
모악산 자락 아래에 호남의 거찰인 금산사가 있으며 이 일대를 청도리라고 부른다. 하운동(夏雲洞)은 청도 남쪽에 있는
마을로 화운동(華雲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능지에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다. 하운동 남쪽에는 임금의 아내라는 뜻을 지닌 제비산(帝妃山)이 있고 그 아래에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혁명가인 정여립이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했었다. 그러나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그의 큰 꿈은 꺾이고 조선의 지식인 일천여명이
희생당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운동 동북쪽에 있는 산이 깃대봉(262m)이고, 하운동 남쪽에 있는 산은 탁주봉이며, 하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는 채봉골이다. 하운동 동쪽에 있는 등성이는 산제당이 있어 산 제당골이고, 하운동 서남쪽에 잇는 마을이 구리골이다.
동곡(銅谷)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서 한말의 종교 사상가인 증산 강일순이 9년 간에 걸쳐 세상의 도수를 바꾸었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
청도리에서 금구면 선암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살푸령재라고도 부르는 싸리재이고, 하운동에서 무악산으로 넘어가는
거개가 술바탱이라고도 부르는 씨름판 날맹이이다. 청도 북쪽 전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이 유각(有角)마을이고, 하운동 북쪽에 있는 터는 옛날에 말을 매던 곳이라는 마룻등이 있다.
미륵 신앙의 본 고장이자 동학의 고장이며, 화엄적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강증산과 차경석의 텃밭이 이곳 청도리이다.
가끔씩 찾아가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 지는 곳, 문득 그리운 사람들이 못 견디게 그리운 곳이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이다.
‘청도리의 어느 곳이건 터를 잡고서 마음 다 내려 놓고 귀신사 일대를 거닐며 한가함을 누리고 산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시절이 어디 있을까?’ 하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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