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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현대건축 이야기

건축기행 –64. 양구 박수근미술관 (2024.06.22.)

 

 

 

 

 

 

박수근미술관

Park Soo Keun Museum, 朴壽根美術館

화강암처럼 투박하지만 따뜻한 작품이 있는 곳

 

 

위치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 날),

1 1, 설날  추석 당일 오전

이용 시간 : 09:00~18:00

 

박수근은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화가다.

나물 캐는 아낙, 아기 업은 소녀, 빨래 빠는 여인, 소금장수 등 작품의 주인공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서민들이었다.

단순한 형태와 선묘, 거친 화강암 재질이 살아있는 그의 작품은

가장 한국적인 미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고향 양구에 그의 작품을 똑 닮은 미술관이 있다.

 

 

 

 

 

 

 

 

 

 

 

 

 

 


화강암 담벼락이 관람객을 맞는 미술관

 

탁 트인 공간 위에 박수근미술관이 자리한다.

조급하게 둘러볼 마음은 처음부터 입구에 두고 미술관에 들어서자.

미술관은 박수근공원 안에 있다.

미술관, 숲과 연못, 산책로가 한데 어우러진다.

전시 관람과 힐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원 입구에서 잠깐 한눈을 팔면 정작 미술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지나친다.

공원 입구에서 보이는 화강암 담벼락이 바로 미술관 본관이기 때문이다.

마치 관람객을 외면하듯 등을 돌린 모습이다.

왜 이런 형태일까?

의아함은 건물을 돌아 들어가면 이내 풀린다.

마당을 감싸 안고 있는 본관 정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본관 앞은 아늑하다.

마치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 든다.

본관 앞마당에서는 짧은 산책이 가능하다.

조금 걸으니 아이가 박수근 할아버지를 발견했다고 소리를 지른다.

바로 화가의 동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동상은 화가가 생전에 신고 다녔을 것 같은 고무신을 신은 채

미술관을 바라보고 있다.

옆에는 금방이라도 그림을 그리려는 듯 스케치북 한 권과

연필 한 자루가 놓여있다.

화가 박수근이 대상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던 순간을

가만히 떠올려볼 수 있다.

 

 

 

 

 

 

 

 

 



 

 

 

평범한 가치를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

 

본관으로 들어가기 전 아이와 함께 박수근 동상 옆에 잠시 앉아보자.

평생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살았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화가의 마음을 느꺼보는 것도 좋다.

 

박수근은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절구질하는 여인', '시장에 모인 사람들', '공기놀이하는 아이들',

'할아버지와 손자', '엄마와 아들' 등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이들이

작품의 주요 모델이었다.

특히 아내 김복순과 자녀들은 작품의 단골 주인공이었다.

 

박수근은 화강암처럼 거친 질감 위에 인물을 그렸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물감을 수도 없이 덧칠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물감을 불규칙하게 바르고 또 바르면 마모되면서

화강암 표면 같은 질감이 나온다.

박수근은 생전에 우리나라 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에서

한없는 영감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박수근미술관은 이런 점을 살려 본관 외벽을

화강암으로 쌓았다.

 

 

 

 

 

 

 

 

 

 

 

 

 

 

 

본관 기념전시실에서는

생전에 찍은 사진과 직접 쓰고 받은 엽서, 스크랩북,

안경, 연적 등을 전시 중이다.

눈에 띄는 유품은 외국에서 온 편지들이다.

박수근은 외국에서 먼저 알려졌다.

때로는 외국에서 그림 도구를 구입해 보내주기도 했다.

눈여겨볼 것은 본관 곳곳에 새겨진 박수근의 말과 글이다.

그의 예술 세계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다.

 

인용문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를 가장 즐겨 그린다.

 

 

가족을 사랑했던 화가

 

박수근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특히 자녀들을 위해 직접 그리고 만든 낙랑공주, 광개토대왕,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등의 그림책은 유명하다.

본관 전시실 곳곳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관람이 끝난 후에는

매표소 옆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향한다.

옥상은 미술관 전체를 볼 수 있는 산책로이자, '박수근파빌리온'까지 가는

길의 시작이기도 하다.

경사진 산책로를 따라가면 '전망대'.

이곳에서는 양구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를 지나면 나오는 길은 일종의 '추모의 길'이다.

길 끝에 박수근과 그의 아내 김복순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부부는 살아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떠난 후에도

다정하게 곁에 머물며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박수근을 그리워할 수 있는 곳, 안팎이 모두 작품이 되는 곳

 

묘에서 내려오면 박수근파빌리온으로 향하는 길이다.

2014년 개관한 박수근파빌리온은 주변 산을 닮아 지붕이 뾰족하다.

거친 화강암과 금속으로 마감한 외벽은 박수근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파빌리온 2층에서 나가면 '2'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2관에는 '2전시실', '3전시실' '교육실', '창작 스튜디오', '뮤지엄 숍' 등이 있다.

주로 기획전시가 열리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다.

2관은 안팎이 모두 작품이 되는 공간이다.

전시 중인 작품은 미술관 통유리로 비춰지는 바깥 풍경과 조화를 이뤄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전시된 작품에 집중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커다란 유리에 비친 바깥 풍경을 작품처럼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참고  본 콘텐츠는 2016 3월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정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상 글 출처 - 미술관 과학관 101 | 강민지 | 어바웃어북)

 

 

 

 

 

 

 

 

 

 

 

 

 



양구 박수근미술관

- ‘박수근: 평범한 날들의 찬란한 하루’ 특별전 29일 개막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29일부터 2025년 3월 9일까지 박수근미술관 내 박수근기념전시관에서

소장품 특별전 ‘박수근: 평범한 날들의 찬란한 하루’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미술관이 2023년 미술품 경매를 통해 구입한 신소장품

‘가족’(1956년 작)이 공개된다.

작품 ‘가족’은 2001년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이 개관 추진중일 때

장남 박성남 화백이 기증한 드로잉 ‘인물’(연도미상)과 같은 구도와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어

박수근의 단순한 선묘가 같은 소재를 여러 번 습작해

화폭에 담기게 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박수근이 살던 시대를 읽을수 있는 사진자료와 1

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신문기사를 함께 선보인다.

또 박수근이 가지고 있던 미술독학 자료와

한국적인 감각을 재현해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도 함께 전시된다.

또한 작고 이후 동료 화우들과 가족, 평론가,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사람 박수근’의 면모도 살펴볼 수 있다.

 

미술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이 박수근 작품속에서

따뜻함과 응원을 받는 소중한 하루를 간직하게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은 

2002년 개관한 박수근기념전시관을 시작으로

현대미술관, 파빌리온, 어린이미술관, 라키비움 총 5개의 전시관으로 이뤄져있다. 

통합관람권으로 5개의 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으며, 

박수근 기념전시관에서 박수근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한편 올해 탄생 110주년을 맞는 박수근 화백은

일제강점기 양구에서 태어나 해방, 한국전쟁을 겪으며 시대의 증언과 같은 작품을 남겨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는 화가이다.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같은 관전에 출품하며

화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박수근은 신문기사나 잡지에 나온 서양미술에 관한 자료를 스크랩하고,

미술 관련 서적들을 통해 형태와 재료, 질감, 기법 등 서양의 미술사조를 익혔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작고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은 화가 박수근은

여러 겹의 물감을 층층이 쌓아올린 독특한 기법으로

찬란한 조명을 받고 있다.

(이상 글출처 - 강원도민일보 이동명 ldm@kado.net)

 

 

 

 

 

 

 

 

 

 

 

 


화가 박수근

 

 

박수근(朴壽根, 1914년 2월 21일~1965년 5월 6일)은

대한민국의 화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號)는 미석(美石)이다.

회백색을 주로 쓰면서, 단조로우나 한국적인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다루었다.

 

작품으로 「나무」, 「복숭아」,「노인과 소녀」,「빨래터」등이 있으며,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에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건립되어 있다

 

생애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현 양구읍) 정림리 출생.

강원도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강원도 인제군에서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1959년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는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고,

한국인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글출처 - 위키백과)

 

 

 

 

 

 

 

 

 

 

 

 

 

 

 

 

박수근미술관을 이루는 세 가지 건축

 

 

박수근미술관은 크게 세 가지 건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2년에 세워진 박수근 기념전시관,

2005년에 세워진 현대미술관,

2014년에 세워진 박수근 파빌리온이다.

 

이들 건물은 이종호(1957-2014) 건축가가 설계했다.

이종호는 김수근 공간건축연구소에서 공부해서인지

인간과 건축의 소통, 기능성과 예술성의 조화라는 측면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박수근미술관의 건축은 첫 눈에 개성이 있으면서도

예술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돌과 콘크리트, 유리와 금속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화가와 관람객이 만나 소통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은,

화가의 작품을 담고 있는 틀이다.

그 틀 속으로 들어간 관람객은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화가의 삶을 이해하고

예술에 공감하고 작품을 평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건축가는 소통과 공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건축에 반영해야 한다.

그러한 점을 고려해 지어진 박수근미술관은

의도와 결과가 상당 부분 맞아떨어진 건축이다.

 

......

 

박수근 기념전시관은 외관이 돌(화강석)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박수근 화백의 돌 사랑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박수근 화백은 호가 미석(美石)이다.

탑과 비석 등 석물에 가장 많이 사용된 화강석의 아름다움에서

호를 따온 것 같다.

그는 석물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그것을 조형화하려고 했다.

박수근은 오래된 석물 표면의 오돌도돌한 양감과 꺼끌꺼끌한 질감을 표현해

한국적 미를 구현하려고 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물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 쓰고 있다."

 

주차장에서 미술관으로 향하다 보면

돌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이 박수근 기념전시관이다.

이 건물을 따라 반 바퀴 돌면 전시관 입구에 도달하게 된다.

미술관 밖에는 박수근 화백이 사랑한 석탑과 새 모양 석물이 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삼층석탑은 박수근을 사랑한 전후연의 기증품이다.

근현대 작품으로, 종교적인 측면에서보다는

예술적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기념전시관은 기념전시실, 중정,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전시실에는 박수근 화백의 삶과 예술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계, 인장, 안경, 연적 등 선생의 손때가 묻은 유품,

사진, 편지, 메모, 스크랩북, 잡지와 책자에 들어간 삽화, 삽화집,

자녀들을 위해 직접 그린 동화책 등이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박 화백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고,

그림은 박 화백의 예술적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영상, 연표 같은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글출처 - 오마이뉴스 이상기 기자]

 

 

 

 

 

 

 

 

 

 

 

 

 

 

 

박수근미술관 설계자 이종호에 대하여

 

 

박수근미술관은  건축가 이종호의 작품이다

생전에 건축가 이종호는

" 박수근 작가의 그림을 담는 미술관이기에 앞서

청년 박수근을 만들었던 풍경을 방문객이 함께 느끼는 장치로서의

미술관이기를 바랬고

그래서 땅을 파헤쳐 눈에 띄는 건물을 짓는 대신

기존의 땅과 오랜 세월에 걸쳐 자라날 식생을 염두에 두어 설계를 진행했고

  '작가의 삶의 자취가 남겨진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나간다'는

취지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종호 건축가의 유작이 된 박수근 파빌리온에 대해서

"처음 양구군에서 요구한 것은 생가 건립이었으나

있지도 않은 생가 건축은 아무런 의무가 없어서

박 화백을 기념하는 아틀리에와 기증작 전시실이 되는

파빌리온을 건립하기로 양구군과 협의했다

가장 고민이 컸던 외장재는

박 화백이 주로 사용했던 마티에르의 이미지와 맞는 익스펜디드 메탈로 정했다"

설계노트에 적혀 있다고 한다

 

박수근미술관의 20년 역사를 돌아보며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이종호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2000년 지명 현상설계부터 2014년 작고 직전까지

박수근미술관 건축의 시작부터 과정까지 깊게 관여한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건축가 이종호를 소개합니다'라는 글에서 고 정기용 건축가는

이종호를 "누구보다 우리나라 도시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속에 깊이 내재하는 현실성을 읽으려 노력하는" 건축가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양구에 세운 박수근 미술관은

건축이 어떻게 '건물'을 넘어서 훼손된 땅을 치유하며

작은 도시가 어떻게 '문화'의 이름으로 새롭게 생성될 수 있는지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주었다"(한겨레21  2006년 09월 29일자)며

극찬했다

 

시립대 김성홍 교수는

"이종호의 건축은 매끄럽지도, 정교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힘이 있다.

인간 이종호가 그렇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스밈의 건축' 목말라했던 이종호를 기억하다

                                                                -  2019. 7. 28. 

 

......

 

‘우리의 이종호’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쉽지 않다.

우선 ‘토종건축가’로서 한국 사회의 현실, 땅과 풍경에 대한 이해에 천착한,

집 짓는 전문가로서의 면모다.

이종호는 생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건축의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사람”이라고 답한 바 있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형태에 집착하는 ‘작가주의 건축’에 대한 반감에서였다.

 

건축가 민현식은 “이종호의 집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주변의 무수히 많은 환경 요소 중에서 주목한 요소들을 어떻게 건축화했는지,

또 그 집에서 독특하게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

그 관계망이 구축돼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2001), <예술인촌>(2005), <박수근 파빌리온>(2013)은

박수근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밀레와 같은 전원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땅의 풍경을 중심에 뒀다.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나간다”는 본인의 표현처럼

미술관은 산줄기를 따라 강하게 뿌리박고, 돌무더기로 덮여 안쪽으로 누워 있다.

<박수근 파빌리온>은 논 위에 전용보행로를 띄워 습지식물이

건물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박수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거칠거칠한 질감은 미술관의

돌무더기로 표현됐다.

 

낮은 연못의 고요한 긴장감과 세심하게 조정된 동선이 돋보이는

<노근리 역사평화박물관>(2010)에선

박물관-위령비-양민들이 집단학살당한 땅굴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었다.

설계 대상지를 광각으로 바라보는 이종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된다.

우의정은 “이종호는 건축의 시작은 모두 주변과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설계한 많은 건물 중 같거나 비슷한 디자인이 하나도 없다.

자기 언어가 없다기보다는 자기 버릇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

 

5년 전, 한 건축가가 우리 곁을 떠났다.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명예가 위태로워지자

평소 사회적 정의와 인간의 염치에 예민했던 그는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건축가 이종호(1957~2014)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생명력을 지녔다.

그가 떠난 해 사진집이 발간됐고

건축잡지 <와이드>엔 ‘행동하는 건축가’라는 주제로

이종호 특집이 실렸으며

이듬해부터 이종호 공공연구 프로젝트 묶음집 <하이퍼폴리스>,

작품집 <건축가 이종호>가 잇따라 나왔다

 

5주기인 올해는

후배와 제자들이 모여 “건축의 도시적 역할을 고민했던” 그를 기억하며

전시회 ‘리얼-리얼시티’를 열고 있다

 장용순(홍익대 건축학과 교수)의 말처럼,

그가 남긴 공백은 채워질 수 없는 한마리 나비의 날갯짓처럼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든다

......

 

서울에서 태어난 이종호(1957~2014)는 한양대를 졸업하고

1980년 김수근의 공간연구소에서 일하다

1989년 스튜디오 메타를 열며 홀로서기에 나섰다.

2003년 광주국제비엔날레, 2003년 베네치아건축비엔날레에서

초대작가로 활동했다.

 

주요 작업으로는 <박수근 마을>(2001~2013),

<노근리 역사평화박물관>(2010)을 포함해 <율전교회>(1990),

<홍천 팜파스휴게소>(1992), <바른손센터>(1993), <파주 보리출판사>(2004),

<감자꽃스튜디오>(2004), <이순신기념관>(2007), <이화여고 백주년 기념관>(2003),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리모델링>(2011), <이화정동빌딩>(2013) 등이 있으며

다양한 공공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출처 - 한겨레신문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구독

 

- 한 건축가의 죽음

입력 : 2014.02.26 21:03 수정 : 2014.08.06 18:25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33년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가 서른 살 즈음 광야로 나간 이후부터 3년간 메시아로서의 삶은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반면에, 그 이전 30년간 삶의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고향인

나사렛에서 자라고 어릴 적 예루살렘에 가서 종교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 전부다.

2000년 전의 서른 살 나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미루어 볼 때 한 인간으로서 이미 완성된 시기 아닌가.

요즘으로 치면 거의 사오십을 넘는 나이일 게니 세상적으로 말하면 일가를 이룬 때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직업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성경에 기록되기로는 예수의 부친인 요셉의 직업은 목수다. 쉽게 추측하면 아버지의 일을

도왔을 개연성이 짙어서 예수도 목수라고 했다. 내 어릴 적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 예수의 집 안을 목공소로 꾸며 무대를 만들기도 했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지내왔다.

 

그러나 내가 건축을 하고부터 이 사실에 대해 차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사렛이나 이스라엘은 목수라는 직업이

있을 만큼 나무가 많은 땅이 아니다. 메마른 땅에 감람나무 같은 왜소한 나무가 주종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

레바논이나 외지에서 나무를 수입했다고 성경에 쓰여 있을 정도로 목재가 귀하다. 대신에 석회암은 이스라엘 온 땅에

널려 있어 집은 돌을 쌓아 짓는 게 보편적이었으니 이스라엘에서 석공이라면 모를까 목수라는 직업은 생소할 수밖에 없다. 왜 그렇게 기록되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번역착오였다.

 

성경은 원래 이스라엘 고유언어였던 아람어나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리스어 성경원전에 따르면 요셉의 직업은 텍톤(tekton)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텍톤, 어떤 형상을 구축하는 일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바로 건축가의 영어인 Architect에

쓰인 글자다. Arch라는 접두사는 으뜸이라는 뜻이니 으뜸이 되는 텍톤은 집을 짓는 자라는 뜻이며, 곧 건축가라는 말이

된다.

 

건축가의 영어단어인 architect에 정관사를 붙여 the Architect라고 하면 조물주 하나님이란 뜻이 된다. 그렇다. 예수는

생뚱맞은 목수가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가였다는 게 옳다.

 

서른은 직업인으로서 완숙되었을 나이여서, 영민했던 예수였으므로 건축가로서도 성공했을 게다. 그렇다면 건축이

사람을 바꾼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며,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집 짓는 일을 그만두고 광야로 나가

세상을 아예 새롭게 짓는 일에 전념했던 것 아닐까. 예수가 짓는 세상에서 새롭게 살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 아닐까.

 

건축가로서 예수의 삶. 이 상상에 이른 나는 급기야 건축가의 바른 태도를 다시 묵상했다. 건축은 우리의 삶을 이루게

하는 직접적이고 적극적 수단이니 건축설계는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건축설계를 하는

건축가는 인간의 생명과 그 존엄에 대해 스스로 진실하고 엄정해야 하므로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의에

주려야 한다. 특히 다른 이들의 삶에 관한 일이니 온유해야 하고 긍휼해야 하며 청결해야 하고 화평케 해야 한다.

바른 건축을 하기 위해 권력이나 자본이 펴놓은 넓은 문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아야 하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사물에 정통하고 박학하기 위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결단코 불의와 화평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그런 행동 때문에 집이나 고향에서도 비난 받을 각오가 되어야 한다. 사람 사는 일을 알기 위해 더불어 먹고 마셔야 하지만 결코 그 둘레에

갇혀서는 안된다. 스스로를 수시로 밖으로 추방하여, 광야에 홀로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성찰적 삶을 지켜야 한다. 오로지 진리를 따르며 그 안에서 자유 하는 자, 그가 바른 건축가가 된다.

 

내가 깨닫게 된 바른 건축가의 삶은 예수의 삶과 다름이 아니었다. 그러니 바른 건축가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게는 언감생심의 길이며 그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건축가라고 칭하며 사는 일이 늘 두렵고 아프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삶에 익숙하며 그런 건축가의 태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있다. 이종호. 그는 나보다 다섯 살이

적지만 범접하지 못할 생각과 태도로 모든 이가 경외하는 건축가이다. 현대건축의 거두였던 김수근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선생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유학 한번 가지 않았지만 지독한 독서와 폭넓은 지적 교류를 통해 누구보다 건축에, 사회에, 역사에 정통하고 우리의 삶을 늘 깊게 사유했다. 이 땅의 풍경과 사연들을 가슴으로 안아 건축으로 만드는 일에

탁월하다. 특히 건축이 지녀야 할 공공적 가치에 지극한 관심이 있었다. 건축설계도 공공의 이익 도모가 늘 우선순위이며 그런 건축을 통해 탐욕으로 일그러진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소망해왔다. 출세와 재물은 그의 사고범주에

없는 단어였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몸과 마음을 쏟으며 사랑하고 가르쳤다. 세상의 불의에 결연히 분노했고

곧은 말을 거리끼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세상에 있으면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말을 믿는 나는, 그를 통해 위로

받곤 했는데….

 

그가 곤경에 처했다. 학교에서 몸을 사르며 행한 일들의 회계처리를 두고, 작년 말 감사원이 수천만원의 회계오류를

들이대며 징계를 요구한 것이다. 워낙 바른 그의 처신을 잘 아는 학교집행부가 적극적으로 그 부당함을 소명하여 재심사를 받기로 했다. 엄청난 상처였지만 그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감내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주, 검찰은 그를 갑자기

10억원의 사기범으로 둔갑시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바리새인이 따로 없었다. 인격적으로 이미 교살당한 것을 즉각

감지한 그는, 지난 목요일 밤 제주로 향하는 뱃길에 홀로 올라, 거칠고 차가운 밤바다에 육신을 던졌다.

 

또 한 명의 예수가 살해된 것이다.

출처 -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한 건축가의 죽음 - 경향신문 (khan.co.kr)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은

2002년 화가 박수근선생의 생가 터인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마을에 세워졌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박수근선생의 예술혼과 작품세계를

연구•수집•전시•교육하는 활동을 위시하여

창작스튜디오•박수근미술상•전국사생대회 등

다양한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다.

 

개관한 지 20여 년 동안 약 102,50㎡의 부지를 확보하여

박수근기념전시관, 현대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 어린이미술관, 라키비움까지

총 5개의 전시관을 건립하였고,

각 전시관마다 정체성과 비젼을 고려한 차별화 전략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미술관 언저리에 미석예술인촌을 조성하여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이어가는 전업작가를 지원하고 국내외 예술활동을 매개하고 있다.

그 외 박수근미술관 전시와 교육프로그램에 역량있는 예술강사를 채용하여

국내•외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개관 당시 박수근선양사업위원회와 박수근유가족이 주측이 되어

작품과 자료를 다수 기증 받은 바 있고,

이후 매년 양구군에서 작품을 구입하여 현재 박수근의 작품은 235점이며,

그 외 근•현대작가 작품 및 자료를 포함해

969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출처 –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홈페이지)

 

 

 

 

 

[ 제2관 현대미술관 ]

 현대미술관은 기획전시, 교육과 세미나, 창작 스튜디오 개념으로 2005년에 세워졌다

 

 

 

 

 

 

 

 

 

 

 

 

 

 

 

 

 

 

'제8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전 노원희:출몰무대' 가

6월 14일 부터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제2관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11월 3일까지 이어진다

 

수상작가는 1980년대 민중미술을 이끈 여성 미술가이다

노원희 작가는 민중미술이라는 카테고리에 제한되기보다는

일상과 현실을 향한 애정과 비판의식을 표현하면서 서정적이며 은유적 표현으로

치열할 작가정신을 작업을 평생 꾸준히 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수근 미술상은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 화백의 예술정신을 계승·발전시키면서

현재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를 지원하고자

2016년 제정됐다

 

 

 

 

 

 

 

 

 

 

 

 

 

 

 

 

 

 

 

 

 

 

 

 

 

 

 

 

 

 

 

 

 

 

 

 

 

 

 

 

 

 

 

 

 

 

 

 

 

 

 

 

 

이종호 (건축가)

 

 

출생 1957년 11월 11일

사망 2014년 2월 21일(56세)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 소리도

소속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스튜디오 메타

 

업적

건축물 율전교회 (1993)

바른손센터 (1994)

명지대 방목기념관(1999)

박수근 미술관 (2002)

수상 건축가협회상 (1992, 2003)

아천상 (1992, 2003)

건축문화대상 (1993)

김수근 문화상 (1995)

 

 

이종호(李鍾昊, 1957년 11월 11일~2014년 2월 21일)는 대한민국의 건축가이다.

박수근 미술관, 노근리 기념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등을 설계하였다.

 

생애 및 이력

이종호는 해외 유학을 거치지 않은 순수 국내파 건축가로써 1976년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에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김수근의 건축사무소 '공간연구소'에 들어가

김수근의 마지막 제자로써 10여년 간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설계실장을 역임하였다.

1989년에는 독립하여 대학로 인근에 '스튜디오 메타'를 설립하였다. 1993년 강원도 율전교회를 설계하였으며

1994년 양남철과 함께 설계한 '바른손 사옥'이 제6회 김수근 문화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회적 장소'에 대한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건축이 들어서게 될 장소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주목하는

작업을 하기를 희망하였다. 이를태면 도시 재개발 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시장 좌판에서 무엇을 팔고 있는가부터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서울을 예로 들자면 복잡하고 통일되지 않은 거친 혼성 도시의 풍경이지만

역사성을 담아 개개 공간의 질을 다듬는다면 '지옥같은 천국'의 역설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 (2002)에 대하여 동료 건축가 정기용은 "건축이 어떻게 '건물'을 넘어서

훼손된 땅을 치유하며 작은 도시가 어떻게 '문화'의 이름으로 새롭게 생성될 수 있는지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주었다."라고 평하였다.

이종호 본인은 작가의 그림을 담는 미술관이기에 앞서 청년 박수근을 만들었던 풍경을 방문객이 함께 느끼는

장치로서의 미술관이기를 바랬다고 하였다. 그리고 '분원 백자관' 에서는 깨진 파편들과 도공의 기억이 더 앞에

나서 있어야 했다고 이야기하였으며 '노근리 역사 평화박물관'은 미군에 의해 벌어진 양민 학살을 다루고 있으나,

"섣부른 애도나 정치적 윤색 없이 오직 상실의 아픔만을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종호는 그가 설계한 아산의 이순신 기념관이 공사 과정에서 변경되어 난중일기가 중심이 아닌

각종 패널과 화려한 영상물로 채워진 것에 분노하여 문화재청장에게 항의하고 개관식에 참여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 밖에 그의 작품으로는 정동에 건립한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과 홍천 팜파스 휴게소 등이 있다.

 

그러는 동안 후학 양성을 위해 1991년부터 한양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1994년부터는 건축학도에게 필요한

'총체적이며 근원적인 사고'의 함양을 위해 승효상 등의 다른 동료 건축가들과 함께 전국의 건축학도를 모아 개최하는

포럼식의 '서울 건축학교 (SA)'를 운영하였다. 2000년부터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로 일하다가

2005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학교의 도시건축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사망과 논란

2013년 11월 29일 감사원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측에 '연구비 부당 집행'을 근거로 이종호 교수에 대한 징계처분을

요구했다. 징계 요구의 이유는 2009년 4월 1일부터 2013년 7월 19일까지 7개 과제의 연구책임자로서 총액

약 9억 1000만원의 연구비 중 2억 3000만원을 개인 통장으로 공동관리 하고 5800만원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예술종합학교는 곧바로 이종호 교수를 대신해 반발했다. 학내 자체조사에 따르면

그는 개인 계좌를 이용해 연구원들의 급여를 선지급하고 연구비가 들어오면 일부를 다시 개인 계좌로 정산하였으며

필요한 비용은 사비를 보태 사용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5800만원의 차이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예종과 이 교수는

이를 '회계오류'라고 밝혔으나 감사원과 검찰은 횡령 등 부당편취로 해석하였다.

이에 한예종은 2013년 12월 30일 감사원에 징계처분요구 재심의를 청구하였다.

하지만 검찰은 감사원의 재심의 기간 도중인 2014년 2월 18일에 이종호 교수를 불러 소환조사를 하였으며 

2월 19일에는 구속 영장을 청구하였다. 그리고 일부 언론은 곧바로 검찰의 영장 신청 내용을 인용하여 이종호 교수가

10억원 대의 횡령과 비리를 자행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감사원의 재심의 결과를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법원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된 2014년 2월 21일의 하루 전,

이종호 교수는 부산항을 출항한 제주행 페리호를 타고 가다가 여수 소리도 인근 해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2월 21일은 2013년도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위 수여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하였다. 2월 28일에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에서는 고인의 시신이 발견되지 못한 상태에서 유족과 제자들에 의해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2014년 3월 15일, 여수 앞바다에서 몸을 던진지 23일만에 이종호 교수의 시신이 일본 쓰시마섬 해안가에서

발견되었다.

 

주요 경력

교육

1991년 ~ 1993년 한양대학교 설계스튜디오 강사

1994년 ~ 2013년 서울건축학교(SA) 스튜디오 튜터

2000년 ~ 2003년 한양대학교 건축디자인 대학원 겸임교수

2005년 ~ 201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부교수

 

주요 건축

건축 : 율전교회, 바른손 센터, 홍천휴게소, 방목기념관, 박수근 미술관, 이화여고100주년기념관, 이순신 기념관, 

노근리 기념관, 분원 백자관, Y주택, W주택, M주택 등

도시 : 광주문화도시연구, 순천문화도시연구, 무주태권신시연구, 나주도래마을연구, 아산영인면연구, 

용산역세권문화전략연구, 한강, 임진강연안지역연구, 경기도정체성연구, JDS 신도시연구 등

디자인 : 차세대고속열차 차량디자인 (디자인과 공동연구)

 

전시

《DMZ》전 (서울시립미술관) 《아름다운 서울》전 (국립현대미술관).

《삶과 건축》전 (환기미술관) 《현대건축10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99년 《99양평00》전 (두물워크숍, 양평군청) 《김수근 문화상 수상자》 전 (김수근문화재단)

광주 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작가

《New-Trends of Architecture in Europe and Asia 2004》 초대작가

홍콩 센젠 비엔날레 초대작가

《Mega City》전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탈린, 바르셀로나, 국립현대미술관).

《S(e)oul scape》전 (피렌체, 로텔담, 브뤼셀, 마드리드)

 

학술

1997년 건축의 한국성 세미나, 플러스문화사 주최 (발제)

1999년 ICAS21 국제세미나, 서울특별시 (발제)

1999년 "99양평00" 포럼, 두물워크숍 (전체 코디네이션)

2002년 IASTE 2002: Hong Kong (발제)

2004년 ~ 2005년 "New Trends of Architecture in Europe and Asia-Pacific 2004-2005" Traveling Exhibition - Lille, Hong Kong, Cork, Tokyo, Melbourne (발제)

 

수상

건축가협회상(율전교회). 건축문화대상(용두리주택). 건축문화대상(홍천휴게소)

건축가협회상 아천상(홍천휴게소). 김수근문화상(바른손센터)

건축가협회상(명지대 방목기념관 및 행정동). 건축가협회상 아천상(박수근 미술관)

 

저서

2014년 3월 1일 이종호, 김태형, 김성우 《을지로 2 : 을지로를 말하는 17가지 도시건축적 시도들》, 우리북, ISBN 979-11-851-6410-6

2004년 5월 25일 김진애, 김헌, 구영민, 전진삼, 김재경, 이용범, 함성호, 김대익, 김한준, 황용하, 황두진, 최문규, 최원미, 최욱, 안상수, 민선주, 김영섭, 이종호, 함인선, 박인석, 이종건, 신혜경, 김봉렬, 조성룡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 서울포럼, ISBN 978-89-857-3423-3

2005년 12월 1일 승효상, 정기용, 조성룡, 김인철, 김영섭, 민현식, 이종호, 김준성, 김종규, 이일훈, 김영준 《건축이란 무엇인가 - 우리 시대 건축가 열한 명의 성찰과 사유》, 열화당, ISBN 978-89-301-0171-4

(글출처 -  이종호 (건축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