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 영흥사 ( Linh Ung Pagoda )
다낭에는 영흥사라는 3개의 사찰이 있습니다
손트라 (Son Tra)영흥사는 바이 붓 (Bai But) 영흥사,
오행산 (Marble Mountains) 영흥사는 논누억 (Non Nuoc) 영흥사,
바나힐 영흥사는 Nui Chua 산 영흥사라고도 합니다
영흥사들은 다낭에서 가장 신성한 곳들이므로
유명한 영적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방문객들은 여기서 자연과 천지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기원할 수 있습니다.
손트라 영흥사는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불상이 있는 곳으로
다낭 여행에서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지닌 사찰입니다.
손트라 반도 (Son Tra)에 위치하기 때문에 손트라 영흥사라고 부르는데
도심에서 약 10km 떨어져 있습니다.
사원은 반도에 기대어 있고 동해를 향해 있습니다.
주변은 꾸 라오 참 (Cu Lao Cham) 섬이 둘러싸여 있고
멀리에는 하이반 고개 (Hai Van Pass)의 멋진 풍경이 보일 수 있습니다.
손트라 영흥사로 이동하려면 택시, 자동차, 오토바이 등과 같은
다양한 교통 수단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손트라 반도의 관광 명소인 영흥사의 인상을 만드는 것은
오늘날까지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관음상입니다.
그 관음상은 높이 100 미터가 넘는 언덕에 위치하고 연화좌의 지름은 폭 35미터 및
상의 지름은 17미터와 높이는 17층의 높이에 해당하고
전체 높이는 최대 67미터입니다.
또한 독특한 건축 양식도
이 사원을 찾는 방문객들을 끌어들이는 흥미로운 특점입니다.
선트라 영흥사의 광경은 많은 방문객들에게 아름다운 그림에 비유되는데
성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과
자연하고 천지의 매력이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게다가 이 곳에서 바이 붓 바닷가 (Bai But), 다낭 반코 전망대 (Ban Co Peak),
천년 된 반얀트리 (Banyan tree)와 같은
많은 다른 관광 명소도 쉽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여행을 더 흥미롭고 체험으로 가득 채우게 할 것입니다다.
(출처 - https://vinpearl.com/ko)
다낭 대성당
찐 또아 꽁 가, Da Nang Cathedral
다낭 대성당 (Da Nang Cathedral)은
전형적인 서양 교회와 뛰어난 핑크 색상의 고전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단연 눈에 띕니다.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체크인을 하는 관광지로,
해안도시 다낭을 방문할 때 꼭 봐야 할 명소가 되었습니다.
다낭 대성당은 평범한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낭 대성당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종교적인 건물입니다.
1923년 2월 착공해 1924년 3월 완공된 대성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 최단 기간의 공사로 건축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성당은
루이 발레 (Louis Vallet) 신부가 설계하고 감독하였고
Rue du Musée (현재 Tran Phu) 거리의 공터에 세워졌으며
당시 이 교회는 투란 대성당이라고 불렸습니다.
1924년 9월 14일에 Quy Nhon성의 주교인 Grangeon 주교와
Hue (옛날 수도)의 주교인 Allys 주교가 교회를 축복했습니다.
교회의 제목은 "예수님 성심"입니다.
다낭 한시장
다낭 한시장 은 다낭에서 가장 유명한
현지 시장 두 곳 중 하나입니다.
한시장은 다양한 음식과 특산품 등을 판매하는 쇼핑천국일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의 활기찬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낭 한시장은 1940년대에 처음으로
즉흥적인 상거래 지역으로 생겨난 이후,
1990년 5월 19일에 시장의 재건축이 시작되었으며,
이 시장은 공식적으로 1991년 3월 29일에 576개의 상점과 36개의 키오스크로
개장되었다
면적 28,000 제곱 미터인 넓은 두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낭의 가장 중요한 무역 지점 중 하나인 한마켓 다낭은
쩐푸(Tran Phu), 박당(Bach Dang), 흥브엉(Hung Vuong), 쩐흥다오(Tran Hung Dao)
4개의 주요 거리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아주 편리하다
예전에는 한시장이 작은 장터에 불과했지만,
좋은 위치 덕분에 한강을 따라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한시장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1940년대에 한 시장이 공식적으로 개장되었다
프랑스인들은 한 시장으로 물품을 운반하기 위해
투란 마르셰(Tourane Marché)라는 대형 열차 시스템을 건설했고
이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일부 중국 및 베트남 상인들은
시장 주변에 생필품인 식료품점, 보석 상점, 약국 등의 상업 지역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매력적인 해안 도시 다낭에는
대형 식료품 체인점과 쇼핑몰이 많지만,
한 시장은 여전히 이 도시에서 가장 쇼핑하기 좋은 장소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고 사랑을 받고 있다
미케 비치 야경
한강유람선 야경투어
한강유람선 야경투어의 매력은
한강 위를 유유히 뜨가며 다낭 시내의 스카이라인과
한강 주변으로 오가며 보던 다낭 도심의 다양한 랜드마크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서울의 '한강'과 같은 'Han River'이고
베트남에서는 쏭 한 (Song Han)이라고 부른다
한강은 다낭을 중심으로 남북을 가로질러 관통하는 강으로
총 7.2km에 달한다
선짜반도와 시가지를 구분하는 위치에 있는데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더해져서 다낭을 비추는 물줄기가 된다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처럼 빛나는 다리와 고층 빌딩 등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다낭의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한다
유람선은 한강을 따라 운행하며
용 다리, 한강 다리, 쩐티리 다리, 투언프억 다리 등
4개의 유명한 다리를 거쳐 지나간다
특히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9시에는
용다리에서 펼쳐지는 불과 물을 뿜어내는 화려한 Show를 감상할 수 있다
처음 3번은 불을, 다음 3번은 물을
총 10분가량 토해내는 특별한 이벤트로, 관람객들을 즐겁게 하고
다낭의 밤하늘을 황홀하게 수 놓는다
I LOVE DANANG
다낭 국제공항
베트남
Vietnam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위치 인도차이나반도 동부
인구 99,188,629명 (2024년 추계)
수도 하노이
면적 331,210.0㎢
공식명칭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기후 열대몬순기후
민족 구성 베킨족(86%)
언어 베트남어
정부/의회형태 사회주의공화제 / 단원제
종교 불교(70%), 로마가톨릭(10%)
화폐 베트남 동 (₫) 환율계산기
국화 연꽃
대륙 아시아
국가번호 84
GDP USD 240,779,000,000
인구밀도 301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vn
- 요약
아시아의 국가. 수도는 하노이이며 공식어는 베트남어, 화폐 단위는 동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베트남 족으로 80%가 불교를 믿는다. 중국, 라오스·캄보디아, 타이 만, 통킨 만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인구과밀 국가 중 하나다. 북부는 아열대성 기후이고 남부는 열대 몬순 기후이다.
서북쪽에서 동남쪽까지 최대길이는 약 1,650km이고 동서간의 최대너비는 북부 550km, 남부 340km 가량이다.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타이 만, 남쪽과 동쪽으로는 남중국해와 통킨 만에 접해 있다. 수도는 하노이이다.
BC 3세기 중국의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이 베트족에까지 이르렀을 때, 홍강 삼각주에 거주하는 베트족이 역사에 등장했다. 그때부터 베트남 역사의 주요 흐름은 베트남 고급 문화의 원천이 되어온 중국과의 상호작용이었다. 베트남은 938년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난 뒤 조공을 바치는 국가로서 중국 황제에게 칠기, 피륙, 상아, 열대 산물들을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철학·행정·문학 서적들을 받았다. 중국 문화는 베트남 사회 깊숙이 침투했으나, 그것은 하층민들보다는 귀족과 고위 지배층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농촌의 하층민들은 베트남의 독특한 관습과 신념, 언어, 생활습관, 남녀의 사회적 역할 등을 그대로 유지했다.
베트남의 왕들은 중국 황제들을 본보기 삼아 베트남 변경에 있는 소수 인종집단으로부터 공납을 거뒀고, 중국의 왕실에 조공을 바치지 않을 때는 그들 스스로를 황제라 불렀다. 베트남의 왕실과 지역사회 간에 존재하는 문화·공간적 격차가 중국과 베트남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통치력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트남의 인구와 국토 면적은 중국의 성 하나와 비슷하다. 대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농촌공동체에 대한 통치의 어려움은 "황제의 칙령은 마을 입구에서 멈춘다."라는 격언에 잘 드러나 있다.
베트남은 지배문명과 연계를 갖고, 오랫동안 자국의 목적에 맞게 중국 문명의 사상과 제도 및 기술을 변형시켜왔다. 이러한 연계와 변형의 양태는 일찍이 중국과 베트남의 역사적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통을 거부하고 식민화에 싸우는 공산주의를 채택한 것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면이 다시 확인되었다. 그 대응양식은 사회적 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서양의 제도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20세기에 다시 명백해졌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그 양상은 베트남 공산당이 자유경제주의를 받아들이고 세계 경제로 통합되는 이면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전략적 흡수와 적절한 변형은 베트남이 세계 최대의 인구과밀 국가 중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어낸 시장경제 국가가 되도록 했다.
수도인 하노이는 나라의 북쪽에 위치한다. 반면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치민시티(이전의 사이공)는 남쪽에 있다. 베트남은 20세기 중반에 길고 지리한 전쟁의 결과, 1954~75년에 분단을 겪었다. 북베트남이라고 알려진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이라고 불리던 베트남 공화국으로 나뉜 분단은, 처음에는 군사적 성격이 짙었으나 이후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1975년 4월 통일되었고 1976년 7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 자연환경
베트남은 중서부를 통과하며 남북으로 뻗은 안남 산맥, 북부의 홍강 삼각주, 남부의 메콩 강 삼각주, 동부의 해안평야 등 지형상 4부분으로 나뉜다.
홍강 삼각주의 4배 가까운 면적을 차지하는 메콩 강 삼각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벼농사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메콩 강의 범람은 홍강과는 달리 연중 일정한 편이며 이 범람으로 범람원에 매년 퇴적물이 쌓여 기름진 토지가 계속 늘어난다. 이 범람원에는 넓은 논과 사탕수수·바나나·코코넛 등을 재배하는 농장들이 형성되어 있다. 두 주요 삼각주는 길이 약 1,000km에 이르는 좁은 저지대 해안평야를 통해 연결된다.
베트남은 열대계절풍 기후로 겨울에 남부는 덥고 북부는 서늘하다. 연평균기온은 북부 하노이 23℃, 남부 호치민시티 27℃이다. 연평균강우량은 1,500∼2,000㎜로 5∼10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북부와 남서부 지역은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다.
전국토의 약 1/3은 열대상록수림과 참나무·너도밤나무·밤나무·소나무·티크·흑단 등의 아열대 낙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대나무는 숲 속의 나무 그늘이나 주로 강 연안 지대에 널리 퍼져 있다. 간만의 차가 있는 해안평원에서는 맹그로브 숲을 많이 볼 수 있고, 사바나형 목초와 관목이 남서부의 산악지방과 고원을 뒤덮고 있다.
많은 임야가 화전식 경작 및 1960년대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살포로 손상되었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은 1980년대 이후 회복되었다. 국토 총면적의 약 1/5이 경작지이다.
- 국민
베트남인이 가장 우세한 인종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한다. 대표적 소수민족은 북부의 중국인, 몽족, 타이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 눙족·타이(토)족 등과 남부의 고산족·크메르족·찬족 등이다. 공용어는 베트남어이고 프랑스어·중국어·영어·크메르어도 사용된다.
사상은 유교 철학의 비중이 크며 주요 종교는 불교와 도교이다. 로마 가톨릭교, 이슬람교, 호아하오교, 카오다이교, 개신교 신자도 있다. 출생률과 사망률,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동남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지만 세계 수준에 비추어 비교적 높은 편으로, 인구의 약 1/5 이상이 15세 미만이다.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전체 인구의 1/3 이상에 달한다. 평균기대수명은 약 76세이다(2020). 2024년 기준 인구는 9,918만 명이다.
1976년 베트남 정부는 남부지방을 위주로 1986년까지 도시인구 중 1,000만 명을 농촌의 '새 경제구역'으로 재배치하려는 계획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1976∼86년 사이에 새 경제구역에 정착한 인구는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졌을 때 약 100만 명의 난민이 베트남을 떠났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해외이민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1975∼79년에도 베트남인과 화교를 포함한 100만 명 가량이 베트남을 탈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 경제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으로서 대체로 농업에 바탕을 둔 중앙계획경제체제를 실시하고 있다. 1975년 베트남 전쟁 종결 이후 베트남은 비효율적이고 더러는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경직된 농업 집산화·국영화 정책으로 인해 경제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시장경제). 그러나 1986년 시장원리와 성과급제 등을 경제에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민간기업의 활동을 허용했다. 그러나 1인당국민총생산(GNP)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베트남 총노동력의 약 3/4이 농업부문에 종사하며, 국내총생산(GDP)의 1/4 이상을 농업부문이 차지한다. 1980년대 후반 잉여곡물을 자유시장에 내다 팔도록 허용한 정부정책에 크게 힘입어 베트남은 식량부족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식량수출국이 되었다. 경작지의 대부분이 벼농사에 이용되며 많은 지역에서 2모작이 이루어진다. 쌀 이외에 카사바·고구마·땅콩·수수·옥수수 등이 주요 농작물이다. 국영농장에서는 사탕수수·콩·코코넛뿐만 아니라 약간의 수출용 고무·커피·차 등을 생산한다. 돼지와 소 사육도 많이 하고 있다.
1976년 이후 재건을 위한 투자가 시멘트·철강·섬유·전력 생산시설 등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베트남의 주요 산업활동은 여전히 식품가공 분야이며, 기간시설의 미비로 상품의 수송·유통 부문이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석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에서 주로 전력을 공급하나 발전량은 전국의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한 편이다. 베트남은 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1991년까지는 소련이 주요 원조국이었다.
교역에서는 수입이 수출을 초과한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옛 소련이 주요 교역상대국이었으나, 1990년대초부터 일본·타이완·타이·싱가포르 등이 주요 교역국이 되었으며 이미 아시아와 서구의 많은 나라들로부터 무역과 투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주요 수입품목은 연료·원자재·기계류·식품 등이며,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원자재와 수공예품 등이 손꼽힌다.
- 정치와 사회
1992년 개정된 헌법에 따르면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은 국회이며 국회의원은 5년 임기로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국회가 국회의원 가운데서 주석을 선출하며, 주석은 국회에 부주석·최고인인민재판소장의 임명과 해임을 요청한다.
주석과 총리를 비롯한 각료의 임기는 국회의 임기에 따른다. 최고 상소법원은 최고인민재판소이며 하급 인민재판소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는 베트남 공산당이며 당원들이 정부 고위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정책은 전권을 가진 공산당 정치국이 결정한다. 공산당이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하며 이들은 경쟁 없는 단일 후보명단으로 선거인들에게 인준 받는다. 군대는 육군·해군·공군 및 지방의 방위군·민병대·예비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복지제도를 실시해 농촌지역과 마을 단위까지 공공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척수성소아마비·장티푸스·디프테리아·결핵 등의 발생이 감소되었다. 교육은 공식적으로 의무교육이며 9년간 무상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문맹은 1970년대 말 근절되었다. 고등교육은 하노이대학교와 그밖의 대학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언론을 비롯한 모든 방송매체는 정부와 공산당이 운영하고 규제한다. 당 공식 기관지인 〈난단 Nhan Dan〉을 비롯해 수많은 신문들이 일간·격주간·주간으로 발행된다.
- 역사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경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언어 집단이 남베트(Nam Viet, 南越)라는 독립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었다. AD 1세기에는 인도와의 접촉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난 왕국이 메콩 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6세기에 멸망했다. 939년 드디어 북부지역이 약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13세기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407년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지만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黎] 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경은 점차 남하했다.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후에 통일왕조의 황제(嘉隆帝)가 된 구엔 안[阮映] 장군에 의해 통일되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39년에는 식민지로, 1939∼45년에는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 친(親)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미국의 개입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입은 후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으며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며, 1976년 7월 2일 마침내 두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화교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크메르루즈). 이에 대응해 중국군이 베트남의 북쪽 국경을 따라 공격을 개시해 베트남의 영구 군사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약 40km 정도 진격해 들어왔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로부터 병력을 끌어오지 않고 중국군의 진격을 막았지만 9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80년대 초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많은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며 인도차이나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에 따라 몇몇 국가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었다. 한편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에 대항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으며, 마침내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해 1989년 철군을 종료했다.
심각한 경제상황과 소련에서 전개된 유사한 개혁 조치들에 힘입어 198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은 민간기업들에 대한 자유화 조치들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개혁을 감행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많은 아시아 및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했으며, 이로써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 베트남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 한국은 남베트남과, 북한은 북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은 그 후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해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남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1964년 9월 의무중대 파견 이래 맹호·청룡 등 한국 전투사단이 파견돼 한때 남베트남 파견 한국군 장병수가 4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1973년 파리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모두 철수했다.
남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인 1975년 4월 29일 폐쇄됐고 미처 철수하지 못했던 일부 공관원들과 교민들은 1976~80년에 걸쳐 한국으로 송환됐다. 그 밖에도 베트남 전쟁 특수를 타고 한국 기업의 진출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으며 남베트남 파견 한국인 문제와 국제결혼으로 인한 한국인·남베트남인의 혼혈아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지고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후 북한은 이전 북베트남 시절에 맺었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베트남 통일 후 17년 만인 1992년 12월 22일 수교에 합의했다. 한국에는 남베트남 패망 후 공산 베트남에서 탈출한 선상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 부산에 설치돼 있었으나 폐쇄됐다.
2000년 이후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2003년 판반카이 총리가 방한하고, 2005년에는 이해찬 총리가 베트남에 방문하는 등 본격적인 교류가 진행됐다. 2009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문하면서 FTA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2014년 한국-베트남 FTA가 실질적으로 타결되고 2015년 한국-베트남 FTA가 발효되면서 무역관계도 강화됐다. 2017년 한국-베트남 수교가 25주년을 맞이하면서 11월 11일 호치민시에서 호치민-경주 세계문화엑스포가 개최됐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1992년 한국-베트남 국교수립 이후 양국 간 교역 규모는 90배 이상 성장해 2016년에는 470억 불을 달성했다. 2017년 기준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 다음으로 한국의 3위 수출대상국이자 제1위 아세안 교역 대상국이다. 수요 수출품은 원자재와 자본재로 그 비중이 월등히 높고, 전자, 섬유, 봉제 관련 품목이 그 뒤를 잇는다. 2023년 기준 한국의 대베트남 수출액은 492억 6,473만 달러이며, 대베트남 수입액은 199억 4,349만 달러이다.
2014년 한국-베트남 FTA 협상 실질타결을 공동 선언해 2015년 한국-베트남 FTA가 발효됐다. 이 밖에도 정부간 경제 및 기술 협력에 관한 협정(1993), 직업 훈련사업의 시행에 관한 약정(1994), 과학 및 기술 협력에 관한 협정(1995), 원자력 협정(1996), 외교관 관용여권 비자 면제 협정(1998), 관광분야 협력에 관한 협정(2002), 투자 증진 및 보호에 관한 협정(2003), 교육협력 약정(2005), 한베 원자력 개발 협력 약정(2006), 항공협정 개정을 위한 교환 각서(2008), 관광협력에 관한 양해각서(2010), 교육협력 양해각서(2015) 등이 체결돼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한국-베트남 친선협회, 한국-베트남 재단, 한국-베트남 문화교류센터, 한아세안센터 등을 통해 양국간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2023년 기준 베트남에는 175,652명의 재외동포가 있다. 한국에는 2023년 기준 201,224명의 베트남 국적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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