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안동 병산서원 매화 (2024.04.06.)
안동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제향하는 곳이자
한국 전통건축의 진수로 꼽히는 명품 공간이다
그래서 2019년에 전국의 서원 8곳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21년 초에는 강학공간인 만대루가 보물로 지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서애 선생을 추모하고 인간의 도리를 공부하는
그 선비의 공간 중심에 백매와 홍매 한 쌍의 매화나무가
강당마당에 좌우로 자리잡고 있다
유생들이 숙식하며 공부했던
동재 앞에는 <병산 홍매>가, 서재 앞에는 <병산 백매>가 1그루씩 있어서
각각 선비의 벗이자 지표가 되었다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 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매화만이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영광된 자리일 것이다
진입하는 방향에서 보면 좌측에 있는 <병산 홍매>의 수령은
약 110년생 정도로 알려져 있고 <병산 백매>와 비슷하다
나무 높이는 2.5m로서 <병산 백매>보다 <병산 홍매>가 조금 더 크고
수세도 풍성하다
꽃은 연한 분홍 빛인데 활짝 피면 백색에 가까워진다
매화의 개화시기는
항상 <병산 백매>가 <병산 홍매>보다 약 10일 정도 일찍 피고
홍매가 피기 시작하면 언제나 백매는 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병산 백매>와 <병산 홍매>의 개화를 동시에 감상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2024년 4월 6일(토) 현재,
<병산 홍매>와 <병산 백매>는 만개 후에
모두 졌다
안동 낙동강변의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서원으로
서원 앞에, 모양이 꼭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屛山으로 불리는 산이 있어
그 이름을 따왔고, 임금으로 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서애 선생 생전에, 시내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에
지금의 병산으로 옮겨 병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후, 1607년 서애 선생이 돌아가시자,
정경세를 비롯한 지방 유림들이 서애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서애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614년에 병산서원으로 이름을 고쳤고,
1863년 철종으로부터 병산서원 편액을 하사 받았다
병산서원 전면에 있는 만대루晩對樓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유생들의 휴식과 강학의 공간이다
병산서원 안에 있는 입교당立敎堂은 강당으로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로서 병산서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 등이
병산서원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선비의 중심 공간인 강당마당의 좌우로
동재 앞에는 홍매화가, 서재 앞에는 백매화가 1그루씩 자리잡고 있어
각각 선비의 표상이 되었다
<병산 홍매>
<병산 백매>
서애 류성룡과 병산서원
서애의 근본은 성리학자다.
관직 생활 틈틈이 고향의 풍악서당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하회마을에 원지정사를,
건너편 부용대에 옥연정사를 지어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서애가 죽은 후에 제자들은 풍악서당을 중건하고 위패를 모셔,
1614년에 병산서원을 창건하게 된다.
오랜 관직생활 때문에 서애의 제자는 많지 않다.
또한 도산서원에 비하면 건축적 규모도 작고 정치적 위상도 높지 않았다.
창건 후 250년이 지난 1863년에야 비로소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병산서원은 서원건축의 백미이며
현대 건축가들이 최고의 한국 전통건축으로 꼽는 명작이다.
넓은 백사장에 흐르는 낙동강변,
앞으로 병풍같이 펼쳐진 병산을 바라보며 서원은 자리잡았다. 밖
에서 보면 7칸의 기다란 누각, 만대루가 가로막아
서원 전체 모습을 알 수 없게 방해한다.
이 누각은 서원의 여러 모임을 열었던 곳으로,
위아래층이 모두 텅 비어 있다.
서원의 전모를 보려면 안으로 들어가 강당인 입교당 대청 중앙에 앉아
밖을 내다보아야 한다.
텅 빈 만대루를 통해 낙동강의 흐름이 들어오고
누각 지붕 위로는 병산이 펼쳐진다.
누각 아래로는 입구가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알 수 있다.
만대루의 존재는 자연경관을 산·강·사람의 수직적인 천지인 경관으로 나눈다.
성리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태도이며
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는 서원의 주인인 원장이 앉는 바로 그 자리다.
주인이 보는 이 장면이 바로 서원의 정면이다.
만대루에 오르면 더욱 감탄할 경관을 대하게 된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과 앞산이 어우러진 풍경을
누각의 기둥들이 수평으로 나누고 연결시킨다.
그야말로 7폭의 자연 병풍을 만든 것이다.
자연을 선택해 인공적 환경으로 치환시키는 이러한 수법을 ‘차경’이라 한다.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차경 수법은 한국의 대표적인 조경법이었다.
건축물은 자연을 그림으로 담는 액자 역할을 한다.
액자가 크고 화려하면 그림이 죽는다.
만대루는 기둥과 지붕밖에 없는 매우 간단한 건물이며,
화려한 단청도 장식도 일절 없다.
건물은 자연을, 학문을,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며,
그 내용물이 건축의 실체다.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으로 서원을 건축했다.
존현과 천일합일, 서원건축의 의미
퇴계는 서원운동의 개척자요 주창자였다.
한국 최초의 서원은 알려진 대로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1550년 후임 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서원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국가적 차원의 교육기관으로 승격시켰다.
임금이 서원의 간판을 하사하는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어
소수서원으로 이름도 바꾸었다.
전국적인 서원 건립이 촉발되어 전성기에는
700여개에 달하는 서원이 운영됐다.
서원의 목표는 성리학의 전사를 양성하여 이상사회를 여는 것이었다.
핵심 교육방법은
선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존현’이었다.
그래서 서원 건축은 선현 제사를 위한 사당과,
강학을 위한 강당으로 구성된다.
퇴계가 정착시킨 시스템이며 도산서원은 그 완전한 모범이다.
성리학적 진리의 시작과 끝은 결국 자연이기에,
자연과 일체가 되는 ‘천일합일’의 경지가 수양의 목표가 된다.
서애는 생전에 하회에 원지정사를 지어 병산서원의 원형을 보여 주었다.
학문을 닦는 서재 옆에 텅 빈 작은 누각을 두었다.
징비록을 저술한 옥연정사는 강과 산의 자연 속에 파묻힌 서실이다.
서애는 자연을 떠난 학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그 결정판을 병산서원에서 완성했다.
서원은 존현을 통해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되고, 천인합일을 통해
자연과 일체화하는 수양의 장소였다.
(글출처 - 김봉렬 :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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