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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매화 기행

매화-2024-039. 안동 도산서원 매화 (2024.04.06.)

 

 

 

 

 

 

 

 

 

 

039.  안동 도산서원 매화 (2024.04.06.)

 

 

안동의 도산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체계를 구축한 최고의 학자로 존중받는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 선생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선생은 평소에 매화를 끔직히 사랑하여

백 여편의 매화시를 남겼고

매화를 형이라 부르며 평생의 동반자이자 절친한 친구로 삼았고

 손수 매화를 가꾸는 절우사가 서원에 따로 있었다

유명한 <도산매>도 서원에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오래전에 고사하여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원래 선생이 애지중지한 <도산매>는

순백 색의 흰꽃이 피고 꽃받침이 청색인 청매 계통이었다는데

후학들이 심어 놓은 지금 서원의 매화들은

70년생 내외의 백매들이 대부분이고

홍매는 전혀 없다

 

4월 첫째 주말의 도산서원의 매화들은

50% 정도는 만개 후에 이미 졌지만

나머지 50% 정도는 뒤늦게 찾아온 손님들을 위하여 

저물어 가는 '도산서원의 봄'을 끝까지 밝히고 있다

 

 

 

 

 

 

 

 

 

 

 

 

 

 

 

 

 

 

 

 

 

 

 

 

 

 

 

 

 

 

 

 

 

 

 

 

 

 

 

도산서당

 

 

 

 

 

 

 

도산서원의 도산서당

 

 

도산서원의 도산서당은

퇴계사상의 핵심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총 14동이나 되는 도산서원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건물은 퇴계가 직접 지은 도산서당이다.

그는 잠깐 성균관대사성 등의 관직에 있었으나, 정치보다는 학문과 수양에 뜻이 있어서

20여 차례 관직 사퇴와 거절을 되풀이할 정도였다.

 

고향에 내려와 환갑 무렵에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지었다.

퇴계는 말년까지 이곳에 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다.

도산서당은 퇴계사상의 핵심인 깨어 있음, 한적함, 실용적 실천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집이다.

이 집은 퇴계가 직접 설계도까지 그렸다고 전한다.

 

그 설계도는 없지만 설계 개념과 내용을

공사담당자에게 설명한 편지가 남아 있다.

그는 “군자의 집은 3칸이면 족하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거하는 방 한 칸, 제자를 지도하는 마루 한 칸, 그리고 불을 때는 부엌 한 칸.

이 최소한의 건축은 몸과 마음을 깨어 있게 한다.

 

그러나 도산서당은 실제로 3칸이 아니다.

부엌은 반 칸을 늘렸고 마루는 아예 한 칸을 더 확장했다.

결국 4.5칸이지만 퇴계는 3칸의 제도를 따랐다고 주장한다.

확장부의 지붕은 한 단 낮게 붙인 눈썹지붕이고 마루도 듬성한 줄마루를 깔았다.

정식 건물이 아니라는 강력한 차별이다.

 

즉 본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확장하고 변형한다는 실용적인 실천이며,

원칙에만 집착하지 않는 한적한 여유다.

   [글출처 - 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절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