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한림면 모정마을 해은정 및 모정비각
작약산 아래 모정마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대조 되는 김해 입향조 해은 노한석 선생의
유허비('贈吏曹判書海隱先生盧公諱漢錫遺墟')가 있는
모정비각과 해은정 재실이 소재하는 곳이다.
해은(海隱) 노한석<盧漢錫, 1662~1702>선생은
조선 인조~숙종조의 사림 선비로
낙동강과 화포천이 합류하는 강가에 초옥 모정(茅亭:慕禎)을 짓고
강태공처럼 낚시하며 살았다 한다.
모정마을은 해은 노한석 선생이 살았으므로
역사적으로 노무현의 근저 뿌리가 되는 마을이기도 하다.
1960~1970년대까지는 130여 세대였으나 산업사회의 이농현상으로
현재는 80여 세대가 거주한다.
모정 비각과 해은정 (조윤희 시인)
- 창원특례신문기자 배성근 입력 2023.01.21.
해의 날개 자락이 드리운
비탈진 언덕 쪽에는
하늘을 담고 구름으로 채워
흐르는 세월 유유히 그려낸
화포천의 물길 바라보고 선 채로
속살 드러낸
큰 배롱나무들이
겨울을 안고 섰다
마을을 지킨다는 당산나무 아래는
연꽃 단청 단장한 모정비각과
해은정의 모습이
잊힌 세인들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찬 바람만 오가는
낙동강 마을 한쪽 하늘은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지나간다
배롱꽃 가득 찰 어느 날을
꽃 꿈꾸며
겨울이 흐른다
- 시인 조윤희
해은정(海隱亭)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당한 굴욕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낙향한
광주노씨 해은 노한석 공이 은거하면서 세운 정자이다
해은정 입구에 자리잡은 모정 비각은
1909년에 세워진 노한석 공의 유허비로,
용과 연꽃 단청으로 장식된 모정마을의 비각이다
모정마을의 유래는
금관가야 2대 거등왕과 혼인하기 위해
왕비가 배를 타고 와서 내린 지역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 왕비의 이름을 따서 모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조 때 증이조판서를 지낸 해은 노한석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마다하고 모정마을로 옮겨와 살면서
마을에 정자를 짓고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기린다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모정이라고 했다고도 전해진다.
모정마을이 있는 한림면 금곡리는
광주 노씨의 4백년 세 거지 이기도 하다.
글출처 - 창원특례신문 (cwtr.co.kr)
화포천습지는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상류 쪽에서부터 첫 번째가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화포교까지이고
두 번째는 화포교에서 장재교까지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장재교에서 한림배수장을 지나 낙동강과 합류하는
모정마을까지다.
이들 세 구간은 저마다 특징이 뚜렷하다.
첫 구간은 모두 농사를 짓지 않은 채로 '화포천습지생태공원'으로
공식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는 덕분에 습지다운 경관이 제대로 보전되고 있다.
둘째 구간은 우리 모두가 습지에 무지하던 시절 쓰레기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운동장으로 탈바꿈한 데도 있고
사람이 들어가 농사를 짓는 데도 곳곳에 있지만 습지 경관은 그럭저럭 여전하다.
세 번째 구간에서는 화포천이 다시 좁아지는데
2006년 낙동강 합류 지점에 있는 양·배수장 능력을 높이는 공사를 할 때
이른바 ‘하상 정비’를 하는 바람에 습지 경관을 많이 잃었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화포천습지생태공원 하류에서 흔히 보는 풍경.
군데군데 하우스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 끝머리에 들어서면 풍경이 삭막하다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런 느낌을 허물어줄 반전을 화포천은 두 개 숨겨 놓고 있다.
하나는 배수장 너머에서 낙동강과 화포천이 몸을 섞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물결은 풍성하고 수풀은 윤택하며 느낌은 고즈넉하다.
건너편 내달리는 산들도 강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세상을 벗어나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복잡한 머리 헹구며
한참 동안 앉아 있어도 좋은 자리다.
다른 하나는 모정비각(慕禎碑閣) 근처다.
화포천에 붙어선 낭떠러지에 놓여 있는데 배롱나무와 푸조나무쯤으로 짐작되는
높이 자란 나무들이 멋지다.
비각 안 빗돌에는 '贈吏曺判書海隱盧公之遺墟'(증이조판서해은노공지유허)라 적혀 있다.
여기 적힌 대로라면 주인공은 호가 '해은'인 노씨 집안 사람으로
세상을 떠난 뒤 이조판서 벼슬을 받았다.
따로 찾아봤더니 이름은 한석(漢錫)으로
광주 노씨 김해 입향조(入鄕祖=고장에 가장 먼저 들어와 살았던 조상)라고 한다.
병자호란(1636년)이 지난 어느 해에 창녕에서 낙동강을 건너 여기로 옮겨오면서
마을 이름을 모정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보통 ‘모정’이라 하면 볏짚 같은 풀로 지붕을 이은 띠집(茅亭)을 이르지만
여기 모정은 다르다.
우러러 받들 모(慕)를 앞에 쓰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를 뜻하는
정(禎)을 뒤에 쓴다.
지금이야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로 여겨도 그만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잘라 말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맞아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의주까지 달아났던 임금 선조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그 바람에 힘이 빠지면서 청나라가 만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일으킬 수 있게 만든 측면도 있었다.
신흥 청나라는 조선을 두 차례 쳐들어왔다.
지는 해 명나라를 버리고 뜨는 해 청나라를 따랐다면
당하지 않았을 침략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묘호란(1627)을 겪고서는 청나라를 형으로 섬겨야 했으며
병자호란을 치른 다음에는 형이 아니라 군주(君主)로 떠받들어야 했다.
청나라는 이렇게 조선을 확실하게 무릎 꿇린 다음
명나라 정벌에 본격 들어갔고,
명나라는 결국 1644년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멸망했다.
이런 국면에서도 조선의 선비들은
청나라가 아니라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마음만은 그러했다.
이런 인식이 여기 마을 이름을 모정으로 삼도록 만들었다.
지금 보기에는 어쩌면 우스꽝스럽고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거기 스며들어 있는 절절함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에 빠진 조선은 건져내었지만 정작 자기자신은 기진맥진하여
맥없이 떠내려가는 명나라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모정마을 일대에 자리 잡은 광주 노씨 집안은
20세기 중반에 봉하마을에서 노무현을 낳았다.
노무현은 2003년부터 5년 동안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뒤
2008년 2월 25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퇴임한 뒤 고향에서 살아가는 대통령을
처음 얻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달아났고 박정희는 현직에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이명박은 임기를 마친 뒤
계속 서울에서 살았다.
반쪽짜리인 윤보선·최규하와 현직에서 탄핵당한 박근혜는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주민들과 환경운동에 나섰다.
농약과 쓰레기로 숨통이 막힌 화포천을 되살리고
봉하 들녘 논·밭을 친환경농업으로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퇴임 첫 해 봉하 들녘에 농약 대신 오리를 집어넣는 농사로
가을에 2만4600평 논에서 쌀 55t을 거둘 수 있었다.
오리농법으로 지은 봉하쌀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덕분에 봉하 들녘의 친환경농업은 계속 면적을 넓힐 수 있었다.
친환경농업은 생태연못·무논과 더불어 봉하 들녘을 생물다양성을 갖춘
습지로 재탄생시켰다.
미꾸라지·드렁허리 같은 물고기와 논고동, 여러 벌레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먹을거리가 풍성해지니까 철새들도 더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글출처: https://100in.tistory.com/3608
[김주완 김훤주 지역에서 본 세상:티스토리]
'■ 전통건축 갤러리 ■ > 경 남 . 부 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청 대원사 (2024. 03.) (1) | 2024.03.23 |
---|---|
산청 전 구형왕릉 (2024. 03.) (1) | 2024.03.22 |
고성 학동마을 옛담장 및 최필간고택 - 2 (2023.11.25.) (1) | 2023.11.28 |
경남 고성 상족암 -2 (2023.11.25.) (5) | 2023.11.27 |
하동 옥종면 모한재 및 은행나무 (1) | 2023.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