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1. 개요
Überhaupt Freunde gehabt hätte, wäre ich bestimmt einer seiner engen Freunde gewesen.
만약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것이 있었다면, 분명히 나는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회고록《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2. 생애
베를린 기술대학의 유명한 건축가인 하인리히 테세노(Heinrich Tessenow)의 문하에서 최종적으로 학위를 따고 22살의 나이로 그의 조수로 일했다. 원래는 역시 유명 건축가였던 한스 푈치히(Hans Poelzig)의 조수를 지망했었지만, 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푈치히의 경우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건축가였지만, 테세노는 그와 정 반대되는 고전주의 건축가였다. 자신의 건축 세계를 순식간에 정 반대로 바꿔버린 것. 그래도 테세노 밑에서 슈페어는 진심으로 열심히 일했고, 테세노 대신 강의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건축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딜레탕트였던 히틀러의 호감을 사서 심지어는 매일 히틀러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고 한다. 슈페어는 나치당 주임 건축가, 건축부 수장, 제국수도 총 건축 감독관 겸 제국의회 의원의 직위를 차지했다. 뉘른베르크에 위치한 나치의 전당대회 장소였던 체펠린 비행장(Zeppelinfeld)에 페르가몬 대제단을 모델로 삼은 연단(Zeppelin tribune) 그리고 1936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경기장 등을 건설하였다. 또한 1937 파리 엑스포에서 독일 파빌리온으로 황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나치의 새로운 전당대회 장소로 쓰일 나치 전당대회장을 설계하고 감독했다.
후술하겠지만 슈페어는 제3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경우 그에 어울리는 수도인 게르마니아의 도시 계획을 히틀러와 함께 마련했으며, 국제적으로 높아진 명성으로 인해 심지어는 스탈린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재건설하는 작업을 위탁받기도 하였다. 이는 모스크바가 베를린을 능가하는 위엄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을 우려한 히틀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 이후 파리를 방문했을 때에도 슈페어와 함께했는데,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파리를 방문한 히틀러는 "평생 꼭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 파리였다."며, "파리를 파괴할까 싶기도 했지만 게르마니아가 완성되면 파리보다도 더 위대한 도시가 될 테니 굳이 파리를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슈페어에게 말했다고 한다.
신(新) 총통 청사
그의 경력에 쐐기를 박은 작품이라면 1939년에 리모델링된 히틀러의 신(新) 총통 청사(Neue Reichskanzlei) 공사를 들 수 있다. 이 때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가 청중들에게 연설할 수 있도록 발코니를 추가했는데 이에 히틀러는 크게 만족했으며, 나치당에서 승승장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이 건물을 통해 총 한방 쏘지 않고 같은 해 3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 삼킬 수 있었다. 총통관저는 긴 면에 출입구를 두는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건물의 좁은 측면에서 진입하게 만들어져 긴 복도를 가지게 되었고, 기능적으로는 별 쓸모가 없던 건물이지만,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나치의 정체성에 아주 잘 부합하는 건물이었다. 당시 독일의 군사적인 힘에 대해 부담을 느끼던 에밀 하하 체코 대통령은 히틀러와 담판을 짓기 위해 독일로 찾아왔는데, 그렇지 않아도 심장이 약했던 그는 마치 무기와 같이 위압적인 총통관저의 400m가 넘는 복도를 지나고 나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리고 굴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한다.
2.1. 군수부 장관
당시 독일의 전시경제는 관련 기관과 권력이 분산된 채로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당료의 과도한 개입과 겹쳐서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슈페어는 군수부 장관이 된 후 히틀러의 지속적인 신임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독일 군수 체계에 남아 있던 여러 가지 비효율적인 관행을 뿌리 뽑아서 생산성을 높이 끌어올렸다.
다만 이런 관리의 천재에게도 현실의 어려움은 타개하기 어려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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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페어의 전시 생산 관리 능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채승병의 블로그에서는 나치 독일의 전시경제 생산성 향상은 1930년대부터 투자되었던 대규모 생산 시설들의 완공이 슈페어의 취임 시기와 맞물리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독일 경제의 군수품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는 계획안은 이미 전임자인 토트가 완성시키고 있었고, 슈페어는 단지 그걸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군수부 장관을 맡기 전에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 때도 슈페어는 그 능력으로 호평을 받고 있었고, 슈페어가 변덕스러운 독재자인 히틀러의 지속적인 호감과 신임을 얻음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난맥상인 독일 전시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효율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슈페어의 능력은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주동자 등 여러 반(反) 나치 인사들이 대단한 군수품 생산 관리 능력을 이유로 나치 척결 뒤 예비 내각의 일원(!)에 슈페어를 포섭하려고 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암살 계획은 발각 되었지만, 슈페어는 "아직 포섭이 필요하다."는 말이 붙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결국 1943년에 이르러 독일 경제가 생산하는 군수품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슈페어는 자연스럽게 히틀러의 후계자 후보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치 권력의 상층부에 있던 괴링, 마르틴 보어만, 힘러와 대립하게 되었다.[7] 이들은 1944년 슈페어가 와병하면서 그가 가진 행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했고, 결국 그들의 음모에 질린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군수 장관과 건축 책임자의 자리를 사임하겠다고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군 원수 밀히를 필두로 하는 군수 관련 인사들의 청원 덕분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어서 관련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의 무기 생산량은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심화된 1944년 후반기에 되어서야 감소세로 돌아선다. 다만 슈페어의 회고록에서 전략폭격은 상당히 평가 절하된다. 그에 따르면,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1943년까진 부정확하고 체계 없이 이뤄져서 별다른 타격을 못 입혔으며, 1944년에 가서야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폭격이 이뤄지긴 했지만 효율적인 타격은 아니어서 "독일의 패망을 몇 달 미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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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로 악명 높은 슈바인푸르트 공습 작전이 있다. 독일 전시 생산의 속도를 결정하는 병목 공정은 볼베어링 공장이었는데, 슈페어는 연합국의 폭격이 완파 전에 중단되어서 치명적이진 않았으며, 생산량이 38% 떨어진 정도에서 폭격이 그친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고 술회했다. 물론 히틀러는 피해가 이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다. 또한 루르 지방의 수력 발전 댐과 라인강 철교를 폭파시키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각각 파괴되었으면 전력과 공업 용수, 프랑스 지역의 독일군 병참선이 붕괴했을 것이란 것이다.
슈페어는 독일의 군수공업의 아킬레스건은 무기의 재료로 쓰는 합금강 생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희귀금속이었다고 밝힌다. 결정적인 것은 1944년 말이었다. 무엇보다 튀르키예에서 수입하는 크로뮴이 6개월치 이하로 바닥나면서, 발칸반도가 소련에 넘어간 1945년 부터는 무슨 수를 써도 파국을 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2.2. 패전의 직전
1945년 3월 20일과 24일, 알텐키르헨의 B집단군 사령부에서 루르의 산업 시설에 대한 네로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 회의 중인 모습. 왼쪽부터 귄터 라이히헬름, 한스 크렙스 OKH 작전 참모차장, 알베르트 슈페어, 폰 블로트니츠 대령, 발터 모델 원수, 빈리히 베어.
1945년 4월 22일, 베를린이 포위되고 히틀러가 총통 벙커에 틀어박혔을 때 슈페어는 마지막으로 그를 방문한다. 이후 히틀러에게 베를린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소련군의 폭격에 거의 반파된 그의 역작 총통 관저를 잠시 둘러 본 다음 함부르크로 떠났다. 이후 그는 함부르크 방송국에서 사회간접자본파괴를 금지하는 방송을 송출한다.
29일, 히틀러가 자살한 후 슈페어는 후계자로 자신이 지명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히틀러는 유언에서 슈페어를 정부 각료에서 배제하고 대신 차관이었던 카를 오토 자우어를 새로운 군수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독일 대통령으로 지명된 크릭스마리네의 수장 카를 되니츠 독일 해군 원수는 이 유언을 무시하고 군수부를 없앤 후 이를 대신한 산업생산부를 신설하고 슈페어를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산업생산부 장관으로 앉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기간 동안 슈페어와 되니츠 제독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되니츠 제독이 유보트 생산에 자원을 우선 분배해달라 요청한 것을 슈페어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며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
슈페어는 5월 10일부터 영국군에 의해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해산되는 23일까지 연합군과 내통해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슈페어는 군수부 차관인 자우어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 기업들에게 배치된 외국인 노동자들의 동원 실상에 대해서 증언해주고 기소를 면제받거나 형량 축소를 하는 타협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덕분에 독일의 대기업들은 경제 부흥 시기에 국부가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차단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독일 대기업들이 외국인 강제노동에 혈안이었다고 솔직히 말하고 기소 중지된 자우어가 전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반면에 슈페어 일가가 평온한 시간을 보낸 것은 슈페어가 독일 기업들의 전쟁범죄 혐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뒤집어 쓴 사연 덕분이었다.
이 판결은 현대에도 논란이 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검사단에게 유리한 진술을 적극적으로 행함으로써 얻어낸 사법거래였기 때문이다. 형량 감경을 위해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미국 / 영국 / 프랑스 판사들이 10년형 정도를 검토했으나 소련이 강력히 반대했기에 20년 형을 다 살아야 했다. 연합군의 감형에는 유명 인사들이 슈페어의 재능을 높게 사서 슈페어 사면 청원 운동을 벌였던 탓도 큰데, 사면 운동에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 심지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검사팀 중 한 명이었던 하틀리 셔크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슈페어와 비슷한 혐의를 받은 프리츠 자우켈은 사형을 판결받았으며, 이 때문에 자우켈은 집행 직전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형량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슈페어와 마찬가지로 회개한 데다가 자신의 전쟁 기록까지 모두 연합군에게 넘긴 한스 프랑크 역시 사형을 당했다. 게다가 판결 이후 슈페어가 자신이 몰랐다고 침묵으로 일관한 유대인 학대에 가담한 사실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난 문건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복역 기간 중 슈페어는 회고록을 집필하였고, 이는 1966년에 출옥한 후 간행되어 나치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1차 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에도《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이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어서 출간되었다. 현재는《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슈페어는 유대인 학살을 "몰랐지만 참회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공공연했던 나치 치하의 유대인 학대 문제는 다른 모든 외국인 강제노동 동원에 묻어가는 식으로 돌려서 진술했다. 그러나 후에 A급 전범에 대한 1차 재판이 끝난 후 개최된 종범 재판들에서 추가 공개된 증거들에 의해 슈페어 역시 알면서도 묵인했거나 참여했음이 입증되었다. 끝내 슈페어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친밀한 고위 당직자들의 암시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조금만 주의 깊게 나치 체제를 관찰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문제였다."며 자서전을 빌려 인정했다. 한편 대놓고 행해지던 유대인 학대는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고 적었다. 유대인 학대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기재한 구(舊) 제3제국 관련 인사 모두의 자서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나치 인사들이 안 적었다.
슈페어가 출소 후 슈페어의 친형은 자신의 친필 편지를 통해 그가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유대인? 그들은 이집트에서도 200년 간 벽돌을 굽지 않았는가?"라고 말한 걸 기억한다며 반박했다. 중요한 대목이나 구체적인 증거에 대해서 "기억이 안 난다.", "모두 히틀러의 지시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다른 전범들에게 "엄청난 월급을 받는 편지 배달부들!"이라고 일갈했지만,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회고록에서는 마르틴 보어만과 같은 정적에 대한 공격과 슈페어 자신이 개인적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변호하는 내용이 상당하다. 슈페어 회고록의 변호성 기록의 한 예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부인 마그다 괴벨스의 죽음이 있다. 슈페어의 자서전에는 그녀가 남편의 강요로 인하여 아이들과 자살한 것으로 그렸지만, 사실은 정 반대였다.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였던 그녀의 행보와, 유일하게 밖에 있던 루프트바페에 입대했다 연합군에 포로로 잡혀 있어 괴벨스 일가에서 홀로 생존한 의붓아들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 공군 중위에게 보낸 편지, 괴벨스가 마그다 괴벨스에게 아이들과 베를린에서 비행기로 탈출하라고 설득했다는 괴벨스 부관의 증언으로 인하여 부정되었다.
슈페어 스스로도 군수 장관 등용 전에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적 건축에 일조하면서 독일의 산업 능력을 까먹는 데 충분히 일조했으며, 권력에 초연하던 모습도 입각 뒤로는 사라졌다는 것이 여러 인사들의 증언을 합한 중론이다. 스스로는 "권력 투쟁에 희생될 뻔 했다."고 썼지만, 실상은 마르틴 보어만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괴벨스, 괴링과 3인 동맹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에는 많은 관심을 끈 나치의 핵개발 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실무자들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고 최대한의 자원이 투입된다 하더라도 어렵다."고 보고했으며, 자신 역시 "나치의 전황과 기술력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그래서 우라늄 비축량 700톤을 해군 원자력 잠수함 배터리 개발 계획에 사용하라고 남김없이 방출했다고 밝혔다. 한편 V1, V2 미사일 개발과 생산에 대해서 연합국의 전략폭격은 수지가 남지 않는 밑지는 장사였다고 평가절하했다.
한편 회고록에서 슈페어는 "독가스를 이용해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게 사실이었다면, 이런 어설픈 알베르트 슈페어의 히틀러 암살 계획은 모든 암살 계획 중 마지막 암살 계획이었다. 슈페어는 해당 암살 계획의 위험성에 대해서 "패전으로 상황이 갈 때까지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SS 경계병들이 독가스를 주입할 만한 곳을 지키고 있었고, 원래는 낮던 굴뚝도 상당히 높게 개조되었기에 사실상 슈페어의 허풍으로 평가된다.
일설에는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변호사의 권유와 검사단의 진술 요구에 응해 암살 계획을 털어놓아 옥살이한 20년 내내 전 나치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소문에 불과하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왕따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인 출신 다른 전범들과 달리 나치 정권을 비판하는 개과천선 흉내를 내며, 연합군 당국의 입맛에 맞게 전략폭격과 나치시대 군수 생산 정책에 대해 매우 협조적으로 진술하는 바람에 혼자 살고 싶어서 안달난 배신자로 매도된 것이지, 암살과는 전혀 관련 없다.
도리어 슈페어는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 중 루돌프 헤스, 되니츠 제독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원래부터 슈페어와 비교적 친한 편이었고, 그 중 가장 친했던 발두어 폰 시라흐를 제외한 전원이 1954년 ~ 1957년 사이에 출감했다. 결국 슈페어는 감옥에서 왕따를 당할 수 없었다.
이런 일들 덕분에 슈페어에 대한 평가도 둘로 갈린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나치 또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진실은 본인만 알겠지만 당시의 나치 독일 관료 및 군 지휘관 다수를 떠올려보면 완벽히 어느 한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1975년, 영국의 방송사 Thames Television과 인터뷰하는 말년의 슈페어. 슈페어는 영어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1981년 9월, 영국의 BBC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한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고, 그의 유해는 하이델베르크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아내 마르가레테 베버(Margarete Weber) 사이에서 슬하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 힐데 슈람(Hilde Schramm)은 독일 녹색당의 정치인이 되었으며, 장남 알베르트 프리드리히 슈페어(Albert Friedrich Speer)는 아버지를 따라 건축가가 되었다. 차녀 마르그레트 니센(Margret Nissen)은 사진작가가 되었으며 차남 아르놀트 슈페어(Arnold Speer)는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3. 건축가로서
현재 베를린 경기장은 리모델링만 되어 베를린에 남은 나치 시대 유적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
또한 체펠린 비행장도 나치 조형들이 파괴된 뒤 일부 부분이 철거된 채 계속 남아 현재 독일 국민들의 휴양처로 이용되고 있다.
군수 장관으로서의 슈페어는 (부풀려졌다고 할지라도) 꽤 쓸만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본업인 건축가로서의 평가는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다. 건축가로서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감각은 있었지만, 구시대적인 고전주의 건축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시대를 읽지 못한 건축가였으며, 사실 그 점이 히틀러의 취향에 맞았다. 히틀러는 과거 화가 지망생 시절부터 고전주의적 예술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현대주의 미술이 도입되고 있던 미술계에 안착하지 못한 인물이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동병상련에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사실 슈페어의 학생 시절 일화나 설계된 건물들의 세부를 보면 슈페어 역시 현대적인 건축물로의 흐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줏대를 권력 때문에 버렸다. 그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조차 히틀러에게 공사를 받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슈페어 정도로 자기의 건축 철학을 버리면서까지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슈페어의 건축물은 철저하게 히틀러의 스케치와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을 뿐이다.
또한 슈페어의 건물은 오로지 사람을 압도하는 기능만을 중요시 한 것이 대부분으로,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건물들이 아니었다. 슈페어와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제3제국의 수도 게르마니아와 그 중심의 거대한 돔 국민 대회의장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무리한 것이었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기획이 그 당시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주장했지만...
건물은 크게 15만 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290m짜리 돔 구조물 국민 대회의장과 120m의 개선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선문은 평양 개선문(60m, 세계 최대의 개선문)의 2배이며, 판테온을 모델로 한 국민 회관의 돔은 2013년까지만 해도 세계 최대의 돔이었던 AT&T 스타디움(275m)보다도 더 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17배나 큰 규모였으며 돔 상부에 있는 채광탑의 지름(46m)은 석재 돔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지름보다 약간 더 컸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실용성보다 그 존재만으로 사람을 압도시키는 기능을 중요시했던 히틀러의 구시대적 취향을 설명해놓았다. 그러면서도 나치 패망 이후 건물 크기나 높이가 건물의 가치나 사람에 끼치는 위엄에 대해선 별 상관이 없었는데 뒤늦게 깨달았다며, 특히 국민회관의 경우 "다시 보아도 전혀 정상적인 계획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며 "자신이 보는 눈이 없었다."고 자책했다. 다만 이 자책도 어느 정도는 정치적인 것이, 나치의 건축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만나는 자리마다 신나게 자신의 건축물을 설명했다고.
히틀러와 슈페어는 건물을 최대한 웅장하게 보이게 원했으며, 수천년이 지나 건물이 파괴되더라도 웅장한 흔적이 남을 것을 신경썼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와 같은 자신의 건축 철학을 폐허 가치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 시대의 사람들이 역사에서 퇴장한 후에도 당시 시대에 남은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존재를 알려야 된다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과 고대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처럼. 웃긴 것은 당시 나치당 간부들이 이것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가 "위대한 독일 제국이 폐허가 되어 갈 때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였다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에 온 히틀러는 이 앞에서 슈페어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히틀러는 소싯적에 파리에서 좀 있어서 파리를 돌아다니며 측근들에게 파리 여기저기를 설명해주기 좋아했다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2. [지구촌-e메일 인터뷰] 독일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환경·생태 고려한 미래형 도시 설계 필요'
그는 아버지를 빼닮았다. 이름도 직업도 재능도 아버지 것을 다 물려받았다. 두 사람 사진을 흩어 놓으면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푸른 눈에 회색빛 머리카락… 얼굴 형태까지 너무 닮았다. 독일 건축의 자존심인 알베르트 슈페어(73·Albert Speer)를 '접속 지구촌 e메일 인터뷰'에 초청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솔직히 그보다 그의 아버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부친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아끼던 인물이었다. 제3제국(독일제국) 설계자로 종전 때까지 나치 군수장관을 지냈다. 결국 나치 패망과 함께 전범재판에서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66년 만기 출소한 뒤 1981년 뇌출혈로 숨졌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세상의 관심을 받은 이유는 히틀러의 최측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괴링과 히믈러 등과 달리 나치 장관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했다는 사실이 더 큰 관심을 모았고 그의 '뛰어난' 건축이 그를 못 잊게 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런 아버지의 개인사를 지켜보면서 자랐다. 전쟁범죄자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대목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질문은 그의 이름에서 시작됐다.
"우리 집안은 장남이 아버지 이름을 이어받는 전통이 있습니다. 저와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알베르트 프리드리히 슈페어)도 같은 이름을 썼죠." 할아버지도 당대 유명한 건축가였다. 물론 그의 건축 가계는 더 길었다. 증조 할아버지인 베르톨드 슈페어(Bertold Speer)도 건축가였다고 그는 말했다.
계보는 그에게도 이어졌고 그는 지금 독일 최고의 건축가로 우뚝 서 있다. 특히 도시설계 부문에서는 세계 건축계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그의 이름을 딴 'AS&P(알베르트 슈페어 & 파트너)'사도 세계 최고의 건축업체 중 하나다.
"프랑크푸르트시의 도시설계 자문을 25년째 맡고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박물관 거리와 고층 건축물 경관지구 조성 공사도 죄다 그의 작품이었다고 그는 답했다.
"최근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외교도시와 중국 상하이 인근의 안팅 자동차 도시설계도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했다. "지금은 인구 50만명의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예나고아(yenagoa) 지역에서 150평방㎞의 도시경관 공사에 참여 중입니다."
그가 유럽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유럽에는 더이상 대규모 도시계획을 실시할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다르죠. 특히 중국은 도시 설계 부문에서 환상적인 시장입니다." 중국에 대해 좀 더 많은 의견을 듣고 싶었다. "중국은 도전하는 만큼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중국 지린성의 창춘(長春)만해도 120㎢의 도시설계가 이뤄졌다고 했다. "유럽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그는 중국에서의 성공에 대해 '지속 가능한 도시설계' 때문이라고 했다. "환경과 생태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중국의 미래를 위해 환경과 생태,에너지 절약,개인난방 등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그 결과를 창춘의 도시설계에 접목했죠." 창춘은 지금 중국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미래형 도시다.
그런 까닭에 그는 10여년 전부터 중국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공도 많이 들였다. 올 초에는 아예 상하이에 지사를 개설했다. "중국은 올해 창춘에서 동계아시안게임을 가졌고 내년에는 베이징에서 올림픽을 개최합니다. 또 오는 2010년에는 상하이세계박람회가 열립니다."
건축가로서 가장 인상깊은 도시를 물었다. "유럽에서는 스페인 바로셀로나가 첫손에 꼽힙니다. 1900년께 생겨난 도시인데 격자형 시스템 위에 설립된 보석 같은 건축 도시죠."
부산과 서울에 대해서도 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신 국제도시화에 대한 감상을 털어놨다. "지금의 국제도시는 다 비슷합니다. 서로 닮아가고 있는 것이 특징이죠. 주방이나 욕실은 아예 전 세계가 다 똑같습니다." 지적은 자연스럽게 개성있는 국제도시로 옮겨갔다. "사람처럼 도시도 개성이 필요합니다." 뉴욕이 좋다고 다 뉴욕처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부산도,서울도 나름대로 색깔을 지닌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질문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이어졌다. 베를린은 히틀러의 지시 아래 그의 부친이 구상한 미래형 계획도시였다. 하지만 그동안 분단과 통일을 거쳤고 그런 과정에서의 변화가 궁금했다. 한반도 통일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매우 갑작스러웠습니다. 독일 역시 이에 대해 온전히 준비하지 못했죠. 특히 동독은 지금도 엄청난 자금이 지원되고 있지만 그곳의 주민들은 꾸준히 서독지역으로 이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향후 독일의 도시계획도 인구 이동에 따른 변화가 주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시 어린 시절을 캐물었다. 건축가가 되지 않았으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말을 많이 더듬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갖고 싶었죠. 그림은 굳이 말이 필요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이 됐다. "너무 바빠서 그림은 그리지 못하는 대신 고객이나 직원을 상대로 매일 엄청난 논쟁을 벌입니다."
그는 한때 고등학교를 중퇴한 불량(?)학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강압적인 것을 잘 견뎌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후 외할아버지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다 뮌헨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때 배운 목수 일이 건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세상에 정말 쓸모없는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지금 100명의 건축사를 거느린 독일 최대의 건축기업 창업주다. 백현충기자 choong@busanilbo.com
독일어 번역=김승남 일신설계 이사
# 알베르트 슈페어
△1934년 독일 베를린 출생
△건축가 겸 도시계획가
△1972년 카이저스라우테른대학 교수
△1984년 AS&P사 설립
△2000년 하노버 박람회 디자인 책임
△중국 상하이 국제 자동차 도시 및 베이징 올림픽 단지 디자인 총책임
△홈페이지 www.as-p.de
※부친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쓴 회고록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는 지난 1월 '마티'에 의해 국내 첫 번역 출판됐다.
출처 - [지구촌-e메일 인터뷰] 독일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 부산일보 (busan.com)
3. 총통관저 독일 제3제국 육군
총통관저 (Reichskanzlei) - 사진은 신 총통관저.
독일은 1878년에 독일수상인 비스마르크가 빌헬름가 77번지의 건물을 독일국 수상궁전(Reichskanzlerpalais)으로서
사용한 것에서 관저의 기원이 시작되는데, 비스마르크는 후에 명칭을 수상관저(Reichskanzlei)로 변경했다. 1930년에
수상관저는 다시 남쪽부근의 빌헬름가 78번지까지 확장되어졌다.
1934년 8월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공석으로 한 채
수상직과 국가원수를 겸임하여 스스로 <지도자 및 독일국 수상>으로 정했다. 국민들에겐 기존대로 지도자라 부르라고 요청한
히틀러였지만 이 표현이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번역시 <총통>으로 알려지면서 히틀러는 총통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35년에 히틀러는 관저를 개조하여 2층에 주거용 개인실을 만들고 외무성과 인접한 정원에는 국빈들을 만나기 위해
200명을 수용가능한 리셉션 홀을 신축함과 동시에 지하에 총통 지하벙커를 만들었다. 당시 독일에선 방공법(防空法)이라는
법률이 있어서 신축건물에 방공호를 만드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1930년에 증축된 부분인 78번지의 건물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백화점, 소방서같이 무미건조한 건물이라
혹평했다. 1938년에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는 국민들 앞에 총통이 나설 수 있도록 발코니를 만들었다. 이에 총통관저는 당시
빌헬름가 77번지의 건물, 78번지의 건물, 빌헬름가와 직각으로 교차된 포스 거리로 이어진 신(新)총통관저의 세 건물의 복합체를
의미했다.
신 총통관저는 1939년에 슈페어가 설계하여 완공했다. 이는 기존의 빌헬름가 78번지의 총통관저에 연결하여 포스 거리로 이어진
헤르만 괴링가까지 서쪽방향으로 400m 이상 연장된 가늘고 긴 고전양식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구 관저와 구별하여 신 총통관저
(Neue Reichskanzlei)라 불렀다.
신 관저엔 총통의 집무실(약 400평), 각료회의실, 식당, 나치당 장관인 마르틴 보르만, 총통관저 장관인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
대통령부 장관인 오토 마이스너의 집무실 등이 있었다. 지하에는 차고와 방공시설이 만들어졌는데, 히틀러는 1939년 1월 12일에
신년축하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면서 각국의 대사들과 외교관, 정부고관 및 당 요원들과 피로연을 주최하기도 했다.
1939년 5월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인 에밀 하하를 총통관저에 불러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할양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1942년 6월 9일엔 암살당한 체코슬로바키아 보호령의 부총독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국장이 열리는 등 총통관저는 역사의
무대가 되었었다.
동양인이 총통관저를 방문한 기록은 1941년에 독일을 방문한 일본의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외무장관이 발코니에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남아있다. 또 신 관저의 피로연 당시엔 주독일 일본대사인 오오시마 히로시(大島浩)가 초대되기도 했으며
1942년 4월 20일에는 재류일본인이 총통관저로 초대되기도 했다.
이 때 <영예의 정원>을 지나는 독일주재 일본인의 사진은 사누키 마타오(佐貫亦男)의 저서인 <추억의 독일>에 게재되기도 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히틀러는 전선과 가까운 총통지휘소에 거주하는 일이 많아 관저에 머무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말기에 연합군에 의한 베를린 공습이 시작되자 총통관저도 피해를 입었다.
1945년 1월 15일 이후 히틀러는 총통관저로 이전하였는데 소련군의 베를린 공세가 시작되자 총통 지하벙커로 피신했다.
1945년 4월 30일에 히틀러는 결국 총통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 5월 1일에 후속 수상으로 지명된 요제프 괴벨스도 자살하여
괴벨스는 총통관저를 이용한 마지막 수상이 되었다. 이들의 시체는 총통관저의 정원에서 소각되어졌다.
5월 2일에 총통관저는 소련군에게 점령되면서 그 역할을 마쳤다. 전후 총통관저는 소련군에 의해 해체철거되었다.
건물에 사용된 붉은 대리석 일부는 소비에트연방 전사자 추도비의 일부로 유용되기도 했으며, 지하철 역사의 마감재로도 이용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철거된 총통관저의 자리에는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최근에 지하벙커의 일부가 파괴되지 않고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총통관저 내부의 정원 및 뜰. 여기선 환영식 및 만찬, 국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신 총통관저 내의 총통집무실의 모습.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갤러리와 연결통로. 이 대리석의 일부는 전후 소련군 전사자의 추도비를 만드는데 이용되어졌다.
출처 : 사누키 마타오 <추억의 독일, 나치스, 공습, 일본인>,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4. 히틀러의 웅장한 꿈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Welthauptstadt Germania)
by 13CM 2023. 8. 9. 16:16
본문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을 "세계의 수도 게르마니아"로 재창조하기를 원했습니다.
시작은 1938년 베를린의 재건축 계획이였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이 1945년까지 제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1950년에 베를린에서 세계 박람회를 개최할거라는 포부로 게르마니아 도시계획을 확장시켰습니다.
18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의 300미터 높이의 거대한 돔형 홀과 기차역, 부처, 거대한 개선문이 있는 수 킬로미터 길이의 웅장한 축,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를린에서 정복한 동유럽을 개방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1937년 4월, 건축가이자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Albert Speer는 독재자에게 베를린의 급진적 재설계를 위한 첫 번째 초안을 제시했습니다.
Speer는 고전적인 건축물을 위협하고 압도하도록 설계된 거대하고 명백하게 엄격한 나치 건축물을 의도적으로 재해석한 뉘른베르크의 건물들에 대한 그의 작업으로 히틀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이 제공해야 했던 최고의 기념물들을 가져감으로써, 웰타우프트슈타트게르마니아 지역을 그 모든 도시들 중 가장 웅장한 도시로 만들려는 히틀러의 비전과 일치했습니다.
이러한 기념물들의 대부분은 시민들과 방문객들 모두에 대한 나치 독일의 우월성을 묘사하는 전반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7킬로미터 (4.3마일)의 빛의 거리를 따라 배치될 것입니다.
그 거리의 남쪽 끝에는, 히틀러의 계획된 아치 안에 여섯 번 들어갈 수 있는 파리의 개선문을 왜소하게 설계된 개선문이 있을 것입니다.
북쪽 끝에서, 그 대로는 거대한 총통의 궁전, 독일 총리실, 그리고 터무니없이 거대한 그랜드 홀을 특징으로 하는 퍼레이드 그라운드로 열릴 것입니다.
도시의 새 이름: "게르마니아"
돔 홀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17배, 계획된 개선문은 파리의 개선문보다 49배 만큼 넓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과대 망상적인 디자인 중 어느 것도 실제로 구현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건축물을 지탱하기엔 배를린의 지반이 습기가 많아 너무 물렀고 지반도 약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베를린의 늪지대를 보강하기 위해 독일 토양역학협회의 엔지니어들 에게 위임했습니다.
약한 지반을 보수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중 기초공사를 틈틈히 했지만 결국 그전에 전쟁에서 패배하여 끝이 납니다.
불행하게도, 지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1945년 베를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이 계획을 위해 수 천명의 평범한 베를린 주민들도 1939년부터 고통을 느꼈는데, 이들은 새 도시에 자리를 내주고, 정부가 파괴될 부동산의 많은 부분을 사들이기 위해 강제로 다시 수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시민들은 훨씬 더 비좁은 수용시설로, 나중에는 집단 거주지로, 그리고 나서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나치 정권이 홀로코스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계획은 1938년 11월 포그롬이 일어나기도 전에 유대인들을 집에서 쫓겨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성공했다면,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총 건축 감독관인 알베르트 슈페어의 바람에 따라 제3제국의 수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도시의 넓은 지역들은 - 5만에서 10만 채 사이의 주택들을 포함하여 - 휩쓸려갔을 것이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기에 충분히 커 보이는 - 라이히슈타그와 브란덴부르크 문과 같은 오래된 건축물들은 거대한 비율의 새로운 건축물들로 인해 늪에 빠졌을 것입니다.
히틀러의 프로젝트에 비평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슈페어의 두 번째 인물인 한스 스테판은 게르마니아 프로젝트의 고압적인 성격을 비밀리에 패러디한 캐리커처 시리즈를 그렸습니다.
몇몇 그림들은 그랜드 홀의 우스꽝스러운 크기를 재미있게 묘사합니다.
하나는 베를린의 가장 큰 건물인 라이히스탁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그랜드 홀을 건설하는 동안 크레인에 의해 우연히 옮겨지는 것을 묘사합니다.
출처 - 히틀러의 웅장한 꿈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Welthauptstadt Germania)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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