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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전 남

화엄사 사사자석탑 (2023. 03.)

 

 

 

 

 

 

 

 

[숲과 사찰 사사자심층석탑] 1,400년을 뛰어넘은 연기조사의 孝心, 다시 서다

 

 

국보 35호 지리산 화엄사 사사자四獅子삼층석탑은 각황전(국보 67), 석등(국보 12) 과 함께 화엄사를 대표하는

국보로서 화엄사의 상징이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국내의 대표적인 이형異形 석탑이다. 2층으로 높게 만들어진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로 이뤄져 있다.

 

상층기단에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모퉁이에 세워놓은 구조인데 사자의 형상은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상태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네 마리의 사자에 둘러싸인 채 합장을 하고 있는 어머니상이 조각돼 있는데 이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석등을 머리에 이고 탑을 향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극진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사 창건한 연기조사의 효심을 표현

 

상층기단에 사자 네 마리가 상부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국내에서 흔히 접하는 삼층석탑과는 다른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 준다.

 

석탑 하층기단 사면에는 천인상이, 1층 탑신석에는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 등이 조각되어 있어 석조각과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석등에는 각각 인물상이 새겨져 있는데

화엄사 창건자로 알려진 연기조사와 그의 모친이라는 설, 스승과 제자라는 설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균열과 파손 심각, 촌각을 다투던 상태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사사자삼층석탑은 2011년 구례군에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남동쪽으로 기울어 있고

기단부 균열·절단·벌어짐 등 다수의 구조적 불안정이 확인되면서 2012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해체보수가 결정돼 2016년 해체됐다.

 

조사결과, 석탑은 오랜 세월 비와 바람의 영향으로 손상되면서 하층기단 내부를 채우고 있던 적심(+잡석)이 유실되어

구조적 불균형에 의한 석재의 파손 등이 발생했으며, 대부분의 상부 하중을 지지하는 사자상과 상층기단 갑석에도 구조적 균열과 미세 균열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보수는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8년부터 석탑에 대한 학술조사, 수리기술 연구, 보존처리 등을 시행해 약 3년 만인 20219

석탑의 조립을 마쳤다. 과학적인 보존처리와 구조보강을 통해 원래의 석재를 대부분 다시 사용해 석탑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완공된 석탑의 전체 높이는 7.1m, 너비는 4.2m, 무게는 약 50톤에 이른다.

(글 출처 : 월간산 20223월호)

 

 

 

 

 

 

 

 

 

 

 

 

 

 

 

 

 

 

 

 

 

 

 

 

 

 

 

 

 

 

 

 

 

 

구례 화엄사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緣起) 조사(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나, 연기 조사는 8세기 인물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현전하는 화엄사 관련 기록이나 유물로 미루어 화엄사는 8세기경 지리산 일대의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 각황전 뒤쪽의 효대(孝臺)에 조성된 4사자3층석탑은 8세기 화엄사와 관련된 유물이며, 신라하대에는

화엄경(華嚴經)석경(石經)을 조성하여 전각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각황전 자리에 있던 전각 석벽에 화엄경

새겼는데,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소실된 뒤 수만점의 석경 파편만 전한다. 또한 각황전 앞에 있는 사자탑과 석등,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동서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유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최치원(崔致遠)의 글에서 의상(義湘)의 전교십찰(傳敎十刹) 중 하나로 화엄사를 꼽고 있어

신라하대 부석사(浮石寺)와 함께 화엄사도 신라 화엄사찰로서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말여초 화엄사에서는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화엄사에는 승려가 계를 받는 계단(戒壇)도 설치되었다.

후삼국시기 화엄종이 남악과 북악으로 분열되었을 때 화엄사의 관혜(觀惠) 대사는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로 활동하였다. 고려시대에도 화엄사는 부석사와 함께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의 명성을 이어갔고,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은 화엄사에 들러 연기 조사를 추모하고, 연기의 저술을 다섯 가지나 찾아내어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수록하였고, 원종문류(圓宗文類)간행에 참여하여 교정을 맡았던 의천의 문도 중에는 화엄사 주지도 있었다.

충렬왕대에는 원소암이 창건되었고, 공민왕대는 적기암이 창건되는 등 고려말에도 화엄사는 건재하였다.

(글 출처 : 위키 실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