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목포일본영사관
The Old Mokpo Japanese Consulate , 舊木浦日本領事館
시대 근대/개항기
문화재 지정 사적 제289호
건립시기 대한제국기, 1900년
면적 327.27㎡
소재지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 2가 1-5
분야 예술·체육/건축
요약
대학제국기에 건립된 조적조 건물로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에 위치한
일본영사관 건물. 사적.
구목포일본영사관은 일본이 건립한 일본영사관으로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7년 10월 16일 대한제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의 각국 사이에 체결된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에 따라
같은 해 10월 26일 개항장인 목포에 일본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 건물은 목포에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면서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영사관으로 지은 2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다.
간략한 고전주의 건축양식이 특징이다.
일본은 조선시대 수군의 군영이었던 만호청을 빌려 영사관으로 사용하다
영사관을 짓기 위해 무안감리에게 영사관 부지로 1만 6028㎡를 요청하였으나
9483㎡을 승인받아 이 영사관을 지었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공사비 7만여 원을 들여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1월 22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에 관한 법령에 따라 목포의 일본영사관은 목포 이사청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고,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10월 1일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무안부는 목포부로 개칭되었으며,
이사청사는 목포부청사로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7년부터는 목포시청, 1974년부터 시립도서관,
1990년 1월부터 2009년까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2014년부터는 목포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체험현장인
목포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일본영사관은 목포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경사지에 영사관을 짓기 위해 일본식 축댓돌[犬齒石] 쌓기로 대지를 조성하였다.
건물은 중앙의 목조현관과
삼각형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구성을 가진
간략한 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흰색과 붉은 벽돌을 교대로 사용한 창문의 아치는
같은 시기 서양 건물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내부는 나무 바닥과 천장의 장식 그리고 벽난로 등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 일왕의 사진이나 말을 보관하던 봉안전(奉安殿) 터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건설한
방공호 등이 남아 있다.
당시 서양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고
일제 침략의 현장으로 역사적 교훈을 주는 사적으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획특집-박물관을 가다 [17] 목포근대역사관
- 근대문화역사공간에서 목포 개항장을 떠올리다
목포근대역사관은 2관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근대건축물을 활용한 박물관이다. 1관은 목포 일본영사관이었던 근대건축물을 활용하였으며, 일곱 주제를 가지고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첫 번째 주제에서는 목포의 지명유래와 함께 조선시대 수군진영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진으로 불리기도 했던 목포진의 설치부터 운영 등 전근대 목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주제에서는 1897년 목포가 고종의 칙령에 의해 자발적인 개항이 이루어지며 개항장의 모습과 전국 3대항 6대 도시로 성장하게 되면서 삼백(쌀, 목화, 소금)의 고장으로 그 명성을 알리게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주제에서는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과 4.8만세운동, 청년운동 등을 목포의 항일 독립운동을 볼 수가 있다. 네 번째 주제에서는 개항 후 기독교, 천주교, 일본 불교가 전파되고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와 조선인을 위한 학교가 개교하며 종교,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문물이 전파된 모습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주제에서는 개항 이후 목포에는 목포극장(1920년), 평화관(1927년)이 건립되어 근대 영화를 상영하며, 다양한 공연활동과 가극공연, 연극, 대중가요 등 활발한 문화 활동을 나타내고 있다. 여섯 번째 주제에서는 1919년 4월 8일 정명여고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당시의 교복과 모자, 안경 등 다양한 소품이 전시되어 관람객이 직접 만세운동을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곱 번째 주제에서는 개항 이후 가장 활발하게 외국 문물을 받아들인 목포에는 다양한 근대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특히 그 중심지였던 오거리 주변의 동본원사, 호남은행, 양동교회, 일본영사관, 일본인 가옥 등이 있는 목포역과 오거리 일대의 건물 모형을 정교하게 만들어 전시해 목포 개항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은 1관에서 약 200m 떨어져 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었던 근대건축물을 사용하였다. 1층에는 일제강점기 수난의 역사와 1920년대 말 목포의 모습을 옛 사진과 각종 자료를 통해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에서는 ‘영웅, 그 날의 기억을 걷다’ 목포 독립운동 특별전으로 일제의 수탈과 목포의 의병활동, 4·8만세운동, 노동자 투쟁, 1920~30년대 독립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진 자주독립을 향한 목포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 역사관은 그 자체로 역사기념물
목포근대역사관은 1관과 2관 모두 근대건축물을 활용한 박물관으로 건축물 그 자체로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1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목포 일본영사관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로 사적 제289호이다. 일본영사관은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곳으로 유달산 노적봉 아래 자락에 위치해 평지보다 조금 높아 목포항을 내려다보기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고, 공사비 7만여 원을 들여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일본인들의 기록이 전한다.
건물은 2층 구조로 돌출한 출입구를 기본으로 좌우가 대칭이다. 외벽은 붉은 벽돌을 주로 사용하고, 곳곳에 적절하게 흰색 벽돌을 첨가하여 건물을 장식하였다. 수직형 창틀 위에는 일본 국기를 연상하게 하는 원형 장식이 남아있다. 건물 2층 중앙 창틀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모되어 없어졌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벽돌로 허리 돌림띠를 두어 층간의 구별을 명확하게 했다.
건물 내부에는 벽난로가 8개가 있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2층 중앙의 벽난로는 건립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1905년 이후에는 목포이사청, 목포부청 등으로 사용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 1990년부터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최근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 후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하였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으로 전라남도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한국의 경제를 침탈하기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특수회사이다. 일본인 이주 지원, 식민지 지주 육성, 농장 관리, 금융 등이 주요 업무였다. 서울에 본점을 두고 전국 주요도시 9곳에 지점을 세웠다. 목포지점은 본래 나주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장소를 1920년 목포로 옮긴 것이며, 1921년 신축하였다.
서양건축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두 곳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한곳으로 부산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비해 규모면에서 앞선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였던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후기 르네상스 양식에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 건물로 일본을 상징하는 모양이 여러 곳에 새겨져 있는데 정문 입구에 태양문양, 좌측 상단부 벚꽃모양 등을 볼 수 있으며, 내부에는 당시 사용했던 대형 금고가 남아있다.
해방 이후 이 건물은 대한민국의 해군기지로 사용하였다. 1946년부터 1974년까지 해군 목포경비부로, 1974년부터 1989년까지 해군 제3해역사령부 헌병대로 사용하였고 이후 헌병대가 영암군으로 이전해 1999년까지 10여 년간 방치되어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시민사회와 학계의 요구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이후 내부 보수를 거쳐 2006년부터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두 건물은 목포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근대건축물로 식민지 수탈의 상징하는 공간이자 해방 후 목포시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이다.
■ 전쟁 준비의 흔적, 유달산 방공호
목포근대역사관 1관 뒤편에는 방공호가 있다. 방공호는 공중에서 가해지는 폭격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적 목적의 방어 시설이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때 대규모 방공호를 만들어 취사 시설과 공기 정화 시설까지 마련하고 장기전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한반도의 경우,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대형 방공호가 만들어 졌으며, 목포에는 유달산과 고하도에 방공호가 만들어 졌다.
유달산 자락의 이 방공호는 일제 말기인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된다. 유달산 방공호의 전체 길이는 72m이며, 중앙 출입구가 있고 좌우에 별도의 출입구가 있는 등 밖으로 통하는 문은 3개이다. 높이는 2m내외이며 폭이 넓은 곳은 3.3m에 이른다. 이 방공호는 당시 유달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150사단 사령부가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목포 앞 고하도에는 인간어뢰정을 은닉하기 위해 파놓은 인공터널 20여개가 있다. 방공호 조성에는 한국인들이 강제 동원되었다. 군인으로 징병한 사람들을 이러한 군사시설 현장 노동자로 투입하여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방공호 내부에 모형으로 재연해놓았다.
■ 목포근대역사관의 현재와 미래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1897년 목포가 국제 무역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설치한 각국 거류지 지역이다.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목포진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주변 해안가를 간척하여 근대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바둑판식 도로 구조와 근대 건축물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공간이다. 개항 당시 목포 각국 거류지의 전체 면적은 약 22만평으로 이중 핵심에 해당하는 지역을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등록하였다.
이 공간은 과거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 일대에서 목포역 방향으로 이어진 대표 도로를 중심에 놓고 유달산·목포진·선창을 연결하는 구조이다. 이 일대에는 각종 관공서를 비롯해 일본인들이 다녔던 학교와 교회, 일본식 민가,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 시설이 밀집해 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식민지 수탈의 아픔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부두노동운동·소작쟁의·의병·항일 운동 등 민족의 저항 역사가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또한 해방이후 항구 도시 목포사람들의 삶의 중심 터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문화공간을 살려 문화재청의 대표적 문화재 활성화 사업인 야행을 2018년부터 진행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원도심 재생프로젝트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영사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이러한 목포의 시대 변화에 따라 모습과 역할을 바꿔왔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이 공간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상 글 출처: 평택시사신문 황수근 전문기자)
목포 평화의 소녀상
국토 1,2호선 기점 기념비
목포는 호남선의 종착역이자 도로교통의 동맥과도 같은
국도 1호선(목포~신의주 939,1km)과 국도 2호선(목포~부산 377,9km)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1월 20일에 건립한
도로원표 표지석이 구 일본영사관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지만
2012년 6월에 목포대교가 개통됨에 따라서 국도 1호선 기점이 충무동 고하도로
2001년에는 국도 2호선 기점이 신안군 장산면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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